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화장지의 최후
나이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래된 이야기를 가지고 생기와 재기 넘치는 국내 최고의 인기 프로를 기웃거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한국 전쟁 때에는 저도 20대 초반의 젊은 장교였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는데 한국군 장교들이 군사지식과 전투경험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에 경험이 많은 공산군을 상대로 한 작전 지휘에 문제가 많았지요. 그래서 미국 정부에서 한국군 전투병과의 초급장교을 뽑아서 미국 군사학교에 데려다가 6개월씩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일선근무 중대장이었던 저도 솔직히 말해 죽기 전에 미국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험을 봐 가지고 1952년 9월 미국 가는 배를 탔습니다. 보병과 포병 250명이 함께 가는데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먹고 마시는 것, 화장실 이용하는 것, 모든 것이 그 당시에는 그저 신기한기만 했습니다. 자동판매기에 5센트짜리 동전 하나를 넣으면 코카콜라가 병째로 떨어져 나오는 것, 커피 자판기에서 입맛대로 골라서 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요. 떠나기 전에 우리는 대구 보충대에서 사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우리가 한가지 결의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 우리도 이제 국제 신사가 되었으니 코를 닦거나 용변을 볼 때 신문지 쪼가리 같은 것을 쓰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미제 화장지를 사용하자."
우리는 듯을 모아 모두 양키 시장에 나가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한 개씩 사서 손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배에 올러보니 화장실마다 화장지가 걸려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지아주 콜럼버스까지 나흘 밤낮을 달린 기차안에도 다 있었기 때문에 가방에 있는 화장지를 꺼내 쓸 일이 없었습니다. 미국 보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니 거기도 어김없이 화장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화장지를 꺼내서 기숙사 책상위에 저마다 울려 놓고 기회있을 때마다 의젓하게 품위있게 뜯어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첫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니 책상위에 있던 그 국제 신사들의 화장지가 싹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제각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우리 기숙사방 청소를 맡은 그 뚱보 흑인 여자가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는 것으로 모아졌고, 혼내줘야 한다, 도로 찾아와야 한다, 제각기 한마디씩 와글와글 끓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장교인 학생 중대장이 우리를 급히 모이라 하여 집합을 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닙다.
"한국 장교 여러분! 화장실에 걸려 있는 화장지를 개인적으로 가져다 쓰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흥분했습니다.
"아니, 우리를 도대체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야. 우린 신사란 말야, 국제 신사. 그건 우리가 대구에서 돈 주고 사 온 것이고 그걸 흑인 여자가 다 가져갔는데 우리더러 화장지를 훔쳤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당시만 해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통역 장교들이 미리 가서 상주해 있었는데 그때 통역 장교가 통역 아닌 자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대구에서부터 화장지를 사 가지고 오신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나라에서는 화장지도 구분이 있어서 두루마리 화장지는 큰 일을 볼 때만 쓰기 때문에 꼭 화장실에만 걸려있고, 코를 닦는다든가 그밖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휴지는 클리넥스라고 종이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한 장씩 빼서 쓰는 것입니다. 화장실에만 있어야 할 두루마리 화장지가 책상마다 놓여 있으니까 이 사람들이 여러분께사 사 온 것인 줄은 모르고 오해를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니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놀랐습니다.
"원 별 사람들 다 보는군. 뭐 휴지까지 어디서 쓰는 것이 따로 있다니 별일이야. 별일!"
그렇게 투덜대기만 했지요. 그리고 PX에 가서 클리넥스 한 통씩을 사고 휴대용도 몇 개씩 사서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화장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화장실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거기 기숙사 화장실엔 큰 것 보는 데가 대여섯칸 쭉 붙어 있는데 거기 문은 바닥에서 40센티미터 가량 떠 있었습니다. 손님이 들어 있으면 누군지는 몰라도 좌변기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의 발과 정강이가 보이게 돼 있습니다. 아침엔 칸칸이 손님이 둘어 있어서 엄청 붐비게 되지요. 사람들은 문밑으로 정강이가 인 보이면 빈칸이니까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는데, 어느 날 아침 미국 장교가 와서 정강이가 안 보이는 칸의 문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런데 잘 안 열렸습니다. 힘을 줘서 당겨도 말입니다.
"이 문이 왜 이렇게 빡빡하지?"
중얼거리면서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그런데 왈칵 문이 열리는 순간 그 미국 장교는 '으악'하고 놀라자빠졌습니다. 사람이 없는 줄만 알았던 그 안에는 한국 장교 한 사람이 좌변기에 올라앉아서 잔통적이고 고전적인 한국인의 용변자세 '쪼그려쏴'자세로 열심히 일을 보고 있었던 겄입니다. 좌변기가 없었던 그때 우리나라 살마으로선 거기 턱 걸터앉아서 일을 보려면 도무지 힘이 모아지지 않아서 기합과 힘을 집중해야만 그놈이 항복하고 나와 주었거든요. 정식 수업은 통역장교 덕분에 큰 지장없이 진행되었지만 일상 생활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면 맨 먼저 미국 취사병이 물어봅니다.
"어떻게 요리한 계란을 드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말에 자신이 없으니까 앞의 장교가 '프라이드(Fried)'하면 뒤따라서 '미 투(Me Too)', '미 투(Me Too)' 하는 겁니다. 삶은 계란도 있고 '스크램블'도 있는데 저마다 '프라이드 에그(Fried Egg)'만 달라니까 취사병들은 정신없이 바빠지고 혼이 나서 다음날 아침엔 미리 '프라이드'를 많이 준비해 놨는데, 이번에 앞 사람이 '보일드'하니까 저마다 또 '보일드'예요. '보일드 에그'는 3-4분은 삶아야 하는데 프라이드는 남고 보일드는 미처 삶아댈 수가 없고 해서 또 법석을 떨게 되지요. 휴일에 물건을 사러 나가면 더 희극이 벌어집니다. 어떤 장교가 마누라 브래지어를 사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점원 아가씨한테 진열장에 있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까 싸이즈가 뭐냐고 묻더랍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싸이즈 개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싸이즈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이 친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점원 아가씨를 한참 쳐다보다가 속으로 '이 처녀 몸집이 내 마누라하고 비슷할 거야.'생각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쟈스트 라이크 유(너하고 똑같다)!"
그러자 이 말에 점원 처녀는 얼굴이 홍당무가 돼 가지고 이 장교를 한참 노려보다가 휭 하고 가버렸어요. 국제 신사 장교님은 영문을 모르고 쩔쩔매다가 물건도 못 사고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랍니다.
"이 사람아, 그 물건 싸이즈가 '네가 내 아내와 똑같다'고 했으니 그럼 자네가 그 처녀의 것도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에이 사람두."
그 사건 이후 이 장교는 공포증에 걸려서 쇼핑을 하러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귀국 날짜는 가까워 오고 아내에게 줄 물건은 꼭 사야겠고 그런데 그것만은 꼭 혼자 가서 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궁리 끝에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쇼핑 영어 각본을 하나 적어 달라고 했더랍니다. 그리고 그 각본을 가지고 날마다 열심히 외웠습니다.
1 가게문을 열고 들어간다.
2 점원이 반기면서 May I help you, Sir? 하면서 응대한다.
3 그러면 나는 우선 Just looking 이렇게 대답을 하고
4 이것 저것 물건을 살핀다
5 ...
6 ...
뭐 이런 식으로 적혀있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밤낮없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외웠습니다. 월요일부터 닷새 동안을 밥먹을 때나 침대에서나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열심히 외웠더니 제법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더랍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급히 콜럼버스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늘 눈여겨봐두었던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가게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서면서 기세 좋게 말했습니다.
"May I help you, Sir?"
그랬더니 점원 여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게 아닙니까. '아차! 이건 점원이 말하는 대사였는데....'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 문을 닫고 뛰쳐나왔습니다.등뒤로 여 점원들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길로 달려가서 버스를 탔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돌대가리가 어디 또 있을까? 그 간단한 영어를 일주일 동안이나 연습을 하고서도 첫마디부터 틀리다니, 나 같은 돌대가리는 죽어야 해. 살아있을 필요가 없어. 그래, 죽어버리자. 밥 한끼라도 축내지 않으려면 나 같은 돌대가리는 죽어버리는 게 나아. 그런데 어떻게 죽을까? 그것도 어려울 것 같고 여기 미국선 먹고 죽을 독약도 구할 수가 없고, 어찌한다...' 죽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생각났습니다. '가만있자, 진화론이 맞는다면 내가 돌대가리니까 내 아들은 나무대가리, 손자는 두부대가리...이렇게 진화되면 5, 6대 후에는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데 내가 지금 죽으면 그 천재가 나올 수 없지 않은가. 아! 죽어서는 안되겠구나. 암 절대 죽어서는 안되지.' 진화론은 참으로 좋은 이론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귀국 후 숱한 전투를 겪고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금껏 살아서 이렇게 두 분께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젊었을 때 부디 공부 열심히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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