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암을 이긴 무대 - 선경식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엄청나게 나를 압도하는 일이.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의사는 내 진료 기록장에 무얼 자꾸 적는다. 영어로.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입 안이 타 들어가는 그 고약한 정적을 내가 먼저 깨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어 "병이 깊은 모양이지요?" 하고 물었더니 의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보호자 없어요?" 하고 되묻는다. 불안했던 마음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찰나다. "그냥 제게 말씀해 주세요." 내 딴에는 당신의 어려운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의 CT필름을 뷰박스에 건 다음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사진 보실까요? 오른쪽 여기, 여기 보이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헛뜨고 있는 것이다. "여기 겨드랑이도 그것 같아요." 중견 연극배우 이주실 씨(53세)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유방암 선고를 받은 뒤 '시린 가슴'으로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1993년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주치의가 서명한 입원 지시서를 받아 들고 갈 길을 잃었다. 젖가슴의 암세포가 겨드랑이에 새끼를 치도록 몰랐다니... 이제 나에게 요술 지팡이는 없다. 그것(?)이 그것이라.>
담당 의사는 '보호자 없는 환자'가 측은했던지 차마 암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그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녀의 증세는 유방암 3기에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그녀가 '그것'의 징후를 알게 된 것은 이보다 보름 전쯤 둘째 딸 단비(13세)와 함께 욕실에서 목욕을 하면서였다. 단비는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더니 "엄마 쭈쭈에 구슬이 들어 있나 보다"고 신기해 했다. 그리고는 욕실 밖에 있는 언니 도란(27세)에게 외쳤다. "언니도 와서 한 번 만져 봐!" 10년 전 성격 차이로 남편과 헤어진 그녀에게 도란과 단비는 마음의 끈이자 삶의 줄이었다. 두 딸은 의학 서적을 뒤적이며 엄마의 젖가슴에 박혀 있는 '구슬'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부산을 피웠다.
며칠 뒤 그녀는 의사의 진찰을 받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동네 병원 앞을 빙빙 맴돌 뿐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병원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결과는 심상치 않았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1965년 9월 <망향> (오사랑 연출)의 주인공으로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연극배우, 탤런트, FM 라디오 DJ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수술하기 위해 입원 수속을 밟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차라리 홀가분했다. 그녀는 말했다.
"왠지 모르게 머리 속이 하얘지면서 마음이 편안하더군요."
그의 친구인 소설가 남지심 씨가 느낀 것처럼 그가 받아들인 인생은 그가 감당하기에 그만큼 벅찬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해 11월 초 오른쪽 유방과 오른쪽 겨드랑이 임파선 절제 수술을 받았다. 입원한 지 열이틀 만에 퇴원한 그녀는 항암제 주사를 계속 맞았고 차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안에 힘없이 누워 있든지 아니면 고통에 겨워 손톱이 보랏빛이 되도록 방바닥을 기어다녀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건지,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건지 갈등을 느꼈다.
1994년 봄 그녀는 고민 끝에 두 딸을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남동생에게 보냈다. 단비는 아예 입양을 시켰다. 하루 종일 엄마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딸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이씨와 딸들간의 '이별 연습'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혼자 남아 1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러면서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활동해도 좋다는 주치의의 허락이 있었지만 '쌀과 치료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항암제 주사 한 대에 17만 원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1994년 봄부터 가을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특별 기획한 <덕혜옹주>에 1인 3역으로 출연했으며, 11월에는 일본 공연에도 참가했다. 연출가 한태숙 씨에게는 암에 걸려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렸다. 그러자 연출가는 말했다.
"당신은 살 수 있다. 그리고 연극에서도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1995년 여름에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어머니역으로 출연했다. 그때 연극배우이자 연극 기획자로 전태일의 아버지역을 맡은 명계남 씨를 만났다. 연극계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촬영기간 중 많은 얘기를 나누던 끝에 서로 힘을 모아 좋은 연극을 한 번 해보자고 약속했다. 그후 수시로 만나 작품을 고르다가 이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얘기를 동생 같은 명계남 씨에게 털어놓았다. 유방암 수술을 받았으나 절망하지 않고 있으며 죽음에의 두려움은 이미 극복했다는 것을. 그리고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죽음과 절망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것을. 명계남 씨는 자신의 아픔과 치부를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 채 삶과 정면으로 맞서 활기차게 사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하여 암 투병 여배우의 50년 인생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1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쳐 선을 보인 것이 96년 11월 29일부터 서울 대학로 인간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모노드라마 <쌍코랑 말코랑, 이별 연습>이다. 대본은 그녀가 그동안 기록해 온 일기를 바탕으로 극작가 오은희 씨가 눈물을 흘리며 각색했다.
"일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써왔지만 죽음이 내 어깨를 툭 친 무렵부터는 더 진지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썼지요."
쌍코와 말코는 딸 단비와 도란의 애칭.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딸과의 후회스럽지 않은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스케치북에 4B 연필로 쓴 일기를 두 딸에게 복사해 나눠 주었다. 그녀는 현재 항암 치료를 중단한 상태이다.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쓴 채 연기하고 싶지 않은 데다, 환자처럼 사느니 하루를 살더라도 배우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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