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공기의 울림, 북이 떨리는 모양 - 남정호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가 에블린 글렌(30세)을 만나 보곤 오랫동안 잊고 살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대 최고의 신예 음악가 중 한 명인 그녀는 타악기 독주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주인공이다. 오케스트라나 밴드의 보조 악기로 여겨지던 팀파니, 드럼, 트라이앵글 등 타악기만으로 독창적인 독주회를 열어 세계 도처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동안 그녀가 받은 세계적인 상만도 대영제국 훈장(O.B.E), 그래미상 등 십여 개에다 명예박사 학위가 다섯 개다. 물론 이게 전부라면 여느 신예 음악가의 평범한 얘기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기막힌 것은 그녀가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이라는 점이다.
지난 9월 초 캠브리지 근교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정확히 약속 시간이 되자 산뜻한 흰색 티셔츠에 검은 가죽 조끼를 입은 전형적인 영국 미인이 밝은 미소를 머금고 나타났다. 굴게 웨이브 져서 어깨까지 치렁치렁한 갈색 머리, 커다란 갈색 눈동자, 아담하고 오똑한 콧날, 영락없이 영화 <프리티 우먼>의 주인공 줄리아 로버츠를 빼닮았다. 입술 움직임을 보고 말을 이해하는 독순술을 익혀 의사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대로 그녀는 정확하고 세련된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그녀의 성장사는 이러했다. 그녀가 침묵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 대는 만 여덟 살 때부터였다.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귀 신경 마비 증세가 나타나 서서히 청각을 잃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음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열여섯 살 무렵에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 무렵 오케스트라에서 실로폰을 연주하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타악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청각을 잃었다 해서 음악에 대한 사랑마저 포기할 순 없었다. 청각 장애로 인해 그녀의 연습 과정은 엄청난 시련일 수밖에 없었다. 귀 대신 몸으로 소리를 느끼는 독특한 훈련을 쌓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발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맨발을 바닥에 대고 북을 치면 그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으로 전해 와 리듬과 소리의 강약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공기의 울림, 북이 떨리는 모양 등도 그녀가 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녀는 결국 영국 내에서 가장 권위 있기로 소문난 왕립 음악학교에 응시, 사상 첫 청각 장애인 학생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음악 학교 진학 후에도 에블린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아침 일곱 시 반부터 밤 열 시까지 매일 같이 연습했다.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가서도 악보만을 생각했을 정도니 그때는 삶 전체가 음악뿐이었던 것 같다."
남다른 노력으로 졸업 때에는 최고의 성적을 기록, 여왕상을 탔다. 졸업 후 눈부신 활동으로 그녀는 단숨에 음악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했으며, 게오르그 솔티, 로얄 심포니와 같은 세계적인 연주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자연히 세계 도처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 그녀는 최근 수년 간 무척이나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중앙일보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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