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처음에 지녔던 사랑으로
- 유진 수사님께
유진 수사님, 펭귄새를 연상케 하는 수도복을 입고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의 바람`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의 수사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새해 첫 글을 드립니다. 헨리 나웬의 <제네시 일기>를 통해 더욱 친숙했던 그곳을 방문하여 기도 시간에 숨도 크게 못 쉬고 앉아 있었던 저는 은은한 불빛 속에 흘러나오던 수사님들의 그 아름다운 노래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마치 깊고 큰 침묵의 섬으로 느껴져 일상적인 말을 하기도 조심스러웠으나 그러한 침묵속에서도 경직되지 않은 사랑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오니 함께 일하는 수녀님이 고운 단풍잎도 몇 개 끼워 넣어 새로 도배한 우리 방의 하얀 창호지문이 얼마나 은은한 기쁨을 주던지요, 바구니에 담겨있는 우편물들 속엔 수사님이 보내 주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영문판과 반가운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소설<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과 더블어 제가 최근에 가장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였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수도자의 단순성이란 것이 부정적 고행 연습에서 온다기보다 단호한 생의 긍정에서 온다고 생각된다`는 말과 함께 단순노동에 대한 묵상을 생생히 적어 보내신 수사님의 글은 늘 깊은 침묵 속에서 건져 올린 참된 말과 지혜로 빛납니다.
오늘은 `묵시록` 2, 3장의 다음 말씀을 되풀이해 읽으며 제 자신의 모습과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워 주어라. ...너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삶에 활기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시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껏 순수하고 뜨거웠던 `처음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타성에 빠져 안일하게 사는 데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는 예술인은 그가 처음으로 데뷔할 당시의 겸허하고 진지했던 노력을 새롭게 해야 퇴보하지 않으며, 수도자들은 수도원에 갓 들어올 때의 그 풋풋했던 설레임과 `열심히 잘살아 보겠다`던 선한 의지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새롭게 실천해 나가야만 제 모습을 갖춘 행복한 수도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올해는 좀더 겸허하고 참을성 있게 살고 싶다고 다짐했던 첫마음, 평범한 작은 일에 더욱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첫마음,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좋은 말도 헤프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첫마음을 되찾아 실천해야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해 새시간의 구슬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꿰어 귀하고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처음에 지녔던 사랑`이 퇴색치 않는 푸르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애쓰고 기도해야 겠습니다.
수사님의 그 고요하고 따뜻한 마음과 제네시수도원의 색유리처럼 아름다운 기도 속에 저를 자주 기억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마음 든든하답니다. 그곳의 유명한 빵 굽는 냄새처럼 소박하고 구수한 분위기를 지니셨던 객실의 친절한 죠지 수사님께도 문안드려 주시길 바랍니다. 떠나신 지 오래되므로 모국의 산천과 사람들이 종종 그리우실 수사님께 새로 나온 한국우표도 몇 장 동봉할께요. 주님의 은총 속에 부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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