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3. 함께 사는 삶
약속 - 김묘선
대학 2학년 때의 가을이었다. 체전이 있어 매스 게임 연습을 할 때였는데 손에는 반경 7센티미터 정도 되는 공을 갖고 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의 표면에는 노란 칠을 해야 된다기에 페인트 상점에 갔더니 큰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괜히 귀찮기만 하다면서 거절을 했다. 몇 군데 퇴짜를 맞고 어느 조그만 페인트 상점엘 가서는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맡겨 두고 나왔다. 공을 찾아 가기로 한 날 아침. 등교길에 들렀더니 아직 칠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물건이라 깜박 잊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장 칭을 한다 해도 마르지 않아 가져갈 수도 없고 걱정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으니 몇 시에 사용할 거냐고 묻는다. 오후 세 시라고 대답했더니 걱정 말고 학교에 가면 아주머니를 시켜 그 시간까지 갖다 주겠다고 학번과 이름을 적어 놓고 가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서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에 학번과 이름을 적어 놓고 학교로 갔다.
매스 게임 연습을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오지 않자 체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상점과 학교와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매스 게임이 막 시작될 무렵인 5분 전 세 시에 그 아주머니가 노란 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난 의외의 일이고 또 너무 고마워서 펄쩍펄쩍 뛰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 아주머니는 나와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온 것이다. 공을 페인트 칠한 값과 택시 요금과는 약 네 배의 차이가 있었는데 택시 요금이 더 많은 것임을 그 아주머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신평초등학교 교사)
거룩한 3천 원 - 이장규
한 환자가 업힌 채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심한 호흡 곤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즉시 엑스선 사진을 찍게 하고 필름을 들여다보았다. 말기 폐암이었다. 그를 데리고 온 검둥이같이 새까맣게 탄 남자들은 어떻게든 손을 좀 써달라고 떼를 썼다. 그들은 광부들이었다. 어차피 최후 수단으로 코발트를 쓰는 도리밖에 없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며칠이 지나자 환자의 상태는 다소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호흡이 수월해졌고 혈담이 줄고 통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환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광부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보였다. 그들이 병구완을 하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순환 장애가 온 것이고, 그날 밤 환자는 죽었다. 조용한 임종이었다. 며칠 후 광부들이 다시 찾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친구가 유언을 했어요. 저희들 복 얼마라도 좋으니 돈을 마련해서 암과 싸우는 선생님들에게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 약소해서 부끄럽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노동자입니다. 선생님, 사양 마시고 제발 받아 주십시오. 가엾은 친구를 대신해서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금일봉'을 내놓고 달아나다시피 나가 버렸다. 3천 원이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끼니를 거를 것이라고 직감했다.
1969년 가을 신문회관에서 한 창립총회가 조촐하게 열리고 있었다. 사단법인 (한국암연구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힘에 겨웠던 내 노력의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할 일이 더 걱정이었다. 우선 기금을 모으는 것. 앞서 일본의 세계적인 병리학자 '요시다'교수는 암 연구기금으로 한국에서 우선 3만 불 정도 확보하면 일본측에서도 3만 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동분서주 했다. 국회의원도 만나 보고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신문사 사장에게 모금을 신문사 사업으로 해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눈보라치는 착 밖을 내다보면서 신문사 사장은 딱하다는 듯 말했다.
"이 엄동설한에 누가 돈 한 푼 내주겠소."
크리스마스 실을 본떠 모금에 관한 입법 조치를 관계 당국에 조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 부담이 큰데..."
차관은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어느 재벌을 찾아갔을 때는 비서한테 망신을 당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라 의사이자 교수고 차관보급의 공무원이었다. 정말 거지가 되어 이런 꼴을 당했다면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3년에 걸친 나의 고생은 마침내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암연구원)은 부실 단체라는 낙인이 찍혀 이제 정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허탈과 비애와 분노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나는 3천 원을 받은 것이다. 그토록 애타게 구하던 처음이자 마지막 돈이었다. 그 우락부락하게 생긴 광부들 마음속에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운 마음이 움텄을 것인가? 그리고 이 소중한 돈을 어떻게 써야 그들의 뜻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며칠을 두고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것은 인생을 사색하는 것이었다.
(암학회장 귀하.
여기 무명의 한 광부가 유언으로 남긴, 그리고 그 동료들이 끼니를 굶어 모은 성금 3천 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암 연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희구하면서 보내 드립니다. 기증인은 얼마 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원자력위원회 위원)
새 시계와 바꾼 것 - 이관옥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면서 헌옷도 곧잘 고쳐 입고 낡은 시계를 갖고 다녀도 조금도 불평이 없던 딸이 두어 달 후면 여고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제 졸업 선물은 뭘 주실 거에요?"
내가 말했다.
"글쎄다. 시계가 너무 낡았으니 새것으로 하나 사줄까? 어떤 모이 좋으니?"
그러자 뜻밖에도 딸아이가 말했다.
"제가 한 번 직접 사보고 싶어요. 돈으로 주시겠어요?"
돈으로 달라는 데는 좀 의아하긴 했지만 원래 딸아이 일로 걱정해 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더 캐묻지 않고 당장 시계값을 주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딸은 시계르 사 오지 않았고, 1주일이 지났는데도 시계에 대해서 한 마디의 이야기조차 드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담임 선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K라는 학생의 밀렸던 수업료를 보내 주셔서 그 학생이 졸업 시험에 참가하게 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K라는 학생은 딸의 가까운 친구로 퍽 얌전한 학생인데, 홀어머니 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사정을 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짐짓 물었다.
"시계는 사 왔니?"
딸아이가 대답했다.
"차차 살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애 방으로 따라 들어가서 선생님이 고맙다는 전화를 주신 얘기를 했다.
"엄마, 죄송해요. 사실 전 새 시계가 꼭 필요치 않아요. 거짓말 한 것 용서하세요. 그동안 물어 보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딸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아니다. 울지 마라. 새 시계를 포기한 것 때문에 한 친구가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과연 우리 딸은 장하다."
나는 어린 딸의 그 순진한 우정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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