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비밀의 얼굴 - 최윤
나는 몇 년 전, 명동 성당에서 열린 프랑스 성서학자 강연의 통역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그 기회로 수녀님과 몇 번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강연날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그만 시간을 한 시간이나 착각해, 내가 막 강연장을 떠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미 오백여 명의 사람들과 강연자가 기다리고 있고 수녀님은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는 것이다. 미안함과 당혹감에 나는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달려갔으나 결국 꼬박 한 시간이나 늦게 그 장소에 도착했다. 당혹감으로 말하자면 정작 강연의 뒷절차를 책임 맡은 수녀님의 입장이 더할 터였다. 그러나 허겁지겁 내가 도착했을 때, 강독과 찬송가로 차분히 한 시간을 메우고 있던 수녀님은 오히려 내게 미소를 지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딱하셔라. 택시 안에서 내내 얼마나 조바심이 나셨겠어요. 잠시라도 숨을 돌리세요."
"빨리 시작하시죠"도 아니고 화가 난 얼굴은 더욱 아니어서, 내 마음을 꼭 집어 위로하는 수녀님의 여유와 이해심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이 작은 사건으로, 기독교적인 사랑, 용서라는 말의 비밀을 언뜻 본 기분이었다.
(소설가, 서강대 불문과 교수)
잊지 못할 두 가지 빚 - 윤석금
나에게는 두 가지 빚이 있다. 어느 날 고향 친구가 회사로 놀러 왔다. 어린 시절에 만나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차를 한 잔 나누며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던 중 자연스레 사업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말했다.
"사업은 잘되는데 자,금이 부족해."
그러자 그 친구가 물었다.
"얼마나 돈이 필요해?"
친구간에 나누는 대화라서 나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한 2억 정도 필요하지."
별뜻 없이 지나가는 말로 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친구가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갖다 써."
너무나 서슴없이 돈을 갖다 쓰라는 친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잘 안돼 재차 물었다.
"나는 담보로 잡힐 만한 것도 없는 사람인데 자네가 어떻게 큰 돈을 빌려 주겠어?"
그랬더니 그 친구는 역시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어음이나 끊어 주고 빌려 가."
나는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너무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고향 친구라지만 별 교류도 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거액을 빌려 주겠다고 선뜻 나서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작은 규모의 신용금고 회사의 이사였다. 사장도 아닌 이사가 선뜻 2억 원씩이나 빌려 주겠다니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그 친구는 자기의 말대로 그 다음날 1억 원을 빌려 주었고, 그 뒤 여러 번에 걸쳐 나는 5억 원을 더 빌려쓰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산골 중에서도 산골에서 태어났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성공해야지. 그러니 네가 한 번 성공해 보렴. 나는 너를 믿어. 네가 성공한다면 그게 나의 기쁨이야."
또 한 가지 빚은, 우리 회사의 대표적 상품인 (어린이 마을)을 개발하면서 우리 직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이다. (어린이 마을)은 개발 당시 우리 문화, 우리 자연을 담아서 아동들에게 읽힘으로써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 것을 회복시킨다는 편집 이념을 고집스럽게 지켜서 개발한 상품이었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이나 완성한 그림이 취지에 맞지 않아 폐기하기가 일쑤였다. 결국 당초 에상했던 개발비를 무려 2배나 초과하게 되었고, 우리 회사의 재정 상태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 것의 회복이라는 기치와 함께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든 책이기 때문에 상업성은 별로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았다. 하지만 간부들의 만류에도 나는 본책 열두 권, 부속도서 스물네 권 중 겨우 1차로 완성한 본책 세 권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그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판매가 되지 않았다. 그랬으니 만류하던 판매사원들과 간부들의 실의와 불만도 대단했다. 설상가상으로 판매의 부진에다 재정의 어려움, 직원들의 불안이 겹쳐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판매인들의 사기를 돋구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판매 매니저들을 모아 놓고 신념을 불어넣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허리가 아파서 돈을 다 못 주울 테니, 열심히 해보시오."
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나는 힘을 주어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왔다. 몇몇 매니저들이 정말 그럴까 하며 반신반의하더니 차츰 긍정적인 반응으로 호응을 해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역설했다.
"고객에게 한 시간씩, 개발 취지와 우리 것이 필요성을 설명한 후 책을 권하시오."
그러자 판매에 변화가 일더니 (어린이 마을)은 폭발적으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최악의 위기에서 일대 전환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 직원들이 나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했을지도 모른다.
(웅진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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