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울음으로 전한 안부 - 패티 김
"저는 아버지가 두 분 계십니다."
이렇게말하면 "그래요?"라거나 "그렇군"하면서, 패티네 집안도 복잡하구나 생각해 버리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에게 남편이 두 사람 있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제1의 아버지라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은인을 나는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현재 AFKN 편성국장으로 계신 에드 매스터즈 씨는 바로 내가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분이다. 1960년 초 무명 가수인 나는 조선 호텔 전속으로 밤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매스터즈 씨는 당시 VUNC의 영어 회화를 맡고 있었다. 조선 호텔에 왔다가 우연히 내 노래를 들은 매스터즈 씨는 나를 일본에 보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부렵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외국에 보내 준다는 말을 들어 왔었고, 그런 말들이 헛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스터즈 씨의 그 제안도 귀 밖으로 흘려 버렸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내 앞에 여권을 내밀었다. 나는 우선 놀랐고, 그의 진실성에 감격했다. 여기에 밝히고 싶지 않지만 그는 하반신 마비로 목발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 다녔는데, 비로소 나는그의 신체적불행에 짙은 동정이 가기 시작했다. 그 몸으로 손수 여권 수속을 끝내다니! 그래서 나는 1960년 말에 최초의 동경 공연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 나는 동남아로,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스터즈 씨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의 나의 동경 공연은 해방 후 16년 만에 일본이 한국 연예인을 정식 초청한 첫 케이스였다. 스무 살의 풋내기였던 나는 외국이라고는 처음 가보는 일본에서 여간 고생스럽지가 않았다.
일본말은 전혀 못하고 영어도 형편없었으므로 언어 장벽이 주는 고통은 정말 큰 것이었다. 동경에 도착하는 날부터 긴장과 흥분으로 너무 골이 아팠다. 호텔에 들어갔으나 무섭기만 하고, 아스피린을 구해야 할 텐데 사람 부르는 법도 모르고...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울었다. 그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매스터즈 씨로부터의 전화였다. 잘갔느냐, 거기 형편은 어떠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는 머나먼 곳에서 전파를 타고 온 것인데도 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오직 울음으로써만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매스터즈 씨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재일 한국 유학생에게 연락, 그 학생을 나한테 붙여 주었다. 그의 세심한 정성과 배려는 나으 일본 공연을 한결 쉽게 해주었고, 또 그를 통해 재일 교포들을 사귀어 김치도 얻어먹고 불고기 파티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내 공연에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 그는 언제나 내가 부른 노래 (틸 (사랑의 맹세))을 흥얼거리며 아버지 같은 눈길로 나를 격려한다. (가수)
잊혀지지 않는 얼굴 - 최정희
6,25 때의 일이다. 우리 집은 동숭동에 있었고, 지금은 이미 납북되어 버린 우리집 남편이 그때 다른 곳에 피신해 있어 집 안에는 어머니와 아이들과 나뿐이었다. 낙산 밑 우리 동네에는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일제 폭격이 시작되었다. 아군기들이 날아와서 산이 다 패이도록 폭탄을 퍼부어댔다. 그 공포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들과 내가 결국오늘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나는 늘 절박하게 생각했었다. 전투기가 날아오면 훈련받은 대로 아이들은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벽에 엎드리게 하고 어머니와 나도 그렇게 했다. 어느 날 한 차례의 폭격이 끝나고 비행기가 가 버렸다. 공습 해제의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곧 앞집으로 가 보았다. 그 집 사람들도 공포로 해서 파랗게 질린 채 저 아래쪽 학자네 집 지하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우리들 집은 너무 산에 가까워 위험한 데다가 지하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학자네 집으로 가 보았다. 우리 집도 옮길 만한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자네뿐만 아니라 지하실이 있는 집이면 모두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때 공습 경보 사이렌이 또 울렸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골목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한데 나 혼자 언덕을 바삐 올라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집 대문께에 전투기 한 대가 아주 낮게 떠 있었다. 어찌나 가까이 떠 있는지 조종석에 앉은 외국인 병사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조종사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집 가까이 이르러 나는 정신없이 소리를 쳤다. 모두들 굴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엔 산을 파고 만든, 김칫독 같은 걸 넣어 둘 만한 작은 굴이 있었다. 그곳응ㄴ 물이 고일 정도로 습기 찬 곳으로 평소 김칫독을 넣어 두는 일도 하지 않던 곳이었다. 내가 허둥지둥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어머니와 아이들을 굴 속으로 몰아 넣고 굴 입구의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외국인 조종사는 폭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공중에 떠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식구 모두를 피난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폭격을 퍼부었다. 쌩 하고 큰 파편 한 덩어리가 날아가 우리 집 사랑방 문에 가서 꽂혔다. "하느님, 1분만 늦었어도..." 어머니 입에서 낮은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파편처럼 내 가슴속을 휙 달려간 것은 아까 낮게 공중에 떠서 아래를 굽어 보던 그 외국인 병사의 선한 마음씨였다.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 허둥대는 한 가족을 구해 준 것이다. 그날 폭격에 놀란 인민군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저녁 무렵 폭격이 끝난 후 질항아리쪽 같은 파편을 만졌더니 오래도록 싸한 쇳내와 화약내가 손에서 가시지 않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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