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95년 3월 4일, 제게 있어 이날은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보름만에 결혼 약속을 한 후 바로 양가 부모님 상견례 자리를 친정집에서 마련했었답니다 그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며느리 될 사람의 집안 분위기도 보시고 정성껏 차린 음식을 그의 부모님께 대접하고 싶은 저의 생각 때문이었죠. 양가 보모님이 만나시는 날,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고, 봄의 문턱에서 탐스러운 눈이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집에서의 첫만남은 생각외로 좋은 시간이었지요. 술잔이 몇 순배 오가자 당사자들 보다도 어른들께서 더 흐믓해 하시며 서로가까이 지내자며 우리들의 화제는 오간데없이 사라져버렸지요. 마당에서 양가 어머님을 교차로 세우시고 기념촬영도 했지요. 시아버님 옆에 친정어머니, 시어머님 옆에 친정아버지, 외국 대통령들이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첫만남은 부드럽게 이어졌고, 기분이 최상인 저는 생낙지랑, 소고기 육회랑, 거북할 정도로 많이 먹었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미래의 희망만을 떠올렸어요. 그는 저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을 아끼지 않았고, 양가 어르신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친구처럼 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죠. 이런 우리의 행복을 싣고 차는 계속 서울로 전진하고 있었죠. 그런데 대전을 지나자 눈이 녹아 미끄러워서인지 차가 많이 정체되었죠. 차가 정체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손을 꼬옥 잡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했답니다. 그런데 죽암휴게소 부근에 왔을 때, 갑자기 배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부글부글 끓다가 우글우글 꼬이다가...,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죠. 낙지랑 소고기랑 치고받고 싸우는지... 그이를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탓도 있었지만 항상 고상(때론 고고)하게 행동했던 저였기에 그이 앞에서 원초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어찌하겠습니까.
드디어 서울 근처에서 야단이 나고 말았답니다. 참으려고 몸을 비틀어대고 힘을 주고 아랫배에 힘을 모아 놓고 하느님, 알라신이시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이시여, 제발 이 위기에서 구해주소서! 발악에 가까운 기도를 계속했지만,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줄줄 흘러나오려는 게 아닙니까. 저는 더 큰 망신 당하기 전에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죠.
"자기야, 자기야 좀 일어나봐. 운전수 아저씨한테 가서 차 좀 세워 달라고 해. 더는 못 참겠어. 빨리!"
잠들었던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운전석으로 가더니 다시 돌아왔어요.
"지금 차가 1차선에 있어서 세울 수가 없대. 서울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난 참아."
그는 제 손을 꼭 쥐어주며 안타까워했어요. 그러나 제 온뭄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차 좀 세워달라고 하란 말야, 빨리!"
저는 악을 써대기 시작했죠. 밤이라서 잠들었던 다른 손님들이 뒤척이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초조해진 저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그이는 운전석과 제 사이을 오가며 어쩔 줄을 몰라했어요. 그러다가 더는 이대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는 일낼 것 같아 바닥에 주저앉은 저를 보자, 그이는 신문지를 꺼내 주더군요. 아마 깔고 앉으라고 그런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저는 신문지를 딴 용도로 쓰고 말았죠. 그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전 그만... 전 그만... 저질러버리고 말았어요. 누군가의 표현대로 단숨에 예술의 경지에 오르고 만 것이었죠. 그런데 무슨 예술적 승화가 이리도 시원한지... 저의 의식은 오직 시원하게 제 볼일을 본 기쁨에만 빠져들었죠. 얼마나 시원하던지... '우주의 모든 신들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렇게도 후련할 수가...' 그러나 누가 또 그 말을 했던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예술의 향기는 말없이 길고도 넓게 퍼져갔고, 사람들은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그제서야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던 저는 제 인생을 저주하며 제 인생이 여기서 마감되기를 빌었답니다. 아니 시간이 영원히 정지하기를 빌고 또 빌었죠. 간절히...! 망연자실한 그이 앞에서 저의 고상하고 고고했던 자존심은 송두리째 뭉개지고 말았으니...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잠시후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고, 저는 고개 숙인 여자가 되어 신문지를 의자 아래에 숨긴 채 조용히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신문지 뭉치를 들고 맨 나중에 내릴 땐 거의 전 청문회 입장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쪽팔림도 잠시, 전 또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겨우 수습을 하고 거울 앞에 서니 제 모습이 가관이더군요. 밖에 나오니 그이가 세상에서 가정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제 손을 잡더니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그리고는 제 손에 뭔가를 쥐어주며, '예술의 전당'에 한 번 더 가라는 거예요.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 자상하기도 하지. 엄청난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서 철렁였죠. 하지만 팬티는 아줌마들이 입는 대자에 웬 자석까지 달린 자석팬티였죠. 그러나 제가 이것저것 가릴 형편입니까. 일단은 갈아입고 나갔죠. 그가 씨익 웃더군요. 저도 따라 부끄럽게 웃었죠. 다음날 그가 전화로 심각하게 말하더군요.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직까지 일을 가리지 못하는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사냐? 결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양가 부모님께는 내가 잘 말씀 드리겠다."
"..."
저는 아무 말도 알 수 없었고, 남편은 다시 말을 이었어요.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결혼 후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말 잘 들으면 입을 꼭 다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빌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몇 번을 약속하고 그해 겨울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리고 그는 결혼 이후로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상기시켜 주더군요.
"고속버스 생각나."
해놓고 킥킥댄답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소리만 해봐라. 그때는 이혼이야. 알았어."
하고 으름장을 놓지만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으며 한술 더 떠서 말 한답니다.
"장인 어른께 전화나 할까. 당신 딸 데려가라고."
'내 인생이 우째 이리 됐나. 아들만 낳아봐라. 그때는 그렇게도 안될걸.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속으로 별렀지만, 결국 신도 남자였더라구요. 저는 저를 쏙 빼닮은 딸을 낳았답니다. 결국 남편의 앞날은 무궁무진하게도 딱 트여 있고, 저의 앞날에는 어두운 터널만이 가득하게 되었죠. 우째 이런 일이...!
신이시여!
이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시고 튼든한 아들 한 놈 보내주시어 수렁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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