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해설. 박덕규 - 미지의, 미완의 사랑학
사랑하니까 시를 쓴다. 다른 사람 글 얘기 하지 말고, 내가 내 얘기를 직접, 재미있게 하자, 하고서 소설가가 되어 놓고는, 막상 내 첫사랑 얘길 하려고 하니까 또 내 얘기를 꺼내기 싫어지는 거 있지요. 사랑에 얽힌 오래 전의 내 시를 얘기하는 것도 별로 신나는 일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제 첫사랑에 무슨 비밀스런 것이 남달리 있는 편도 아니거든요. 언제 사랑의 첫 느낌을 가졌는지 분명치 않다는 점도 남다른 게 아니지요. 그때 그게 사랑의 느낌이었는지 아닌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잘 알 수 없는, 그런 느낌도 무수히 많잖아요? 반면에,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했을 때는 시심도 그만큼 충만했지요. 그럴 땐 정말 시를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요. 그 시를 어서 빨리 '사랑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싶어서 또한 미칠 것 같았던 느낌도 다른 이들의 추억과 꼭 같지요. 이렇게요.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잦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하리.
윤성근 "첫사랑의 시"에서
사랑의 마음만큼이나 풍성한 시의 마음이었지요. 그대를 향한 그 많은 시들은 지금 조금 남고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 사랑을 잃고 울던 시절에도 시심은 또 달리 충만했지요. 실연의 아픔을 시 쓰는 일로 달랜다고나 할까요? 시고 뭐고 다 버리고 싶은 심정인데도 시를 쓰고 있었지 않았겠어요.
날이 새면 기억하는 자의 가슴만 혹독한 멍이 들거늘
박주택 "포구에서"에서
혹독한 멍으로 남은 사랑을 다시 혹독한 상심 속에서 노래하고 있었지요. 이렇듯, 사랑의 느낌과 시를 쓰는 일은 특히 '첫사랑의 시절'에는 참으로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니겠어요? 그 점에서 보면, 그 누구나 시인이었거나 지금 시인이거나 장차 시인일 게 분명하죠. 바로 이 책을 읽는 당신들 모두가 말이지요.
그대가 누군지 몰라도 사랑의 시를 쓴다. 그런데 말이지요. 제 시와 더불어 한번 하고 넘어갈 사랑 얘기가 있기는 있어요. 사랑의 마음이 시를 낳는다고 했는데, 그게 꼭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 누구든, 또는 그 누구도 아니든, 막 보고 싳어 미칠 것 같은 그런 느낌 속에서, 자신이 본 적도 없고 그려 본 적도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춤고 시를 쓰는 때가 있어요. 미지의 존재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제가 이미 십수 년 전에 낸 시집 '아름다운 사냥'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가 눈에 띄더라구요. 제목이 '하현달'이라는 건데요, 실은 이리저리 뒤적일 것도 없이 그 시집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지요. 그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는 가장 어린 나이에 쓴 시이기도 하지요. 제가 그 시를 여기 다 적어 놓을 테니까 기왕이면, 옆에 앉은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작은 소리를 내면서 낭송을 해보시겠어요?
너는 참 이상한 꽃이야. 잠결에 어린 누이가 뜰에 내린 어둠을 쓸고 있다. 발목에 이는 덜 깬 바람이 흐느적거리며 다시 어둠의 일부가 된다. 치마폭에 갇혀서 나의 누이는 밤마다 꽃밭을 가꾸자고 한다. 물안개를 뿜으면 꽃들은 조개처럼 입을 오므린다. 뜰에 가득히 꽃잠을 자다가 나비잠을 자다가 간밤엔 초경으로 가슴 팔딱이던, 오오라네가 지상에 처음인 그 입술 작은 꽃이로구나.
제가 20세를 전후한 시절에는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 전후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살던 도시의 문화적 환경이 그랬지요.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 하는 가운데 관념의 문제에 제법 시달리는 듯한 그런 면이 그 지역 선배시인들에게서도 많이 발견되지요. '하현달'에서, 꽃과 누이와 달이 어우러지고 있는 밤이란 실재하는 밤 풍경이랄 수가 없겠지요. 이미지로 존재하는 밤이라고나 할까요. 그 밤을 위해, 잠을 '덜 깬 바람'이 '어둠의 일부'가 된다는 식의 표현이 얹어져 있어요. 바람이 어둠의 일부가 된다? 그건 이미지이면서 관념이지요. 그 관념은 무의미시론 이후의 김춘수 시인이 그토록 배제하려고 하던 것이지만요. 그땐 그런 거 저런 거 다 몰랐어요. 그때 제가 또 몰랐던 게 있지요. 이 시에서 초경을 맞는 누이란 실재하는 누이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 속의 소녀라고도 저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로는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제 무의식을 제가 알 수도 없고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이 시를 소리내어서 읽다 보면, 비록 이 시가 이미지로서의 풍경화로 제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뭔가 이 세상의 사물과 새로이 만나고 있는 한 소녀의 실재적 이미지가 드러난다는 거지요. 그 누이는 누구인가? 제게는 누이가 없어요. 저는 저 삭막한 남자 6형제만의 집안의 막내 아니겠어요. 그런 제가, 없는 누이를 설정해 보았다는 것, 잠결에 부시시 일어나 뜨락을 거니는 누이를 상상해 보았다는 것, 그 누이가 하얀 달빛 아래서 꽃과 입맞춤을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여자에 대한 막연하지만 지극한 그리움의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꽃잠, 나비잠이란 시어에서 묻어나는 귀엽고 순결한 이미지가 '흐느적거린다', '조개처럼 입을 오므린다', '초경으로 가슴 팔딱이던', '입술 작은 꽃' 등이 풍겨주는 관능적인 이미지와 만나게 된 게 다 필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때 누이란 내게 미지의 존재, 미지의 사랑이었던 거지요. 제 시 중에 '첫사랑의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요? 저는, 사랑의 첫 느낌은 어쩌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픈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우리 시에 무수히 등장하는 누이니, 여인이니, 순이니 하는 이름들이란 실제로는 미지의 연인일 수 있다는 얘기지요. 윤동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순이'도, 고은 시인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누이도, 더 나아가,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의, 송수권 시인의 절창 '산문에 기대어'에서의 누이도.
누이야, 이봄엔 네게 피리를 주마. 옥처럼 깨끗하고 슬픈 하나의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고 울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아지랑이 같은.
의, 박정만 시인의 아름다운 서정시 '누이에게 주는 선물'에서듸 누이도, 실제적 형상으로서의 누이나 애인이라기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여성지향적 원망이 낳은 상징적 형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더욱 성큼 나아가면, 김소월 시인의 '님'이나 한용운 시인의 '님'이나 그 무수한 서정시들의 '님'들이 또한, 말로 설명 안 될 미지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들의 미지의 사랑이 무한한 시들을 낳게 했다는 얘기지요. 미지의 존재를 향한 사랑의 노래가 우리 서정시의 뚜렷한 한 전통이라는 얘기도 가능하겠지요.
사랑을 잃고도 시를 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설레게 하고 그리하여 시심을 일으켜 무수한 시를 낳게 했던 여성적 대상이 실재적 형상으로 구체화 되는 때의 시에 대해서도 떠올려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예정된 순서니까요. 상상적 존재로서의 연인이 구체적 존재로서 형상화되는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노래한 시가 우리에게 또한 참으로 많지요. 바로 이렇게 표현되는 느낌 말이지요.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정호승, '첫마음'전문
이 '첫마음'의 느낌 속에서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암울한 식민지 시절, 순결한 영혼으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기를 잊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마저도, 동경에서 만난 한 여자 유학생에게 연정을 품고 사랑을 발견한 그 기쁨의 순간을,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윤동주, '봄'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작가 송우혜 선생이 도서출판 세계사에서 개정판으로 낸 '윤동주 평전'을 참조하세요),그 기쁨, 그때의 시심이란 얼마나 가슴 설레는 것인지 미루어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을 테지요. 빼앗길 것 같아 해가 떠도 눈뜰 수 없고 해가 져도 집으로 못돌아가게 되는 그 첫마음이란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간직될까요? 아니, 그 마음이야 오래 간직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그러니 사랑은 짧고 이별은 긴 것, 기쁨은 잠깐이요 아픔은 오래 지속되는 것, 그리하여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더욱 우리 가슴을 치는 법이지요. 사랑은 없고 사랑의 느낌만 남은, 그런데도 그 사랑을 떠날 수 없는 시. 가령, 이런 시, 여러 번 읽으면 절로 암송할 수 있게 되는 한 편의 시 말이지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빈집'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인의 이 연시가 꼭이 '첫사랑의 시' 라고만 명명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촛불 켜둔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 위에 사랑의 말들을 적으면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던 그 젊은 날의 일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걸 보면 이 시가 그런 시절의 실연을 노래한 시일 수밖에 없음을 쉽게 예단할 수 있지요. 시인의 사후에 곧바로 발표된 유고시라 해서 이 시를 두고 시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라고 추리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는 것도 좀 그렇죠? 이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노래한 연시 아니겠어요? 문제는 많은 연시 중에서 이 시가 상당히 돋보인다는 점이지요. 더욱이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실연의 사연을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감상적인 어휘들, 즉 촛불, 안개, 눈물, 열망 등의 말들로 드러내고 있는 이 시가 왜 뜻 깊게 다가올까요? 그 열쇠는 첫연 '쓰네'와 마지막 행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가 가지고 있지요. 그 두 표현이, 오랜 감상의 시간을 겉에서 감싸안고 있는 형태죠. 그건, 사랑의 열병을 한판 진하게 앓고 나서 그때를 돌아보는 지금 시간을 표나게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지요. 사랑한 시간을 문제삼은 게 아니라 사랑을 잃고 그것에 대해 쓰는 지점, 즉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를 문제삼고 있다는 얘기지요. 마치 저 유명한 연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에서
에서의 그 '자세'와도 같지요.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했지만, 실은 사랑했던 그 열병의 시간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는 거지요. 아직은 다 벗어나지 못했으니 '장님처럼'더듬거리며 '문을'잠그긴 하지만, 그 시간을 애써 과거로 밀어내고 객관화하려는 자아가 고개를 들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죠. '쓰네'가 바로 그 자아의 자세이지요. 그리하여 이 시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설명하는 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인간이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성숙되는 과정에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막 이해하려 하고 있는 한 청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을 테지요? 그런 과정 그런 모습을 사건화한 소설을 일컬어 '성장소설'이라 이름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는 '성장시'쯤으로 명명될 수 있지 싶어요. 어쨌든 좋아요. 우리에게는 이렇듯 무수한 사랑의 시가 있고, 저에게도 있었지요. 그 사랑들은 흘러가고 그 시들도 흘러가고, 그리고도 많은 시가 남아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군요. 그 시들은 말하고 있어요.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고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하다가 쓰러져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박노해, '사랑의 침묵'에서
'미완의 사랑'을 노래하고는 있지만, 사랑하다 지쳐 더 말도 못할 그런 사랑 얘기를 하고 있지만, 실은 침묵 그 자체로 '사랑의 완성'임이 증명되는, '미완의 사랑'이되 '완전한 사랑학'일 수 있는 그런 시들이 또한 우리 시의 뚜렷한 전통이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지요.
- 박덕규 : 1958년에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시운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평론가로 등단했으며, 1994년 '상상'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름다운 사냥', 소설집으로 '날아라 거북이',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장편소설로 '시인들이 살았던 집' 등이 있다. 현재 협성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