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주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새'에 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 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의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당신을 만나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시 "사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전문
지난 겨울 뜰 한켠에서 말없다가 기지개 켜는 나무들, 나하고 끝끝내 무관하던 암벽들, 물결에 씻기던 백년의 뿌리들, 좀벌레들, 그리고 나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출렁거릴 저 바다의 잔 물결들과, 쇠냄새 나는 수돗물과, 땅에 길게 드리워지던 짐승의 그림자들과, 달빛들, 달빛아래 염소들, 무성한 잡초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이름만큼 많은 저녁별들. 나의 피들은 그것들 모두를 기억한다. 그것들 모두와 함께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첫사랑'이란 미숙한 열정 속에 들려 한없는 혼란과 방황으로 보냈던 날들을. 그것들을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아직도 안고 있는 내 몸의 혈관의 피들은 불온하다. 사랑은 마음을 고요하게 비워놓고 난 다음에 이는 정열 속에 있다. 증오나 질투나 분노 속에는 괴로움과 흔들림과 혼란스러움만 깃들 뿐이다. 거기에는 일체의 욕망도, 의심도, 괴로움도, 의무도, 권리도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온 마음과, 온몸과, 온 심장과, 온 영혼을 다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 내게 더 이상 바칠것이 없을 때까지 내 전존재를 그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죽음과 같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우리 마음속에, 심장 속에, 몸 속에, 영혼 속에 찾아드는 것은 고요한 평화와 분별과 사려가 깃든 정열과 이 세상 모든 고귀한 것들의 있음이 일으키는 행복한 충일이다. 그러나, 첫사랑이란 그런 완전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사랑이다. '첫사랑'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의 모든 순간에 걸쳐 경험하는 사랑은 전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한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고 첫사랑이란 그렇게 꿈꾸는 '다른 땅'이다. 그것은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에 진절머리를 치며 도망가는 지중해의 기슭, 빛의 사막이다. 저문 거리의 인파 속에 파묻혀 걷다가 뒤돌아보면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빌딩들의 기하학적인 선으로 분할된 하늘에 황혼이 암암히 걸려 있을 때 우리는 이유 없이 돌연한 슬픔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경영에 불가피하게 끼어들어 있는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 등이 선명하게 환기되면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회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사랑이란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이다. 그런 것들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첫사랑이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결과와 그것이 생의 표면에 남기는 흠집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 첫사랑이란 실패에 의해서만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입증하는 비극의 그 무엇이다. 나는 부쩍 '새'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간밤의 꿈에서는 나는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 떨어져 헐떡거리는 '새'를 보았다. '새'는 오래된 이끼 냄새가 나는 그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서 몇번이나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시도했으나, 이내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곤 했다.
아주 오래 전 홀연히 내 곁에 날아왔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새'에 대한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은 언제나 가슴이 텅 빈것만 같은 공허감에 오래 시달리곤 했다. 베갯잇은 간밤에 흘린 땀으로 아직 축축하고, 거기 떨어져 있는 몇 올의 덧없는 머리카락을 집어올리며 나는 '새'가 떠나버리고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가 버렸는가 가늠해 보며 몸을 떨곤 했다. 내가 '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새'를 만나기 이전에 나는 이미 어떤 이성에 대하여도 성적 배타성을 굳게 유지해야 할 결혼관계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새'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사실을 서둘러 말해 버렸고, 그 순간 나는 '새'의 얼굴에 스쳐가던 실망과 안타까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는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 그 무렵 나는 숨쉬기 조차 힘들정도로 지쳐 있었고, 내게 홀연히 날아왔던 '새'는 위안과 희망, 그리고 구원이었다. 나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미소하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참담하게 깨달았다. 나는 한 인간에게 그때처럼 무목적적으로 빠져들었던 적이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한 인간에 대한 그토록의 몰입과 탐닉을 통해 나는 인간의 애증의 그 끝간 데 없음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그것이 찰나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드나들게 하는 열락임을 비로소 알았다. '새'와 나의 시간들 속에는 일몰에 황량하고 장엄한 나신을 드러내는 서해 바다와, 교외선들과, 서울 근교의 유원지들과, 늦가을 산사들이 있다. 그리고 밤여행, 독주들, 서로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열망, 머리를 짓 찧는 고통, 불면, 편지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거나 소진되지 않은 비속한 정욕, 도덕적 갈등, 몇 번의 인위적인 쓰라린 헤어짐,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이 강했던 운명의 인력, 눈물, 돌연한 파국들이 남아 있다. '새'는 나로부터 사라져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지만, 나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년 동안을 혼자 지냈다. 어느 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빠져나와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혼자 밥 먹고, 일하러 회사에 나가고, 퇴근해 돌아오는 길에 몇 병의 맥주를 사들고 들어와 늦도록 마시다가 취해 잠드는 단조로운 생활이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때 나는 목젖을 막 통과하는 혼자 먹는 저녁밥의 아픔에 자주 목이 메이곤 했다. 그 동안 나는 낡은 수동타자기를 두드리며 많은 글들을 썼고, 내가 하는 일에 마음을 붙잡아매려고 무진 애를 썼고, '새'에 대해서는 간간이 아주 조금씩만 했다. '새'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나는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새'와 내가 가끔 들렀던 신촌 로터리에 있는 고전음악이 나오는 레스토랑에 몇 시간을 멍청하게 혼자 앉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새'는 "여기 정신병원이야"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도 장난끼가 많았던 '새'가 나를 놀려주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새'가 어떻게 해서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전화를 끊고도 나는 오래 힘들어 했다. 나는 '새'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쳤다. 나는 '새'의 인생이 저토록 망가지게 방치해 두었다. '새'를 생각하는 동안 참담한 자괴감이 내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세월은 또 흘러갔다. 나는 말라버린 우물 밑바닥에 갇혀 언제까지나 날개를 퍼덕거리는 꿈 속의 '새'를 생각한다. '새'는 이미 내 손길이 미치치 않는 저 낯선 세상의 복판으로 흘러가버렸다. '새'는 세상은 커다랗고 정다운 여인숙이고, 인생은 하룻밤 짧은 꿈이라고 말하며, 아득히 흘러간 날들처럼 웃고 있다. 나는 나를 구속하는 일체의 인습과 이데올로기, 내게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과 싸우며 살아왔다. 내가 그 싸움들을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하려고만 했다면 내 삶에 어떤 흠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것들을 피동적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하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싸워 왔다. 그 싸움은 내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이기보다는, 내자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내 삶의 많은 흠들은 그 싸움의 생생한 흔적들이다. 나는 이제 단단하게 아문 그 상처의 자리에 나의 눈물과 욕망을 비벼넣으며 어루만진다. 가끔 어둠에 침잠하는 내 영혼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삶을 살 수 없는가?' 나의 인격, 주체, 정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딱딱하게 엄습할 때, 사방을 둘러봐도 뚫고 나갈 길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자기혐오와 우울함에 빠져들고 나의 이성은 마비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마비된 이성은 가까스로 힘을 회복하고 다시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나됨을 가능케하고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씩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막연하게 자기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다가 어느 계기에 직면해 낮은 문설주 따위에 호되게 부딪쳐 정신이 막막해 지는 것과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모순으로 가득찬 자아에 대한 생소함, 삶의 주체인 자기자신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자기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뛰어넘을 길 없는 막막함으로 형언할 길 없는 고통과 절망의 바닥에 떨어져버리는 경험 말이다.
첫사랑이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운명이다. 그것은 생의 통과의례, 한 번은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 무엇이다. 내 의지와 선택의 바깥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쉽게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나'라는 티끌처럼 작은 실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역사, 더 크게는 자연,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성과 힘, 알 수 없는 그 어떤 필연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첫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나는 어느덧 첫사랑을 관조해야만 하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내겐 더 이상 세상의 규범들을 바꾸고자 하는 잉여의 힘들을 다 탕진한, 저 뻘밭처럼 황량하게 비어 있는 내면만 있을 뿐이다. 그 황량한 뻘밭에는 어떤 '새'도 날지 않는다.
- 장석주 :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동시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청하출판사를 설립하여 단행본들과 계간 '현대시세계', '현대예술비평' 등을 펴냈다. 시집으로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11월', '절망에 관하여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세기말의 글쓰기', '문학의 죽음', '문학 인공정원' 등과 장편소설로 '세도나 가는 길' 등이 있다. 지금은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