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권대웅 - 하늘빛 남루한 사랑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두 번 보다가 울었습니다. 성탄절. 오래 울리지 않는 전화벨 소리 기다리기 싫어 코드를 뽑아버렸습니다. 잘라도 잘라내버려도 마음속에 자꾸 그리운 혹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는 뜨거운 물 속에 몸을 푹 담그는 것이 최고입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면 숨이 터지도록 뒷산공원까지 뛰어갑니다. 너무 숨이 차 눈물이 찔금 나는 하늘 멀리 황금빛 노을이 지고 나는 공원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가문비나무숲 사이로 지는 햇빛을 바라봅니다. 때로 눈부시고 설레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근거림 때문입니다. 오래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 시 "블루 슈 다이어리" 전문
한 뼘 담장 높이 위로 지친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였을 때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보니 가을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야물딱지게 뜨고 담장위로 올라가던 나팔꽃이 나를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빨갛게 웃고 있었다. 가을이 왔다. 가을이. 언제나 가을이 오면 슬쩍 등뒤로 불어오는 한기와 함께 내 기억의 창문 하나가 열려지고 그 창문 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나곤 한다. 그것은 양파냄새 같기도 하고 혀 끝에 떨어지는 식초 한 방울의 짜릿한 느낌 같기도 하고 텃밭에서 퍼져오는 깻잎냄새 같기도 하고 밤하늘에 빛나는 아픈 박하사탕 같기도 하다. 내 기억 깊숙한 곳에 어두운 집으로 남아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면 문을 여는, 잠깐 불을 켰다 끄는 낮고 적막한 집. 나는 천천히 그 집 속으로 걸어간다. 그 집의 문을 열어본다.
그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 있었다.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산동네 사람들이 자급하려고 심어놓은 고추며 상추, 깻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그 텃밭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스물 한 개의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모두 다 올라가 세 걸음 뒤에 하늘색 나무대문집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진 하늘색 나무대문집 문간방에서 그녀와 나는 별똥별처럼 짧고도 잊지 못할 한 달을 살았다. 그녀는 집을 도망쳐 나왔고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녀와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녀는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방안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 않고 있오T고,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퇴근하면 서둘러 그 산동네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너무 바빴고 야근하는 날이 많아 그녀와 자주 있지 못했지만 내 머리 속은 온종일 그녀가 지키고 있을 방과 그녀의 근심스러운 눈을 생각했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그녀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해군장교인 탓에 자주 이사를 다녔고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와 내가 20년 만에 만난 것은 직장일 관계로 자주 부산을 오갔던 때였다. 그녀는 나를 금세 알아보았다. '너 그때 전학갔던." 짝이었던 그녀를 나도 쉽게 알아보았다. 토요일마다 나는 부산에 갔었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와 헤어진 일요일밤 11시 50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 때 헤어졌던 짝과 다시 만나게 되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성장해서 만난 연인과는 다른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어렸을 적 표정을 발견하면서 묘하게도 나는 나의 어렸을 적 얼굴을 찾아내곤 하는 것이다. 구구단, 풍금소리, 연탄난로, 도시락.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녀보다 먼저 떠오른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참, 동화 같았던.
"밥 굶기기 십상이지 어디 글쟁이 하고."
집 앞에서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집을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면 때로 잠들어 있던 그녀,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었을 그녀의 사레 섞인 숨소리가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이런 게 아니라는,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들이 몰려왔다. 그런 강박관념들이, 불안감들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피곤했지만 두근거렸기 때문에, 설레었기 때문에 나는 만원버스를 탈 수 있었고 야근을 할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우리는 부산의 광안리나 해운대가 아닌 산동네 언덕길과 뒷산을 거닐며 놀았다. 옆집 아줌마가 심어놓은 텃밭에 고추와 호박을 따다가 된장찌개도 끓이고 호박전도 부쳤다. 그 산동네에는 꽤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가 있었다. 초등학교 담장 옆으로 길게 코스모스 길이 나 있고 아이들이 뚫어 놓았을 법한 개구멍도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저녁을 먹고 그녀와 나는 그 길을 자주 산책했다. 천천히 뒤를 따라오던 그녀가 가끔 먼발치에서 멈춰 서 있곤 하였다.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방 어둑어둑 번지는 어둠사이로 그녀의 슬픔도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울까'
아주까리 나뭇잎사귀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라고 나는 힘주어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다가갈 때까지 끝내 잎사귀에 얼굴을 감추고 서 있었다. 하늘색 나무대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서 그녀는 울었다. 나보다 그녀가 더 힘들어했다. 용기 있게 저질렀지만 우리를 그렇게 벅차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머리 위에 아득한 미래였을까. 누가 스무살 나이가 절망할 수 있어 아름다운 나이라고 말했는가. 그 집 문간방에는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그러나 그 집은, 그 집으로 가는 언덕과 계단과 우두커니 서 있던 해바라기와 비에 젖던 보안등은 지금 없다. 오직 내 기억 속에 가끔 바람이 불면, 등뒤로 후각과 미각을 건드리며 훅하고 짧게 깻잎냄새 같은 향수가 지나가고 나면 한번씩 문을 열어 그 방을 보여줄뿐. 그 집 방문을 열어본다. 마당에서 문을 열면 한 평 정도의 부엌이 나오고 부엌에서 문을 열면 아주 작고 좁은 방 하나가 보인다. 책상 하나, 비키니 장롱, 이불, 독수리표 소형 녹음기, 걸어놓은 옷가지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 창문을 열면 해바라기가 보였고 아랫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조금도 쉬지않고 왔다갔다 하는 마당이 보였다. 그 지붕 위로 푸른 군대처럼 호박넝쿨이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녀는 내가 없는 빈방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멀리 보이는 서울과 창문아래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방에 혼자 남아 있게 되면서 그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함과 그리움과 사랑만으로 가득 찬 그 방에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슬픔과 그리움과 미움으로 가득 찬 그녀가 떠나간 그 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불가능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와서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방에 없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어디 갔을까. 말도 없이. 나는 우산을 쓰고 우리가 자주 가던 초등학교 옆 산책길과 언덕길을 그녀를 찾아헤맸다. 늦게,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는 싸웠다. 나는 집으로 가버리라고 말했고 그녀는 울면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를 쫓아가다가 나는 그만 계단에 발을 헛디뎌 발목이 부러졌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아니 발목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텃밭에 왜 그리도 많은 깻잎을 심어놓았는지, 며칠을 그 방에 누어 있는데 열어놓은 방문과 부엌문 사이로 깻잎냄새가 우리가 사는 방을 가득 채웠다. 내 기억의 깻잎냄새 속에는 막막함과 그리움과 가슴 설레임과 신선함 같은 것들이 함께 묻어 있다. 아주머니는 자주 남는다며 한 움큼의 깻잎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부산에서는 깻잎이나 콩잎을 된장독에 심어놓았다가 나중에 꺼내 먹는데, 맛있다며 아주머니의 된장독을 열어 돌 사이에 누른 깻잎을 심어 넣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가 된장 깊숙히 묻었던 깻잎처럼 내 기억 속에 그런 향기와 막막함을 갖고 심어져 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것도 꼭 한 달 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우리의 집을 찾아낸 것도 꼭 한 달 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집 창문아래 지붕위로 올라가던 호박넝쿨의 푸른 군대처럼 부하 군인 한 명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많이 찾아헤맸는지 우산은 썼지만 등이 다 젖어 있었다. 그는 발목을 다쳐 누워있는 내게로 다가와 나의 빰을 때렸다. 그리고 그녀를 끌고갔다. 나는 깨금발로 그녀가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기억한다. 그때 계단 맨 아래 그녀가 돌아선 담장 위 불이 켜진 보안등이 빗물에 젖던 모습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래 나는 그 방에 누워 있었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을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버린 지금 그 언덕, 그 산동네, 그 집은 이제 없다. 따라서 내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내 기억의 먼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어느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다시 가을이다. 어느새 각도가 바뀐 햇빛이 방 안 깊숙히 들어와 감춰졌던 구석구석을 비춘다. 문득 늑골이 아프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누가 널어놓았는지 마당 앞 골목에 빨간 고추가 너무도 선명한 빛나고 있었다. 그 고추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코끝이 찡하다. 이 살아있음의 살갑게 느껴지는 생의 정면.
- 권대웅 196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이 있고, 장편동화로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