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정한 스포츠 정신
1913 년 2월의 맑게 개인 오후, 영국 국민들은 뜻밖의 사건에 놀라 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극 대륙을 두 번째로 밟은 스코트 대위가 로스빙벽에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숨을 거둔 것입니다. 스코트 대위는 탐험선 테라 노바('새로운 대지'라는 의미)호를 타고 남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극권에 들어서자마자 재난이 시작됐습니다. 뱃전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어닥쳐 짐을 모두 바다에 내던졌으나 배 밑바닥으로 물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엔진은 고장을 일으켰고, 펌프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재난의 제1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말을 몇 마리 데리고 갔으나 갈라진 얼음장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여서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개들도 미친 듯이 날뛰며 빙하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려 결국 스코트 대위와 대원 네 명이 천 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남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해발 9천 피트의 희박한 공기에 호흡곤란을 느끼면서 생물이라고는 살지 않는 극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4일째가 돼서야 비로소 남극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개의 막대기 끝에 갈가리 찢겨진 헝겊 한 장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국기다.! 노르웨이 국기다.!"
그들의 실망과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5주일 전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한 발 먼저 남극점을 밟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까. 일행은 크게 낙심한 끝에 귀로에 올랐습니다. 정면으로 불어닥치는 찬바람으로 눈과 코는 얼어붙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매달렸습니다. 맨 처음 하사관인 에번스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죽어갔습니다. 다음에는 오츠 대위가 병이 났습니다. 대위는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자, 자신이 일행의 발을 묶고 있음을 깨닫고 어느날 밤 무서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목숨을 버려 동료를 살리자'는 생각으로 그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스코트 대위와 나머지 두 명은 옮겨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인간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코도 손가락도 다리도 꽁꽁 얼어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했습니다. 드디어 1912 년 2월 19일 남극을 뒤로한 지 50일만에 일행은 최후의 텐트를 쳤습니다. 한 사람 앞에 두 컵 정도의 연료와 이틀 분의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됐다. 이젠 살았다"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식량을 묻어둔 곳까지는 18km밖에 남지 않아 단걸음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돌연 얼어붙은 대지 끝에서 맹렬한 눈보라가 몰려왔습니다. 스코트 대위 일행은 11일 동안 텐트 속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식량은 떨어진 지 이미 오래였고 이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맹렬히 몰아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분으로 잠들면서 최후를 맞기 위한 아편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아편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정면으로 죽음과 대결해 보자! 영국인 특유의 스포츠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스코트 대위는 죽기 직전 유명한 작가인 제임스 벨리 경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그때의 극심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식량은 이제 동이 났고, 죽음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안심해 주십시오, 이 텐트 안에서는 힘찬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8개월 뒤, 반짝거리는 남극의 빙원 위를 태양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을 때 스코트 일행 세 명의 동사체가 발견됐습니다. 스키 두 개를 교차시켜 급히 만든 십자가 아래 그들은 조용히 묻혔습니다.
동궁의 진심
"흐흐흐흐......"
사람만 보면, 아니 혼자 방안에 있을 때도 동궁 양녕은 미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습니다. 태종 임금의 맏아들로서, 앞으로 임금 자리에 오를 왕세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습니다. 양녕은 그럴수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대궐 담을 뛰어넘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오가는 사람을 때려눕히기 일쑤였습니다. 무술년, 이젠 양녕의 나이도 25세. 열한 살에 왕세자로 책봉된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그중 7, 8 년의 세월을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 지낸 것입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양녕은 부왕 태종과 어머니 민비가 소곤거리면서 하는 이야기를 문밖에서 들었습니다.
"참 아쉬운 일이오.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누가 아니랍니까. 충녕이 맏이였어야 할 것인데."
이 이야기는 양녕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 이래가 찾아오자,
"옳지, 지금부터다!"
하고 일부러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멍멍멍......"
양녕은 잇달아 짖어대며, 물어뜯을 듯이 이래의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는 듯도 하였지만 이래는 양녕의 이러한 행동을 태종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양녕이 미친 짓을 하자 둘째 효녕은 은근히 자기에게 세자 책봉의 기회가 올 줄 알고 눈가림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녕이 효녕의 방을 찾아가 그를 나무라며 자신이 미친짓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충녕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이에 효녕도 크게 감동을 받아 깨닫고 그 날로 머리를 깎고 염불을 외우는 불제자가 되어 궁을 떠납니다. 결국 황희 판서와 개국공신 이직의 간언도 뿌리치고 태종이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양녕대군은 편안한 마음으로 광주로 귀양을 떠나고, 황희와 이직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1418 년, 제4대 임금에 오른 세종은 형님들의 마음을 헤아려 지성껏 모시며 가까이 두고자 하였으나 양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류객들과 사귀고, 아우 세종을 돕기 위해 암행어사의 자격으로 민정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시, 글씨, 활과 무술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양녕이었지만 순리를 알았기에 왕의 자리와 호화로운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평민과 더불어 시원한 삶을 살다간 그의 인생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지혜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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