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헝겊 주머니
평소에 집 안에서도 늘 헝겊 주머니나 헝겊 가방을 즐겨 들고 다니는 나에게 며칠 전에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으신 팔순의 선배 수녀님 한 분이 작은 크기의 비단 주머니 한 개를 들고 오셔서 "이것 어때요? 여기에 무엇을 담든지 마음대로 하시고,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내게 다시 주세요."하셨다. 수녀님은 전에도 몇 번 색색의 자투리 비단 헝겊으로 앙징스런 복주머니들을 만들고 정성껏 복이라는 글자까지 새겨 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꽃이 귀한 계절에 수녀원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에게 작은 기념으로 가슴에 달아 드리기도 했었다. 검은 바탕에 국과.매화.단풍무늬가 그려져 있는 고운 비단주머니를 만들어 주신 수녀님의 정성도 고맙고, 주머니도 마음에 들어서 나는 어린 시절에 했듯이 그 주머니를 며칠간 베개 옆에 두고 잤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여러 가지 노리개와 한복을 입을 때 달아 주시던 예쁜 주머니. 그 외에도 쓰임새에 따라 솜씨를 발휘하신 신주머니, 책가방, 성당에 들고 다니던 미사보 주머니 등이 생각난다. 특히 고운 꽃이나 나비, 새들을 수놓고 튼튼한 안감을 대어 만들어 주시던 헝겊 책가방은 하나도 보관 못한 것이 후회될 만큼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상점에서 산 고급스런 책가방이나 주머니들을 들고 다니는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정겹고 소박한 헝겊 책가방을 그토록 좋아하고 열심히 들고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얼른 가방을 열어 숙제부터 해놓고는 다음날 수업에 가져갈 교과서와 공책을 정성껏 챙겨 넣고, 동무들이 좋아할 만한 색종이나 인형옷에 필요한 자투리 헝겊들을 골라 넣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책과 도시락, 온갖 잡동사니로 무거운 가방도 내겐 늘 희망과 기쁨이 가득한 보물주머니로 여겨졌다. 밖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동생에 비해 나는 늘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가방 정리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나의 별명은 `새침데기` `책벌레` 또는 `가방 싸는 아이`였다. 요즘도 가끔 헝겊 주머니나 가방이 눈에 띄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한참 서서 구경을 하거나 꼭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일단 사놓고 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퍽 오래 전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한번은 시장에 갔다가 햐얀 푸대자루 몇 개를 얻게 되어 함께 공부하던 언니 수녀님과 같이 그것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고 우리가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질들로 장식을 하며 즐거워하던 적도 있다. 푸른 작업복을 입고 외출할 때마다 그 가방을 들고 다니면 절로 파도소리가 나는 듯 낭만적으로 느껴지곤 했었다. 더 세련되고 우아한 가죽 가방을 구해 줄 테니 멀리 외출할 때만이라도 구질구질한 그 헝겊 가방은 좀 그만 들고 다니라고 옆에서 핀잔을 주거나 말려도 나는 굳이 헝겊 가방을 들고 다니길 좋아한다. 그래서 멀리 여행을 갈 때도 큰 헝겊 가방안에 여러 개의 작은 주머니들을 준비해 두었다가 기도서, 수첩과 볼펜, 세면도구, 속옷과 손수건 등을 분류해서 넣어 두면 찾기도 쉽고 무척 편리하다.
수도자의 신분으로 평생을 흰색, 검은색, 회색의 유니폼만 입다 보니 가방 속의 소지품 역시 화사한 빛깔과는 거리가 먼 우중충하고 검박한 것들뿐이지만 그 사이에서 잔잔한 꽃무늬나 별무늬의 작은 주머니들은 내게 늘 리본을 단 어여쁜 소녀처럼 다정한 웃음과 기쁨을 안겨 준다. 지난해 어느날은 불우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주머니가 세개 달린 갸름한 모양의 편지꽂이를 사다가 방에 걸어 두었는데, 나와 늘 가깝게 지내는 동료 수녀가 잠시 내 방에 들어왔다가 이걸 보더니 주머니 위에 살짝 얹혀 있는 리본 세 개를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모조리 가위로 떼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말리는데도 그는 리본이 없어야 더 깨끗하고 보기가 좋다고 했다.
나는 사실 연보라색 바탕에 진보라색 작은 리본을 달아 놓은 것이 예뻐 보여서 구입한 것인데-지금도 리본이 싹둑 잘려 밋밋한 모양이 되어 버린 그 편지꽂이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고, 별것도 아닌 일로 끝까지 내 뜻을 우기지 못하고 리본을 쓰레기통에 내버리게 한 것이 매우 아까운 생각이 든다. 요즘도 매일 침방이 있는 윗집에서 일터가 있는 아랫집으로 푸른색이나 회색 헝겊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나에게 어떤 이들은 "늘 무엇을 주섬주섬 담고 나누어 주는 그 요술주머니 또 들고 나가는군요"하고 놀리기도 한다. 나는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이 안엔 없는 것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분류해서 넣은 두는 자료실도 되고, 전해야 할 메모, 편지 그리고 사랑의 심부름거리로, 가끔은 작은 선물방이 되기도 하는 나의 기쁨 주머니를 흔들어 보인다.
헝겊 주머니나 헝겊 가방은 나의 오랜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만만해서 좋다. 때가 묻으면 언제라도 쉽게 빨아서 다시 쓸 수 있고, 매우 고급스런 재료로 만든 것일지라도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땐 크게 아까워하지 않고 선뜻 내어 줄 수 있어서 좋다. 또 조금은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물건을 가지고 사는 얼마쯤의 사치를 누리더라도 이로 인해 비난받을까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내 나름대로의 수수한 멋과 여유를 즐기게 해주어서 좋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나의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 부담 없이 편안하고 수수한 모습의 헝겊 주머니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혼자서 가만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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