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사십에 사표를 던지고 - 김광수
나는 나이 마흔에서야 철학공부를 하러 나섰다. 친구들도 부러워하던 외국 기관의 좋은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대책 없이 가족을 서울에 남겨 둔 채미국 유학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첫걸음부터 어려움에 부딪쳤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 대사관 영사는 내가 유학이 아니라 위장 이민을 가려고 한다면서 비자를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영사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 나라 대통령인 레이건은(당시에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쉰여섯 살에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남들 같으면 인생을 마무리 지어 갈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해 봤습니까?"
영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비자를 주겠습니다." (한신대 철학과 교수)
너무 예쁜 내 새끼들 - 조혜숙
안옥순(65세, 서울 종로구) 할머니는 올해로 5년째 종로구의 한 파출소에서 주방일을 맡고 계신다. 하루 세 번 출근해서 파출소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것이다. 주방이라고 해야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일하는 사람은 할머니 혼자뿐이다. 자식들은 그 연세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그냥 편하게 집에서 지내시라고 다들 말리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맘에 들고 다달이 월급을 타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가 이 파출소를 쉽게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지희, 지연이와의 추억 때문이다.
할머니가 이 두 아이들을 만난 것은 1990년 여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건넌방에서 세를 살던 젊은 애엄마가 하루만 애를 좀 봐달라면서 지희와 지연이를 데리고 왔다.
"그래, 놓구 가. 언제 올 거야?"
애엄마는 대답 대신 두 홉 정도 되는 쌀 봉지를 내밀었다.
"애들 하루 봐주는데 쌀은 무슨..."
할머니는 며칠 전 애아빠가 돈 벌겠다고 집을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어디 일자리라도 구하러 가는구나 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거였다. 우선은 급하고 겁나는 마음에 친구 집에 애들을 맡겨 놓고 애들 엄마를 찾으러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없어진 것 같다는 짐작뿐 헛일이었다.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이들을 차마 고아원에 갖다 맡길 수는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큰애인 지연이가 다섯 살, 작은애 지희는 이제 겨우 말 몇 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세 살바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안쓰러워서 먹이고 씻기고 밤이면 양팔에 꼭 끼고 잠을 잤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시작된 아이들과의 생활이었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금세 정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예쁜 짓을 하고 재롱을 떨었다. 함께 사는 두 아들은 항상 든든하지만 사내녀석들이다 보니 지희, 지연이를 데리고 있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당신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들이 예쁘고 살가웠다. 내 자식 기를 때도 이렇게 못해 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들 보기에 미안할 정도로. 할머니께서 파출소의 주방일을 시작하신 것은 아이들을 맡은 지 1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아직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고 월급을 받게 되면 지희, 지연이에게 이것저것 사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소장님이 어려웠고 다른 직원들도 낯설 때라 애들이 일하는 데 오지 못하게 단단히 이르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할머니와 붙어 살다가 자기들끼리 남겨진 아이들은 심심하다고 보통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애들이 심심해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일일이 들어와서 새로 밥을 해먹이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파출소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장님을 대장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고 뚱뚱하다고 호빵 아저씨, 빼빼하다고 멸치 아저씨 하는 식으로 파출소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탐탁치 않게 여겼던 파츨소 직원들도 모두 너나없이 아이들을 귀여워했고 지희와 지연이도 제 또래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는 파출소에서 지낸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해 했다.
지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다들 다들 제 부모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니까 취학통지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망설였던 자신이 죄스러워서 지연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날은 결국 집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울었더니 지연이도 따라 울고 영문 모르게 보고 있던 지희마저 울고... 아이들은 가끔씩 제 엄마 소식을 물어 할머니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특별하게 말썽부리는 일 없이 잘 자라 주었다. 가만히 눈여겨보면 큰애는 속이 깊고 착실했고 둘째 아이는 사근사근한 데가 있고 아주 명랑했다. 지연이는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파출소 직원들은 조금씩 돈을 거두어 생활비를 보태 주기도했고, 아이들의 사정을 아는 담임 선생님이나 수녀님들, 심,지어 동네 속셈 학원 선생님까지 많은 분들이 자매를 보살펴 주었다.
할머니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둘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명절이면 만두를 넘치게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눠 준다고 지희, 지연이가 만두 할머니라고 부른 재동 친구도 늘 얘기하곤 했다. 비록 부모품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컸으니 이 애들은 곧고 바르게 자랄 거라고. 1994년 8월, 지연이가 3학년이 되었고, 처음 왔을 때는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던 지희도 초등학생이 된 해였다.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 방학이었는데 난데없이 아이들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얼마 전에 귀국을 했으며 아이들을 데려가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짧고 냉정한 통보였다. 애들 부모뿐 아니라 그 누구로부터도 치하받자고 어린 것들을 거두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잠깐 동안 서운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 이것들과 헤어지는구나 싶으니 왈칵 눈물부터 쏟아졌다.
이틀 뒤 아이들은 며칠 있다 따라가겠다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고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5년 동안 아무 연락도, 왕래도 없었고 지연이는 아빠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피라는 게 저렇게 끌리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순순히 제 아버지를 따라갔다. 늘 적적하던 집에 해바라기 씨같이 화사한 생기를 뿌려 주었던 지희와 지연이. 그애들이 없는 집 안이 너무 갑갑해서 가슴을 탁탁 치면서 늦도록 집 밖을 서성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것 보라고, 남의 자식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매번 친손녀들처럼 예뻐했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울었다.
아빠를 따라가고 나서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 울먹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말할 수 없이 속이 타지만 애들 장래를 생각하면 늙은 나보다야 제 아비가, 또 함께 살게 된 새 가족들이 아무래도 낫지 싶어 아이들을 살살 달래곤 했다. 그날도 마침 방학이라 며칠 놀다 가면 좋으련만 겨우 하루만이라는 허락을 받고 온다고 했다. 드디어 두 아이들이 숨넘어갈 듯이 뛰어들어와 할머니에게 안겼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세상에 예쁜 내 새끼들..." (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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