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너의 고통이 너의 자산이다 - 이창동
충분히 어두워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별을 볼 수 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참 가난하고 초라한 젊은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 진학도 못한상태였고 가정의 불행과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기름에 빠진 날벌레처럼 출구가 없는 현실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김원도라는 시를 쓰는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고등학교 시절의 내 글 솜씨를 눈여겨봤다며 문학 동인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학이라는 꿈을 꾸기엔 그때 나를 짓누르던 삶의 고통이 너무도 무거웠던 것이다. 나의 절망적인 하소연을 한참 듣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의 생활의 고통이 너의 자산이야."
선배의 그 말은 두터운 얼음장을 깨는 도끼날처럼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현실의 고통은 치욕이 아니라 나의 자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껴안고, 바로 그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덕분에 나는 그와 함께 (주변문학동인)이라는 작은 문학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고 소설 습작품을 쓰며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문학을 통해서 삶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 영화감독)
작품 속 인물이 손을 내밀 때까지 - 손숙
"배우가 그 인물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 어느 날 작품 속의 인물이 손을 내민다."
언젠가 연습이 만족스럽게 되지 않아 울고 있는 내게 이해랑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사실 당시엔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작품 속의 인물은 까마득하게 보이고 나는 그 인물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작품 속의 인물이 나를 거부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다음날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나를 닦달하기 시작하셨다. 대사 한 마디를 수십 번 연습했다. 나중에는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자신이 부끄럽고 비참해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내 울음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다 울었으면 다시 한 번 해볼까?"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대본을 펼쳤다.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작품 속의 인물만 보기 위해서 혼신은 힘을 모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잠시 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핑 하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때의 체험은 그후로 내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고 있다.
(연극배우)
후배를 먼저 - 강익중
3년 전 여름 기회가 닿아 미국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선생님과 함께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백남준 선생님과의 공동 전시는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지만, 혹시나 그분에게 누를 끼치면 어쩌지 하는 압박감으로 미술관 직원들과 며칠째 작품의 배치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 미술관 직원들과 나는,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이 당연히 미술관 전시장의 주전시실에 놓여져야 한다는 데 거의 합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 마지막날 오전, 당시 독일 뒤셀도르프에 계셨던 백남준 선생님께서 미술관으로 팩스를 보내 주셨다. 단 두 줄의 문장이 담긴 간단한 내용이었다. (나는 괜찮다. 강익중 작품을 좋은 자리는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건네받은 우리들은 한편으로 당황하기도 했지만 모두 한 위대한 작가의 포용과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쨌든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과 내 작품은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심사숙고를 거쳐 전시장에 균형 있게 배치되었다. 자기를 낮추며 어린 나에게 기회를 주시려던 그분의 깊은 마음은 앞으로 나의 작품 활동 기간중에 나의 후배들에게도 똑같이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으로 언제나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서양화가,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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