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환한 웃음 - 강영구
엊그제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30대 남자가 절을 하며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어 머뭇거리자 그가 "Y병원 간호사였지요?" 하고 물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전 그 병원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했지요. 그때 간호사 아가씨가 제게 책도 빌려 주시고 또 퇴원할 땐 작은 성경책까지 주셨었지요." 그제야 나는 그를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정말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할 때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그는 거의 절망적으로 울부짖었었다. 한쪽 다리나 한쪽 팔이 생명보다 중하지는 못하지만, 한창 젊은 사람에겐 생명 못지않은 커다란 상실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목발을 짚고 퇴원할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었다. 그런 그가 어느새 30대의 나이로 또다시 내게 인사를 할 때는 깊었던 마음의 상처까지도 다 아문 듯 환희 웃고 있었다. 결혼을 해 아들도 있고 작은 가게를 한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간호사)
어느 부부 - 강민수
어느 외딴 섬에서 군복무를 하던 때의 일이다.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파도가 심하던 어느 날 밤, 나는 근무 시간이 되어 동료와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해안을 한 바퀴 돌고 선창가로 가려는데 그쪽에 빨간 불빛이 보였다. 이렇게 춤고 바람 부는 날 마을과 떨어진 곳에 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해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 젊은 부인이 잠든 아기를 업은 채 추위를 이기려 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사연을 들어 보니 어제 아침에 남편이 아랫섬 형님댁으로 어머님 제사를 모시러 갔다는 것이다. 바람이 심해 배를 띄우기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해도 꼭 가야만 한다며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추위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그녀의 눈은 줄곧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부인을 위로하며 한 시간쯤을 보냈을까? 어둠 속에서 통통거리는 뱃소리가 나니까, 부인은 부리나케 그쪽으로 달려갔다. 배에는 바닷물에 흠뻑 젖은 남편이 타고 있었다. 이윽고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한참 동안 서로를 바로보던 젊은 부부는 아무 말없이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의 간청으로 우리도 함께 그들의 집을 향해 걸었다. 얼마 후 우리는 조그만 오두막집에 이르렀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이 하나가 잠들어 있고 한쪽에는 밥상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방에 들어와 몸을 녹이고 가라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그 집을 나왔다. 비록 가난하지만 내게는 그들이 참으로 행복한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만에 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을 느낄 수 있던 날이었다. (광주시 거주)
동정은 싫어요 - 이수영
전철 안은 밖의 날씨와는 달리 훈훈했고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내 맞은편 자리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한 뭉치의 신문을 옆구리에 꼭 끼고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발에는 추운 겨울인데도 양말이 진겨져 있지 않았다. 나는 저 아이가 깨어나면 몇 장의 신문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의 잠자는 모습을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때 한 중년신사가 그 아이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얘, 조금 있으면 전철의 종점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리고 그 신문은 내가 다 살 테니 나에게 팔아라."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서 중년신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무엇하러 이 신문을 다 사려고 해요. 한 장씩만 사세요."
주위 사람들은 아이의 대견스런 말에 미소를 지으며 승객 모두 한 장씩 신문을 샀다.
(경기도 남양주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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