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낙서로 남긴 좌우명
시카고의 맥비키 극장으로부터 수많은 구경꾼들이 줄을 이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최대의 마술사인 알렉산더 허만의 공연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신문팔이 소년 하나가 덜덜 떨며 돌아가는 군중들에게 신문을 팔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코트도 입지 못하고 돌아갈 집도 없는 소년은 결국 극장 뒤의 골목길에서 팔다 남은 신문을 베고 누웠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추위로 인한 떨림도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러누운 채로 '그래 나도 마술사가 되어야지. 이제 두고봐라! 마술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면 이 극장에서 본때를 보여 주어야지.' 그는 이를 악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로부터 20 년, 그는 정확히 그 다짐을 실현했습니다. 출연을 끝내고 극장 뒤의 골목길에 가보니 벽에 자기 이름의 머릿글자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20 년 전 자신이 새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40 년간 세계를 순회하며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연출한 하워드 더스틴의 생애는 그가 무대 위에서 전개하는 쇼만큼이나 아찔하고 환상적이었습니다.
더스틴은 소년 시절에 부친에게 지독하게 매를 맞고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는데, 그 후 5 년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떠돌이 부랑자 신세가 되어 무임승차, 걸식, 도둑질을 하면서 1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경마의 기수가 되어, 17세 때에는 뉴욕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무일푼에 기댈 언덕도 없는 그는 어느 날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당신 속에도 정확히 한 사람의 인간이 숨어 있는 겁니다."
난생 처음 받은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는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부랑자 출신의 그가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즉흥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의사 겸 전도사가 되기 위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올버니에서 갈아탈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시간이 남아 극장에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알렉산더 허만이 요술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탈 기차는 생각하지도 않고 허만이 묵는 호텔로 찾아가 이웃방에 투숙하고 허만을 만나려고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열쇠구멍에 귀를 대보거나 복도를 서성거리기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허만이 정거장으로 가자 그곳까지 쫓아가 결국 허만이 타고 가는 기차까지 따라 타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허만과 같이 공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더스턴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유료관객 6백만명, 수입 2백만 달러라는 경이의 기록을 세우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더스틴의 성공 비결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자신의 개성을 관중들에게 팔아 넘기는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관중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관객들이 아주 좋아요.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제일 좋지요. 근사한 인생이죠. 참 즐거워요!"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 누구도 기쁘게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의 교향곡
제정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과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 차이코프스키는 화려한 박수갈채 속에서도 고독과 상상에 젖어 모스크바로 돌아가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발표한 후 쓸쓸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1840 년생인 차이코프스키가 젊음을 맞이한 때는 제정러시아의 격동기였습니다. 광산기사의 아들로 자유롭게 자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조국의 암담한 현실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가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는 '안단테 칸타빌라'를 비롯해서 '비창'에 깔린 깊은 애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서만이 이해와 공감이 가능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택하기가 어렵던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를 마치고 장래가 보장된 법무부의 관리가 되었지만 여기서 그는 생리적인 구토감을 갖게 하는 사회악만을 보게 됩니다. 아들의 우울을 간파한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가의 길을 종용합니다. 안톤 루빈스타인이 경영하는 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와 작곡에 개미처럼 부지런했던 결과 25세 때 작곡 부분에서 은상을 획득하고 영예로운 졸업을 하였습니다.
루빈스타인의 동생인 리콜라이가 모스크바에서 경영하는 음악원에 작곡과 교수로 자리를 잡은 그는 터질 듯한 창작의욕을 불태우면서 부임 이듬해인 1866 년에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을 발표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그린 이 한 편은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차이코프스키를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어쩌면 미스테리와도 같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나데즈다 폰 메크'입니다. 사유철도경영을 하던 남편이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죽자 사교계와 발을 끊고 그림수집과 독서와 음악에 묻혀 조용히 살고 있던 그녀에게 차이코프스키의 제자가 선생의 딱한 사정을 얘기하자 즉시 소품 시작을 의뢰 엄청난 작곡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36세였던 차이크프스키와 미망인은 편지로만 왕래하였는데 교향곡 제4번은 '우리 두 사람의 교향곡'이라고 차이코프스키가 그녀에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 곡은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밝고 찬란하다는 평을 듣는 곡입니다. 그러다가 차이코프스키는 성격 차이로 마침내 결혼의 파탄을 맞게 되는데, 이때에도 폰 메크 부인은 구원의 손길로 매년 6,000루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생명과 예술을 구해 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조의 호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그녀는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13 년이 지난 후, 연금을 중단하겠다는 편지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날아들었습니다. 그는 편지라도 계속하기를 간청했지만 회답도 없이 부인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고독과 상심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 화려함과 박수갈채가 있었지만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시대의 아픔, 인류의 삶과 죽음, 투쟁과 종말을 그렸다는 마지막 교향곡 제6번 '비창'을 발표, 초연을 지휘한 후 열흘만에 콜레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무덤에 폰 메크 부인이 찾아와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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