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독과 더불어 사는 문학
고독한 천재 전혜린(1934-1956)은 평남 순천에서 8 남매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 문관 시험인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명석함을 이어받은 전혜린은 아버지의 열성적인 가르침도 있었지만 서너 살 때 벌써 국어책과 일어책을 전부 읽을 수 있었을 정도로 총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전혜린의 강렬한 자아를 묶어 놓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리저리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고향이 없는 아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어린 시절의 각별한 정서가 깃든 곳은 신의주였습니다.
......먼 데로의 그리움, 어디론지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민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전혜린은 경기여고를 거쳐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모범생 코스를 순탄하게 밟았습니다. 그녀는 3 학년 때 아버지의 예속을 끊고 좀더 '자유로운 인식'을 위하여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뮌헨에서의 5년 세월은 31년이라는 그녀의 생으로 볼 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전공을 법철학에서 문학으로 바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딸도 않았습니다. 뮌헨에서 그녀는 카톨릭에 귀의했고 고독과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만끽했습니다.
...... 내가 독일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고 무겁고 축축했다.......
이러한 절실한 고독은 철저한 자기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뮌헨은 전혜린에게 자유, 청춘, 예술, 사랑을 자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 어디선지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조각을 쪼고 있고, 시가 쓰여지고 있는 곳,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질 청춘과 모험과 천재의 꿈을 일상사로 생활하고 있는 곳, 환상이 우선하는 곳......
뮌헨에서 전혜린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습니다. 장녀로서 숙명 때문에 받아야 했던 아버지의 기대와 전공을 문학으로 바꾸기 위한 고독과 불면이 뒤범벅된 불안정한 생활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작품으로서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욕구가 치열하면 할수록 승화된 작품의 잉태가 어려웠습니다. 결혼도 전혜린의 고독감을 메우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혜린의 이러한 자신의 괴로움을 동생인 채린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나타냈습니다.
...... 넓은 우주 속, 풀포기와 같이 수가 많고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한 동생을 가졌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너는 얼마나 나를 내포하며 나는 또 얼마나 너를 내포하는지...... 중략......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는 나의 단 하나의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다. 아니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완성되지 못한 자아전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혜린은 1965 년 1월 10일, 서른 하나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혼 상태였던 그 무렵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수면제 과잉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좌절에 의한 죽음이나 수면제 과용에 의한 죽음도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즈음에 보여진 어휘들에서 죽음, 권태, 우울, 불안이 여기저기 느껴지는데 극단적인 성격을 가졌던 전혜린에게는 세상을 일상성으로 파악하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관념의 벽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행의 원인은 늘 나 자신에게 있다. 몸이 굽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진다. 어찌 그림자 구부러진 것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 줄 사람은 없다. 불행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내 마음뿐이다.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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