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손가락을 이식시켜 주세요 - 정혜숙
어느 날 아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의 일이다. 젊은 처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내가 막 출근하자마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은 왠지 무척 초조하고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마침내 처녀의 어머니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의사선생님, 제 딸이 다음달에 시집을 가는데..."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옆에 앉아 있는 딸의 손을 감싸 쥐었다가 펴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제 딸이 어렸을 적에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잘못해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는 어릴 때 이식을 시켰는데, 나머지 한 손가락은 아직 이식시키지 못했어요. 저, 선생님. 지금도 이식 수술이 가능할까요? 딸이 시집갈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어서 저 애나 저나 매일 눈물이에요. 저의 손가락이라도 이식시키고 싶어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느새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네. 이식 수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떤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결혼한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는 딸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이식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고 말았다. (간호사)
올해 예순넷이 된 저는 레슬링 선수 장창선의 에미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고 창선이가 내 늙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줘, 꽃을 달고 시장에 나왔습니다. 저는 인천 신포 시장에서 평생 동안 콩나물만 팔며 살아왔습니다. 콩나물 팔아서 딸 둘, 아들 하나 굶어 죽지 않게 잘 키우고 손주까지 봤으니 이제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남들은 창선이 같은 효자 아들을 두었으면서 왜 아직도 콩나물 장사를 하느냐고 합니다만, 저는 이 장사를 안하면 할 일이 없습니다. 창선이와 며느리도 제발 좀 시장에 나가지 말라고 해서 크게 싸움까지 했습니다만, 이제는 제 고집에 지쳐서 더 이상 말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몸이 성하니까 그렇지, 몸만 아파 봐라. 콩나물 장사 하고 싶어도 못한다."
아들이 사업을 해서 풀칠할 만하다고 늙은 에미가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뭘 합니까. 이렇게 시장 바닥에라도 나와 앉아 있는 게 더 좋은 걸요. 10원때기, 100원때기 하는 검불 장사인 콩나물 장사를 한다고 어디 큰돈을 버는 겁니까. 그날그날 물건 값 떼고 손주들 사탕이라도 사들고 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 결코 돈이 그리워서 하는 장사는 아닙니다. 이 장사로 창선이 운동시켜서 은메달('64년 동경 올림픽 때를 말함)을 따게 하고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즐겁고 고마운 일입니다. 새벽에 시장에 나와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미역줄기 같은 것들을 매만지면 무척 즐거워집니다. 그중에서도 나물 가운데 가장 어른 격인 콩나물을 수북수북 추스르면 저는 마치 제 손주 녀석과 같은 마음이 됩니다. 요즘은 불경기라 그런지 이 장사마저도 잘 안됩니다. 그래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싶지,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이대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못 팔면 안 먹고, 팔리면 밥해 먹고, 조금 팔면 죽 쑤어 먹고 살면 됩니다. (이 글은 기자가 장창선 씨의 어머니를 인천 신포 시장으로 찾아가 받아 적은 것이다.)
콩나물 장사의 아들 - 장창선
콩나물 장사 40년. 이것이 일흔의 나이로 돌아가신 지 이제 백일도 안된 우리 어머니를 설명하는 말의 전부이다. 1966년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내가 금메달을 딸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을 파느라 내 소식을 모르셨다. 텔레비전을 본 시장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금메달을 땄다"고 알려 주었고, 방송국에서 "콩나물 장사 아들이 세계에서 1등을 했다"며 취재를 하려고 어머니에게 달려와서야 겨우 금메달 소식을 들으셨다. 내가 귀국하던 날, 트랩을 내려서자 여전히 고쟁이에 돈주머니를 찬 어머니는 그만 내 앞에 풀썩 엎어져 한없이 우셨다. 강한 줄만 알았던 우리 어머니, 고생으로 다져진 어머니의 다부진 모습만 보아 온 나는 그때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후 어머니는 아들의 금메달 덕에 콩나물 좌판 하나 마련한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때까지 남의 가게 처마 밑을 전전하시다가 겨우 시장 한복판에 변변한 자리 하나를 마련하신 것이다. 내가 선수 생활을 마치고 조그만 전자 대리점을 차렸을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셨다. "거, 장 서방, 어머니한테 너무 하는구먼!"하는 시장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싫었고, 이젠 먹고 살 만한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창피한 것 같아 좌판을 부수면서까지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다투고 나면 일주일씩 좌판 앞에서 새우잠을 자고 음식을 굶으면서까지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 생활을 고집하셨다. "네가 레슬링을 버릴 수 있느냐?" "내가 건강하니 이 정도로 움직이고 손주들 세뱃돈도 주지"하는 말로 오히려 나와 아내를 설득하였다.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서도 "콩나물 몇 사발이요? 50원입니다" 라고 헛소리를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우리 자식들이 결국은 지고 말았다. 자식들 눈에는 안돼 보이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생활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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