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슬픔은 두고두고 우리네 일이네
- 주희를 추모하며
`수녀님, 전 주희 언니와 의자매를 맺은 동생이에요. ... 그토록 자유와 건강을 원하고 죽음보다 잊혀짐을 두려워하더니 언니는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가 버렸습니다. 아직 믿기지 않는 일이라 넋을 놓고 있는데 문집이 나왔다며 찾아가랍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뻐할 언니가 없는 문집이 기쁨보다 슬픔이 되어 다가옵니다. 이 편지지는 언니의 유품입니다.`
서주희 였음으로 되어 있고 `경대병원 B동 519호 사람들`이란 부제가 붙은 <우리들의 이야기Ⅱ.>라는 문집은 받던 그날도 나는 주희가 말린 장미꽃잎과 색종이로 접은 종이학을 가득 담아 보내 준 둥근 유리병을 바라보며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으나 병실에 갇혀 갈 수 없었던 푸른 바다를 창 밖으로 내다보며 이젠 한줌의 재가 되어 스러진 그의 푸른 넋을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 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주희야, 잘 가! 응?" 하면서... 지난 5월 대구 가스폭발 사고가 나기 바로 이틀 전, 나는 대구 교도소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일정이 촉박했지만 서둘러 병원에 들러 주희를 잠시 만나고 왔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그날 따라 주희는 힘들게 입을 열어 "많이 보고 싶었더랬어요"하며 기뻐했고, 그의 옆에 있던 그의 동생 은희 도 농아라서 말은 못했으나 무척이나 반가워 하며 주스를 따라 주고 주희의 앨범을 보여 주는 등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로부터 2주일 만인 5월 21일, 나는 주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직접 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대구에 사는 친지에게 나 대신 가줄 것을 부탁했더니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갔노라고 했다.
`3월에 띄우는 글` 이란 제목으로 이미 주희에 대한 글을 <꽃삽>에도 쓴 일이 있지만 내가 처음 주희를 알게 된 것은 1993년 2월, <샘터>의 기자를 통해서였다. "독자의 청에 의해 수녀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얼마 전 저희 회사로 한 젊은이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 지난해(1992년) <샘터> 인간승리상을 탈 서주희 양을 찾아갔는데 의사의 말로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고통 중에서 시종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어요. 그 얼굴을 보니 두 달밖에 못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퍼뜩 법정 스님이나 이해인 수녀님 같은 분이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 주신다면 몇달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희들은 그 얘길 듣고 수녀님께 부탁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편지를 보내 주십사고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주희 양은 8년째 누워 있으며 이젠 눈과 왼손만이 겨우 살아 움직이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꾸준히 글을 보며, 특히 수녀님의 글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따스한 격려의 글을 보내 주신다면 어떤 도움보다 큰 빛을 얻으리라 생각됩니다.
주희 양이 꼭 내 글을 받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안했지만 하도 간곡한 부탁이기에 난 이내 글을 보내기 시작했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방문하여 필담도 나누었다. 우리 수녀원의 예비 수녀들과도 몇 번 글을 주고받았던 주희는 자기가 여러 날 모아 둔 사탕이나 초콜릿을 고마움의 표시로 보내 오곤 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 앓아 누운 사람답지 않게 주희는 늘상 평온하고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도서실만큼이나 수많은 책들로 채워진 병실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성호라는 남학생과 그의 친구들, 그들이 커가면서 사귀는 여자친구들까지 인연이 닿아 친동생 세 명 외에도 동생들이 많아 행복하다던 주희는 차츰 귀가 안 들림에도 그 동생들이 병실에서 열어 주는 작은 음악회를 즐겼으며, 함께 문집을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주희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이번에 나온 문집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가장 흔한 말 중의 하나가 무엇을 가지고 싶으냐이다. 그러면 나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때가 많다.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 두고 가야 하는데 무엇이 그리 아쉬우냐고! 하지만 열심히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난 정말 미련한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떠나는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야 하는 건데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난 어느 분의 말처럼 행복한 사람이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지난 2년 간 내가 주희로부터 받은 십여 통의 편지 중 몇 구절을 다시 읽어 본다.
`요즘도 매달 <샘터>를 사 읽습니다. <샘터>는 제게 은인인 셈이니까 항상 반가워요. 수녀님이 쓰신 `꽃삽`과 `한국에서 발견한다`를 제일 먼저 읽습니다. 작은 사랑 얘기가 너무나 좋고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이 궁금하기 때문이지요. 잔잔하게 퍼지는 사랑의 향기를 지닌 수녀님의 글들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수녀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무척 부러워요. 이렇듯 못난 주희도 늘 기억해 주심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1년 사이에 수녀님 얼굴이 주름이 느신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어요. 제게 이것저것 챙겨 주시던 그 모습은 애틋한 정을 느끼게 해 기뻤습니다. ...제 주위엔 고맙고 좋은 사람이 많아서 큰 복이지만 문득문득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녀님, 저는 바람이 되고 싶어요.`
누워서 어렵게 쓴 편지, 보통 1주일이나 걸려서 쓴 주희의 긴 편지들을 다시 보니 그가 살아 있을 때 좀더 자주 글을 보내 주지 못했던 점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 주희는 좋은 데 갔겠지예, 그 불쌍한 것이..." 하며 말을 잇지 못하던 주희 어머니와 모처럼 긴 통화를 했던 오늘, 창 밖엔 가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면 마음이 포근하고 차분해진다던 주희, 그는 유난히 비를 좋아했었다. 평소에 그토록 좋아했다는 김창완의 노래말 속에서 한 줄기 비가 되어 떠난 주희의 애절한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슬픔은 오늘 이야기 아니고 두고두고 우리네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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