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일흔에 연 신기료 가게 - 안만득
"아버님께서 여태껏 지으신 집들을 모아 놓으면 족히 서울의 한동네는 될 겁니다."
내 나이 칠십 고개를 넘기던 날 큰아이가 한 말이다. 사실 나는 열일곱엔가 우리 열두 남매가 겨우 여남은 마지기가 될까말까 한 논밭을 붙들고 아둥대던 고향을 뛰쳐나와 평양에서 제일가는 도목수 아래서 집 짓기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백 년이 흐르도록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를 다듬고,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올리는 기쁨으로 보냈다. 그쯤 이르자 발이 부르트도록 넘나들던 서울의 아현동 고개며, 중림동, 영등포 일대를 거닐다 보면 내 손떼가 묻은 건물들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때마다 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그러나 작업의 대부분을 난장에서 해온 탓인지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가끔씩 어깨가 결리기도 하고, 연장 바구니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나를 지켜보면서 아이들은 은근히 그 동안의 내 노고를 치켜세우는 한편, 이제는 그만 집 안에 계셔도 좋지 않느냐고 내 의중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난리통에 개성에서 피난길에 사남매를 한꺼번에 잃는 슬픔을 격기도 했지만, 두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 바삐 뛰어다니며 거두어 나머지 사남매는 남 앞에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키워 놓았다. 그래서 나 하나가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해도, 섭섭지 않게 용돈을 얻어 쓸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원래가 굳은 살 풀릴 새도 없이 꿈쩍거리는 성미이기도 하지만, 집에서 붙어 지내자니 더욱 병만 커지는 것 같았다. 또 문득 늙음이 곧 짐이 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짐을 벗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일에만 쫓겨 다니던 때와는 달리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술집에 앉아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노라면 아낙의 어깨가 믿음직스러워 보였거, 공원에서 사귄 새 친구들과 함께 생전 처음 공개방송하는 자리에 가 마음껏 웃기도 했다. 그런데 때때로 깊어졌던 주름살을 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 한 모퉁이에 쏠린 내 눈길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터에서 한 노인이 구두를 깁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좁은 곳을망정 해진 구두를 깁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신명에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옳지, 저것이로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몇 달 간 나는 남의 재미에 끌려 다니고만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시간 때우기 오락이 아닌, 땀흘리는 재미가 필요했다. 며칠 후, 나는 서울 적십자 병원 후문 한 켠에 조그만 신기료 가계를 열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미덥지 않은 듯 내 출근길에 동행하기도 했지만 한 컬레 두 켤레 불구가 된 구두들을 말쑥하게 만들어 보란 듯이 거리로 내보내면서 어느결에 쑤시던 어깨도 낫고, 웃음도 되찾은 나를 보고는 안심이라는 듯 돌아갔다. 그럭저럭 후미진 구석에서 해진 구두를 기우며 살아오기 어언 14년,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된 손주 녀석들까지 내 일터를 찾을 때면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장님이야"하고 놀려댄다. 그동안 모은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 가게를 찾아 주는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과 때로는 진종일 먼지와 씨름하며 살지만, 속마음은 어느 높은 분네보다 자랑스럽고 순박한 청소년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더불어 젊게 산 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 여기고 있다.
(신발 수선공)
황금들에 퍼지던 멘델스존 - 이만방
애학에 진학하기까지 나는 줄곧 고향인 거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는 도실 나가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에 있는 세 개의 고등학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거창 고등학교를 선택했는데,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한 데는 이 학교에 다른 학교보다는 조금 큰 오르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읍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등하교길에는 다른 학교처럼 행진가나 국민 가요풍의 음악을 크게 방송하는 대신에 비니야브스키의 (전설)이나 차이코프스키의(백조의 호수) 또는 베르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중 하이라이트를 논길을 걸어오는 우리들 촌놈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벼이석이 고개를 숙인 가을날, 황금 물결치는 논뚝에서 메뚜기르 잡으면서 그와 같은 음악을 들었던 우리 촌놈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추억이었다. 비록 오르간 하나밖에 없는 시골 학교였지만 때로는 논둑에서 확성기를 통해 들었던 바이올린, 피아노 또는 관현악 소품들 덕분에 '아, 음악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구나!'하는 감동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나도 가졌으며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입학 시험 면접시 거창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오르간 때문이라는 나의 대답이 주효했던지 입학 후 줄곧 그 학교의 오르간은 내 전유물이다시피 되었다. 하루는 '곰'이란 별명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 나를 호출하셨다. 곰은 내게 말씀하셨다.
"야, 만방아! 이것이 바이올린이야."
그러면서 내게 몸통과 활만 있는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주셨다. 당장 사용할 수도 없는 그 바이올린을 집에 가져와서 나는 며칠이나 가슴을 설레며 보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때는 가족과 근 2년 가까이 떨어져 나 혼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유학생 가정에 점심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점심식사르 준비하는 동안에 집주인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려주었다. 숲속에 위치한 집에서 넓게 터진 창문을 통해 듣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때의 나를 무척이나 향수에 젖게 했었나 보다. 한 악장을 다 들으려면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식사를 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 너무 늦은 식사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부 나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창피람! 구태여 변명은 필요 없었다. 난 그때 독일의 어느 유학생 부부에게 초대받은 시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고등하교 시절의 논둑을 걸으며 누렇게 익은 벼이삭 속에서 멘델스존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삐삐선에 맞춰 내가 가슴 조였던 여학생에게 학교 앞뜰 코스모스 동산에서 열심히, 열심히 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작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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