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 양정신
"이제 깨어났구나. 정신아, 정신아!" 여섯 날 나던 해 봄, 나는 어머니며 집안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말소리가 나던 쪽으로 아무리 눈을 돌려도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찾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내 몸은 따스한 어머니 품이 아닌 딱딱한 방바닥으로 넘어졌다. 마루에서 내 울음소리를 들은 식구들이 달려들어 와 나를 잡고 흔들었지만 내 눈에는 식구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매양 춥기만 한 내 고향 송화 들녘에 모처럼 아지랑이가 피던 날, 나는 언니 손에 이끌려 동네 뒷산으로 진달래를 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로 그만 온몸에서 불같은 열이 나면서 정신을 잃었다. 고열은 며칠 새에 내 시력을 앗아 갔다.
나는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겨우겨우 품앗이 공부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열 살 때 우연히 맹아학교 교사를 만나 평양의 맹아학교에 입학했고 그 선생님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정진 소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더 큰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빨리 점자 읽는 법을 배워 살 길을 찾으라는 집안 어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무조건 평양의 오랜 명문인 숭의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막상 발표를 보니 내 이름이 빠져 있었다. 나는 혼자 교장실로 올라갔다. 학과 시험 성적은 우수하지만 맹인이라는 이유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을 안 자더라도 정상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입학을 시켜 달라고 항의했고, 마침내 우선 '가입학'의 조건으로 공부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이날부터 나는 정상인 친구들이 사춘기를 즐길 시간에 밤이 이슥하도록 점자를 더듬으며 공부를 했다. 또 학비를 벌기 위해 날마다 시골 목장에 나가 양털 고르는 일을 했다. 손바닥에는 사춘기의 꿈같은 보드라움 대신 굳은 살이 박혔지만 나는 부끄러울 게 없었다. 얼마 후 정식 입학이 허락되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교사들이 속속 파면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내 꿈은 어디까지나 나처럼 버려진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래서 숭의학교를 마친 뒤 시골 교회들을 전전하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과로와 가난에 폐병까지 겹쳤다. 나는 더 큰 삶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동경 시립 음악학교에 들어갔다가 방향을 바꿔 미시마 의학 전문학교로 옮겼다. 아무래도 의학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긴요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물론 청강생이었다. 나는 몸이 두 쪽이 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겨우 눈을 붙일까말까 하는 한두 시간을 빼고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 몰두는 이론 공부엔 효과가 있었지만 금방 또 다른 벽에 부딪쳤다. 해부학과 세균학 등의 분야가 그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것들을 정복하기란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드리고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문제는 없는 것이다. 내게 눈이 생겼다. 그것도 따스한 마음을 담은 눈이.
일본인 동료인 심보 군이 그 시간이면 항상 내 곁에 와 일일이 감각이 예민한 손으로 개구리의 뛰는 심장을 만지도록 해주고, 현미경에 비친 세균의 모습을 그려 주었다. 그것은 어떤 이성간의 사랑이라기보다 참으로 뜨겁게 파동쳐 오는 감동이었다. 덕분에 나의 정식 입학이 허가되었다. 졸업식 날 심보 군은 내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그를 떠나 보냈다. 눈물은 귀국선 속에서 비로소 흘렸다.
(기독교 장로회 최초의 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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