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홍영철 - 저물 무렵의 시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조금씩 살아 있음. 혹은 조금씩 죽어있음. 빛은 빛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둠은 어둠만을 고집하지 않고, 살아 있음은 살아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고 죽어 있음은 죽어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음. 조금씩 살아 있으므로 조금씩 살아 있게 하고 조금씩 죽어 있으므로 조금씩 죽어 있게 함. 서로 조금씩이므로 서로 조금씩이게 함. 조금씩 살아 있음에 찬미 조금씩 죽어 있음에도 찬양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이 아름다워. 안개, 아니면 빈 아스팔트.
시"회색에 대하여"전문
그는 저물 무렵 내게로 왔다. 낮의 환함이 힘을 잃고 모든 사물들이 어둠에 잠겨들 그런 회색의 시각, 그 저물 무렵에 그는 내게로 왔다. 그때 우리 집은 도시계획으로 말미암아 가옥의 반쯤이 잘려나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우리 집은 일종의 제과점을 하고 있었는데, 도로확장이라는 당국의 방침에 따라 점포의 일부가 뭉텅 잘려나가 가게도 온전히 운영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큰길 쪽에서 보면 방문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꼴이었는데, 나는 그런 우리 집이 좀 창피스러웠다. 나를 사람답게 키워보겠다는 어머니의 생각으로 도시 변두리에서 한복판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변두리 학교에서는 제법 똑똑한 편에 속했나 본데, 도심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학교로 옮겨진 내게 모든 것은 낯설고 어리벙벙했다.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참고서를 들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도심지에서의 생활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변두리에서의 삶보다 훨씬 신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다른 녀석들에게 뒤지기가 싫어 나는 철저히 삐딱선을 탔다. 교문 앞에 즐비한 만화가게 출입, 불량식품 사먹기, 야바위꾼들과 사귀기 등등 비 모범생들이 즐기는 것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범생이'들의 생활 패턴보다 확실히 신나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야바위였다. 뺑뺑이라 일컬어지는 동그란 판이 탄피가 덧씌워진 대못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가고 닭털이 달린 바늘이 그 위에 내리꽂힌다. 물론 그 전에 나는 얼마간의 돈을 배팅한다. 1번부터 6번까지 어디든 자기가 원하는 숫자에 돈을 건 뒤 바늘로 뺑뺑이판을 내리찍는 것이다. 모두 여섯 칸으로 나눠진 뺑뺑이판 위에 바늘이 꽂히고 나면 야바위꾼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판을 멈춘다. 내가 건 숫자에 바늘이 꽂혀 있으면 나는 다섯 배의 돈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야바위의 전문가였다. 2원이 10원이 되고, 10원이 20원이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운은 아니었다. 정확한 계산에 의해 바늘을 냅다 꽂는 것이다. 내가 2번에 돈을 걸었다 치자. '나는 당시 2번을 몹시 좋아했다' 야바위꾼에게 나는 "2번을 잡고 돌려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열이면 열 명의 야바위꾼이 2번을 잡고 뺑뺑이판을 돌린다. 판이 돌아가는 찰나, 나는 속으로 재빨리 "하나, 둘, 셋!"을 외친다. 그러고는 뺑뺑이판을 향해 바늘을 냅다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바늘은 어김없이 2번에 꽂혀있게 마련이었다. 나의 유년은 그런 야바위 속에서 흘러갔다. 아니다. 나의 유년 속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미완성인 채, 아니, 시작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내가 뺑뺑이와 만화와 화투 등으로 그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우리집은 반쯤이 강제로 헐린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폭격 맞은 것 같은 집 모양을 대충 추스르고 우선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우리 집이 부끄러워 방 안엘 들어가기가 싫었다. 누군가 방문 밖에서 우리들의 구차한 생활을 들여다볼 것만 같았다. 따라서 밥 먹는 시간이나 잠잘 시간 외에는 늘 바깥에서 돌았다. 그런데, 그때 그 아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아이가 우리 집 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가 키네마 극장의 높고 널따란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춘 그런 시각이었다. 그 아이는 피아노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부서진 우리 집의 담벼락을 지나 어둠이 깔린 대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다가구 주택식의 가옥이었는데, 우리가 도로변에 살고 있었고 안쪽으로 세 세대가 살고 있었다. 음악대학에 다닌다는 그 가운데 집의 큰딸은 피아노 강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늘 쿵쾅거리는 계집아이들의 어설픈 피아노 소리들에 젖어 살아야 했다. 당시 나에게 피아노 소리란 그저 시끄러운 소음쯤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감각한 철사선의 진동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본 것은 학교 앞 세상으로부터 지쳐 돌아오고 있던 어느 저녁이었다. 만화방에서 남은 2원으로 간신히 5원을 만든 나는 그 5원으로 돼지기름에 튀긴 얇은 만두를 간장을 듬뿍 쳐서 후루룩 말아먹고는 귀가를 서둘렀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스름 속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꽃이었을까? 나비였을까? 향기였을까? 어둠 속에서 점점 다가오는 그를 피해 나는 반쯤 남아 있는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더럽혀질 수 없는 꽃 또는 나비였고, 나는 진흙이었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며 그 아이를 응시했다. 그 아이는 커다란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나풀나풀 뛰어와서는 내가 숨어 있는 담벼락 바깥을 돌아 안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가슴은 내가 야바위꾼 앞에 섰을 때보다 몇 갑절 세게 뛰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가슴을 하고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의 때를 모두 불러들인 것 같은 검은 손. 내 손이 검어 보이는 것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그런 손이 싫어졌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수돗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그냥 그대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곧 모차르트의 연습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지붕이며 담장이며 거리는 저녁을 지나 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멀리 키네마 극장의 우람한 지붕도 어두운 하늘과 섞여 있었다. 나는 피아노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쿵쾅거리는 것이, 나의 새벽잠을 깨우거나 숙제를 방해하는 굉음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다음날도 같은 시각에 내 곁으로 왔다. 그것은 곧 나의 귀가 시각이기도 했다. 만화방 긴 나무의자에 묻혀 있다가도 그 시각만 되면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세상사로부터 내가 어떤 아름다움의 세계로 돌아오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치는 것이 바이엘인지 체르니인지 알지를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지, 못 치는지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그 아이의 하얀 손가락이 두드리며 매는 소리가 내겐 커다란 설레임이었다.
그 아이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피아노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저물 무렵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혹시 남의 눈에나 띄지 않을까, 나는 무너진 담벼락 깊숙히, 가능한 한 깊숙이 몸을 숨기고는 저녁을 맞았다. 아니, 그 아이를 맞았다. 그리고 피아노 소리를 맞았다. 그 아이가 내 곁을 스칠 때쯤이면 나는 그 앞으로 튕겨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야만 했다. 나는 그 앞으로 나갈수가 없었다.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내게 그 아이는 천사였고 나는 그 아이에게 악마였다. 그런 등식은 곧 상처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적어도 꿈을 꾸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그런 나의 비밀을 내 조직들에게 털어놓았고, 나와 같은 갬블러인 친구들은 재빠른 정보력을 가동해서 그 아이가 우리와 같은 학년으로 몇 반이며 집은 어디인지를 알아 준 것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내 주위에는 온통 소년 갬블러투성이었다. 대부분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 아이들이었는데, 녀석들은 누가 장돌뱅이 자식이 아니랄까 봐 몸놀림도 머리굴림도 재빨랐다. 미성년자 관람가보다 관람불가를 더 즐겨 보던, 투전놀이를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보다 더 좋아하던 우리들은 자주 화투를 쳤다. 장삿집 아이들이라 낮의 텅빈 집안에 틀어박혀 우리는 '짓고땡이'나 '섯다'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알아낸 그 아이의 이름은 봉명희. 시장통에서 약국을 하는집 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이제 내가 머뭇거릴 곳은 하나가 더 느는 셈이었다.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나는 약국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길 건너편에서 하얗게 빛나는 유리창 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유리창 안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내 눈이 형광등의 빛보다 더 하얗게 바랠 때쯤 나는 돌아서곤 했다. 차라리 그 아이를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가슴에 안고.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지는 못했다. 말은커녕 나의 존재를 드러내보이지도 못했다. 저물 무렵 세상의 모든 놀이에서 돌아와 부서진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그아이가 가슴에 피아노 책을 안고 뛰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그러고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 아니면 쪼르르 시장통으로 달려가서 약국의 유리창을 눈이 부시도록 바라보는 일, 그것이 내게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의 전부였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나는 무사히 중학교 진학 시험에 낙방을 했고 이어 재수생 노릇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피아노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약, 만약 말이다. 그 아이를 지금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책을 안고 나풀거리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정말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아이는 이미 중년 속에 들어 있을테고,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도 갖고 있지 못할 것이며, 지금 그를 만나더라도 나는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3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런 저물 무렵의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아무것도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 것, 세상의 잣대로 그를 평가하려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는 지금도 회색의 시간을 좋아한다. 흰 것도 조금씩 살아있고, 검은 것도 조금씩 살아 있는 그런 시각.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조금씩 살아 있는 것. 어느 하나가 스스로만을 고집하지 않고 조금씩 살아 있는 세상.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 홍영철 1955년 대구출생으로 계명대 국문학과를 나왔으며, 1978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와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작아지는 너에게', '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 '내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