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추억의 가죽피리
저는 최근 추억속의 한 친구를 우연히 만나 오랜만에 정말 아주 오래만에 살고 있음이, 그래서 웃을 수 있음이 너무 행복했던 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얼마 전 저희 회사에 부자재를 공급하던 한 업체가 경영난으로 도산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뒤로 한 채 새로운 거래선을 찾기 위해 아는 이의 소개로 근교의 공단에 있는 모 업체를 방문하였습니다. 상담은 생각보다 순조로웠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나누며 사무실 문을 막 나서려다 제법 넓은 사무실 저편에 아주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눈이 좀 나쁜지라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라고 생각하며 실눈을 뜨고 잠시 그를 쳐다보는데 마침 그도 자기에게 오는 시선을 느낀 듯이 저를 잠시 쳐다보더니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으악- 대갈아!(대가리는 저의 학창시절 별명이었음)"
착 달라붙은 곱슬머리! 두툼한 입술! 포대를 하나 씌워 보면 앞뒤좌우 구분이 안되는 통자루 몸매! 아! 저는 주마등처럼 제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추억을 되새기며 외쳤죠.
"똥갈아~. 아니 가죽피리."
여기서 잠시 이 친구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친구와 저는 대학동창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저도 만만찮은 악동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만 '똥가리' 아니 '가죽피리!' 가히 이 친구의 명성은 저의 대학사에 깊이 남고도 또 남을 그러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똥가리'라는 별명은 워낙이 짜리몽땅한 이 친구의 몸매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친구의 진짜 진가는 '가죽피리'라는 별명에서 벌써 눈치채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시도때도 없이 발포하는 '방귀'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웬만한 남자들의 좀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방귀 정도로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 친구도 처음엔 그저 남들보다 좀 자주 발산되는 생리현상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재미로 즐기다가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취미생활로 바뀌면서 소리의 장단과 음의 높낮이, 심지어 냄새까지 조절하는 방귀에 관한 한 어떤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 친구의 명성은 그 시절 바로 방귀 때문에 중요한 학점을 놓쳐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될 뻔한 사건으로 치달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전말인즉, 평소 이 친구의 소행이 강의시간 중에 특히 수업이 좀 지루해질 무렵이면 여지없이 괴음을 발포하여 웃음바다르 만들기 일수였고, 그 소리 또한 다양해서 같은 과 친구들은 물론 교수님까지도 그의 새로운 방귀소리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과의 유일한 여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당시 상당한 미모에다 젊고 유능한 교수님이셨기에 늘 남학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 '가죽피리' 역시 그 여교수님을 누구 못지 않게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이 친구는 늘 여교수님의 강의시간 중에 그 흠모의 표현을 주특기인 방귀소리로 대신하곤 하였는데 다른 강의시간에 발포하던 그 다양한 소리들과는 완연히 다른 아주 일관된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뽀오-오-오-옹-."
아주 가늘고 길게.... 사랑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려고 상당한 시간을 연습하여 만든 소리래나? 어쨋든 그 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상당한 애절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고, 이 친구의 피리소리는 학교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던지라 별 수 없이 참아 넘기시던 그 여교수님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퇴장 명령을 내리게 된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습니다. 화창한 날씨의 어느 날 그날 따라 유난히 화사한 의상을 입고 강의실에 들어오신 여교수님. 그날도 빠짐없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이동근(이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가죽필'의 본명입니다)."
교수님께서 호명하자, 대답은 간데 없고 난데없이 들리는 피리소리가 있었습니다.
"뽀-오-오-옹-."
아! 이 녀석이 입으로 하는 대답을 '엉덩이'로 그 애절한 '가죽피리'소리로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장내는 터지는 폭소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 여교수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드디어 이 친구에게 강의실 퇴장 명령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의지가 워낙 완강하셨던지라 넉살 좋은 이 친구도 하는 수없이 머쓱한 얼굴로 주섬주섬 책을 챙기고는 뒷문으로 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장내가 정리되고 이제 막 수업이 시작되려 하자, 강의 실 앞문이 삐걱- 열리더니 큼지막한 엉덩이가 삐죽 보였습니다.
"뽀오-오-오-옹-."
그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의실의 모든 친구들은 웃다 못해 거의 졸도 상태에 빠져 버렸고, 그후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괘씸죄 + 교수모독죄 + 알파로 F학점. 전공필수과목이던지라, 그 뒷수습을 하기 위해 '가죽피리'의 노력은 거의 피눈물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현실로 돌려, 한 중견업체의 이사로 나타난 이 친구와 저는 제가 먼저 군대 입대하게 되면서 헤어진 후, 십수년을 만나지 못했고 사십을 목전에 둔 이 겨울,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된 것입니다.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의기투합한 우리는 인근 선술집을 찾았습니다. 외진 지역이라 택시는 좀처럼 보이질 않았고, 마침 바로 옆 정류장에 버스가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거 타고 가자!"
마치 학창시절처럼 우루루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퇴근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버스 안은 제법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몇 정류장을 지났을까? 가죽피리가 제게 말했습니다.
"자리 하나 마련해 줄까?"
이 녀석이 나이도 잊은 채 옛날의 장난끼가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버스 안을 휙 둘러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한 아가씨 옆으로 갔습니다. 잠시 뒤, 인상을 찌푸린 아가씨는 손으로 코를 막으며 애써 참고 있는데 뒷자석의 아주머니가 한 소리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좀 심한 거 아입니꺼?"
버스 안의 승객들이 낄낄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한 말로 물러설 가죽피리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일격인 듯,
"빠다다다-닥."
그런데 우째 이번엔 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버스안의 승객들은 못 참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햇고, 제법 야무지게 보이는 그 아가씨 역시 상대의 의도를 이미 간파한 듯 창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의 가죽피리가 상당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즈막이 제게 말했습니다.
"대갈아, 내리자!"
그만한 일로 의기소침할 친구는 결코 아닌 탓에 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왜?"
그러자 이 친구는 다시 야릇한 인상을 쓰며 제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쌌다!"
아!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우린 더 이상 얘기할 겨를도 없이 다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목욕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니도 인자 다 됐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기라."
우린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참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 같다."
젊다 못해 푸르기만 하던 청춘은 다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고 듬성듬성 솟아오르는 흰머리며, 자글자글 눈가의 주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이 시대의 중심을 짊어진 주역으로, 눌러오는 중압감만큼이나 처진 어깨를.... 세월을 거역할 수 없는 나약함에 공감이 온 듯 우리는 물 속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동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다 슬쩍 눈을 떠보니 평온한 얼굴로 잠시 명상에 잠겨 있던 가죽피리 녀석의 얼굴에 피시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턱까지 물에 담근 채 눈을 감고 잇는 얼굴 바로 앞 수면위로 뽀글뽀글 물방울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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