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나의 파랑새 - 서주희
1985년 4월, 나는 열아홉 살의 봄을 맞아 땅을 밀고 올라오는 새순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날을 늦은 봄의 어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분명히 버스를 타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종합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부모님과 여러 친척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서 계셨다. 내 옆에는 산소통이 있고 목에는 검은 공같이 생긴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의사가 그것을 눌렀다 폈다 하고 있었다. 사고로 목뼈를 다치면서 모든 신경이 마비된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인공적으로 시키고 있었다.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호흡 장애에 전신마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아무리 꼬집고 비틀어도 느낌이 없었다.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자유를 잃어 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남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그 평범한 자유가, 가장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가 이제 내게서는 사라진 것이다. 오죽하면 당장 죽을지라도 한 번만 일어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가졌을까. 왜 그토록 쉬운 것이 내겐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직 어린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다. 가망이 없다던 내게 가능성이 생긴 것은 사고 후 2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은 할머니와 이모가 오셔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무심코 왼팔을 들었는데 팔이 쑥 올라가는 것이었다. '정말 내 의지로 든 것일까?' 가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일 때가 있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들어 보았다. 정말로 내가 든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기구한 운명이 슬퍼서 울던 내가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그후 손가락과 다리,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였고 그러면서 아픔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꼭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게 새로운 고통이 다가왔다. 40도가 넘는 고열과 함께 다리에 심한 통증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밤새도록 다리를 주무르고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 주셨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해열제도 소용이 없었고 다리도 계속 아팠다. 급기야 음식까지 먹지 못해 링거액과 물로 버티다가 결국은 코로부터 위장까지 연결된 고무 호스를 통해 주사기로 묽은 죽을 넣어야 했다. 정신이 말짱한 내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억지로라도 먹어 보겠다고 이틀 만에 호스를 뽑았지만 한 숟가락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뭐라도 먹게 하려고 시장으로 백화점으로 다니며 새로운 것을 사 나르는 일이 일과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과일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고 차츰 음식도 먹게 되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정성 덕분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새 봄이 찾아왔지만 몸에 살이 붙어 있지 않아 내가 나를 봐도 낯설어 할 정도였다. 누가 봐도 이상한 환자였다. 전신마비의 불구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이렇게 인공호흡기를 하고 전신마비이면서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는 환자는 없었다.
그렇게 중환자실 생활을 끝내고 나는 1인실로 옮겼다. 희망은 점점 멀어지고 나는 자꾸만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여름, 나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너무 슬픈 것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병실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희야, 왜 전화를 안 받니?"
"전화를 왜 안 받아. 안 오니까 안 받지."
"그것 참 이상하구나! 교환에서는 병실에서 받지 않는다고 하던데.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서 걱정이 돼 집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때까지도 나는 내 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다만 주위가 많이 조용해졌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소리를 잃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럴 수는 없다고, 울고 또 울었다. 하필이면 내가 왜? 내 앞에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요. 왜 저는 이래야 하나요. 얼마나 더 있어야 불행이 끝날까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요. 제가 무슨 큰 욕심을 부렸던가요. 이렇게 소리마저 또 앗아가야만 하나요. 그래도 살아 있음을 기뻐해야 하나요. 아뇨, 이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다구요.'
나는 결국 죽기로 결심했다. 여태껏 수없이 죽음을 생각했지만, 그동안 내겐 죽음의 자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면증 때문에 먹고 있는 수면제를 모을 수 있었다. 매일 먹는 분량에서 한두 알 씩 남긴 것이 어느덧 꽤 많은 분량이 되었다. 그날 밤 간호하는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행동에 옮겼다. 서너 알씩 몇 번 약을 삼켰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과연 이것이 진정 옳은 일일까? 이러지 않아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나의 사고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엄마에게 너무도 몹쓸 짓이 아닌가.'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오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엄마의 우는 모습이 자꾸만 나를 잡았다. 불효만 한 딸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래,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이 상태에서라도 끝까지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엄마에 대한 최선의 도리이다.
나는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뭔가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한 생명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다해도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갔다는 흔적만이라도 남겨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도 쓰고 내 슬픈 이야기도 남기고 싶어졌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글씨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열심히 노력했다. 여러 달을 계속하니 글씨도 차츰 나아졌다.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나는 첫 편지를 써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냈다. 사고 후에도 한결같이 정다운 친구로 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위로가 되어 준 소중한 친구였다. 친구의 결혼으로 예전보다 우리의 만남이 조금은 줄었지만 여전히 다정한 친구에게 내 마음을 글로 전했다. 그 친구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서투른 글씨로 된 나의 글을 접하며 얼마나 힘들여 썼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였다. 그렇다. 아직 내겐 소중한 사람이 많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언제까지 슬퍼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인 내 운명이라면 더 이상 거부하지 말자. 7년의 아픈 세월을 잘 견뎌냈다고 나 스스로 대견해 하자. 먼 곳의 파랑새를 찾기보다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기쁨이고 행복임을 알자.
다치기 전에는 숨을 쉬고 산다는 것조차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이젠 없어서 슬프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있음을 기뻐하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에게 평범 그 자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축복임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도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보다 덜 아픈 사람도, 더 많이 아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나 내가 느끼는 삶의 무게는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 속에서도 기쁨을 아는 내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제13회 올해의 인간승리상 본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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