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구두닦이 내 남편 - 김미라
삶을 통해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포르투갈의 격언
내 남편의 직업은 구두닦이다. 길에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과 구두약에 염색된 손을 하고 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항상 밝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무척 천진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대통령 부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지금은 구두닦이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가 구두닦이를 시작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그의 집에서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자 고집이 센 그는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며, 나와 함께 단칸짜리 셋방 하나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때부터 그는 구두 닦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치사스러운 직업이라고 투덜댔으나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근에 그는 친구와 함께 비원 근처의 어느 빌딩 하나를 맡아서 월급제로 일하고 있다. 그 빌딩은 15층 건물인데 구두닦이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밤이 되면 잠자리에 쓰러져 코를 골며 자버린다. 어떤 때는 피곤이 겹쳤는지 잠 속에서 헛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야, 협중아, 이번에는 니가 올라가라. 나 다리 아파 죽겠어."
나는 그의 잠꼬대를 듣고 다리를 주물러 주다가 엉엉 울어 버린 일도 있다. 내 울음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길은 남자가 한 번쯤 걸어 봐야 하는 길이야."
이제 나는 곧 태어날 아기와 그를 위해, 비록 구두닦이의 아내이지만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아내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주부)
깊은 강물은 소리 나지 않는다 - 류영옥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3학년 때까지의 등록금과 달마다 내는 2만 원뿐이다. 쌀은 집에서 날라다 먹어라."
그러나 대학 생활이란 것이 어디 등록금과 방과 쌀만 갖고 해결되던가? 책값, 옷값, 각종 학교 행사 및 서클 회비, 그리고 커피값까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다. 해마다 농토를 늘릴 정도로 부자인 어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냐며. 그 갈등의 고리가 잠시 풀린 것은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집안이 어려워 우리 집으로 복학 등록금을 빌리러 온 동네 대학생에게 어머니는 선뜻 돈을 내놓으며 말씀하셨다.
"자네는 돈의 귀함과 천함을 잘 아는 사람으로 여겨지네. 등록금을 꿔주니 졸업 후 2년 내로 갚게. 안 갚아도 좋으나 그때 불쌍해지는 사람은 돈을 못 받는 내가 아닐세. 지금의 자네 처지와 돈을 빌리는 심정을 잊어버린 자넬세."
내 어머니는 자상하거나 인자한 분이 아니었다. 공들여 싼 도시락, 리본을 들여 예쁘게 땋은 머리, 털실로 짠 스웨터, 이런 것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 밑반찬을 싸 들고 딸을 방문하는 다른 어머니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걸까. 이런 의심을 품기까지 했었다. 밤새 산길을 걸어서 이고 오신 어머니의 동치미 보따리에 목이 멘 그 새벽녘까지는. 내가 강원도 깊은 산골의 탄광 마을에서 자취를 할 때였다. 시골 자취방이란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 나는 그만 연탄 가스에 중독되고 말았다. 보건소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머리는 깨어질 듯하고, 물 그릇조차 집을 기운도 없었다. 무섭고, 외롭고, 난생처음 어머니가 그리웠다. 늦도록 훌쩍이다 까무룩 잠이 든 새벽, 두런거리는 소리와 낯익은 목소리에 문을 밀쳐 보니 머리에 보따리를 인 어머니가 하얀 달빛 아래 서 계셨다.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충청도에서 길을 떠나 오셨건만 평창에서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날 새벽 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밤새 산을 넘으셨던 것이다.
"애가 타서 여간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서리가 하얗게 내린 동치미 보따리를 풀면서 말씀하시는 늙은 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도 나는 부모를 원망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깊은 강물은 소리 나지 않는다. 자식이 그 깊이를 모를 뿐이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엔 할아버지 거지가 한 명 있었는데, 온몸이 꽁꽁 얼어서는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들곤 했었다. 이른 아침마다 식구들이 밥상을 받고 둘러앉은 방에 부랑자를 불러들이는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내가 한 번 심하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때 좀처럼 눈물이 없으신 어머니께서 글썽거리며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도 자식을 낳아 보거라. 남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음도 그 화가 행여 자식에게 끼칠까 두려워서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밑바닥 마음으론 이 공덕이 자식에게 쌓여지길 빌게 되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20대 중반에 몇 년 간 나는 보육원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안하겠다는 딸을 걱정하던 어머니였으나 정작 내가 그 생활을 포기하고 결혼할 남자를 데려가자 무겁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떠나 온 애들에게 평생 못 벗을 빚을 졌구나. 너를 엄마라고 부르던 그 애들에게 진 빚을 잊지 말고 살아라."
생활에 불만이나 자만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그 음성이 생생히 들려 와 고개를 숙인다. (수원 권선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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