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수갑차던 날
때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제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일입니다.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로 제도가 바뀌는 시기라 방학이라도 방학이 아니었습니다. 보충수업에 모의고사에 정신을 못 차리며 방학을 보내고 있던 어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저는 민수라는 친구집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날씨는 덥죠, 휴가철이라고 여기저기서 휴가얘기죠,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둘은 웃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쭈쭈바만 빨아대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나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민수 어머니께서 외출을 하신다고 나가시더군요. 우리들은 거실바닥을 몇 바퀴 뒹굴거리다 민수녀석이 문득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수갑한번 차볼래?"
수갑이란 말에 좀 찜찜하긴 했지만 수사반장 같은 데서 수갑채우는 모습을 생각해보니 좀 멋있어 보이는 것도 같더군요. 민수아버님께서 당시 파출소 소장님이셨고, 집에 미제 수갑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심심했던 차에 그러마고 했습니다. 잠시후 민수녀석이 수갑하나를 덜렁거리며 들고 왔습니다. 좀 섬뜩하데요. 민수녀석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며 제 손목에 수갑을 철컥 채웠습니다. 종환형님, 유라씨! 수갑 차보신 적 있습니까? 그거 기분 별롭니다. 녀석과 나는 수갑을 차고 '한판의 탈주극'놀이 비슷한 걸 했습니다. 더워서 땀이 흐르니까 손목이 아프더군요.
"야! 이거 이제 풀어줘."
민수녀석은 알았다며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전 궁금해서 안방문을 열고 빼꼼이 들여다 보니 이녀석이 글쎄 장롱을 발칵 뒤집어 놓은 채 열쇠를 찾느라고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전 순간 몹시 불길한 예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야! 없냐?"
조심스레 묻는 저의 물음에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본건 죄다 흉내를 내며 수갑을 풀어보려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성냥개비로 쑤셔도 보고 클립을 펼쳐서 찔러도 보고 핀으로 돌려보고 온갖 짓을 다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미제 수갑 그거 품질 좋데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민수아버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으신 민수아버님은 빨리 뛰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수네집이 교대앞이었고, 아버님 계신 파출소가 해운대였습니다. 거길 어떻게 뛰어갑니까? 그것도 두 손 묶고 말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진 거라곤 회수권 몇 장 뿐이니 택시도 못타고 버스로 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여름에 해운대 가는 버스는 말도 못하게 비좁다는 거 짐작으로도 아실 겁니다. 특히 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저는 민수를 최대한 증오어린 눈빛으로 째려보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민수녀석은 T셔츠를 입더니, 제겐 겨울 잠바를 던져주는 겁니다. 그 더운 여름에 그걸 망토처럼 걸치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니까 두 손 묶고 옷을 입을 방법이 없더군요. 전 미친놈처럼 그 더운 여름에 잠바를 걸치고 손엔 수건을 감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또 왜 그렇게 붐비는지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손잡이 하나 비어 있는 게 없더군요. 하긴 손잡이가 있어도 그걸 어떻게 잡습니까? 수갑 차고 그 위에 수건까지 감았는데.... 민수녀석은 저를 꼭 껴안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흘금흘금 훔쳐보며 별 이상한 녀석도 다 있다는 시선을 보내더군요. 정말 참기 힘들었습니다. 덥죠, 중심 못잡으니까 넘어질까 불안하죠, 손목은 아프죠, 옆에 서 있는 민수녀석 발을 밟아버렸습니다. 순간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그제야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철도건널목 앞에서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민수녀석은 절 놓쳐 버렸고, 저는 격렬한
"어-어-어."
소리만 반복하며 사정없이 앞으로 넘어졌고, 걸치고 있던 잠바는 옆에 서 있는 아가씨가 넘어지지 말라고 붙들어주는 바람에 훌렁 벗겨져 버리고, 손에 감았던 수건은 바닥에 떨어져, 수갑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 순간 여자들은 무슨 괴한이나 만난 듯 비명을 질렸습니다. 사람들이 절 피하면서 웅성거리고, 급기야는 버스기사님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차를 세우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민수녀석이 글쎄 제 뒤통수를 불이 번쩍할 만큼 딱! 후려치더니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있어 임마! 뭘 잘했다구...."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이녀석은 제법 형사나 된 것처럼 사람들과 기사님께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다는 요지의 사과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말도 없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죽은 듯이 있었습니다. 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생각하기 싫은 그때였습니다. 우리는 아버님께 가서 장난친 죄로 1시간 벌을 서고 나서야 수갑에서 풀릴 수 있었습니다. 정말 원없이 수갑 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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