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주택 - 가을편지
새벽 총총한 걸음으로 오리라. 기다리는 순절만으로도 행복한 날. 날이 새면 기억하는 자의 가슴만 혹독한 멍이 들거늘 밤은 어찌 이렇게 바람만 안겨다 주는지. 끝끝내 살아 잊어버렸던 것들이 깨어 오는 무렵 한밤내 뒤척인 방 안으로는 쩡쩡히 눈 시린 해.
저 강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까지 갈대들을 눕히고만 있을 것인가. 철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물결만이 허허롭게 남아 있어 기다리는 자의 일렁이는 가슴을 닮아 머리를 날리며 서 있는 이곳.
저 무리지어 날아가는 무심한 철새들이 알겠는가. 돌아서지 않는 발길로 스스로의 중심으로 돌아간 뒤에라도 잔물결 이는 기슭의 갈대처럼 부스럭거리며 눕혀지지 않는 잠들을.
시"포구에서"전문
너무나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그대의 집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내 마음 어느 한 편 구석에서 거울처럼 빛나다 빗물에 숨을 가라앉힐 것입니다. 그 동안 잘 있었는지요. 그대의 나라에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지요. 낙엽에 마음을 빼앗겨 흐르는 시간의 기억을 이따끔 더듬기라도 하는지요. 시간의 공기가 강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쓸쓸한 기억들이 강 하구 쪽으로 몰려갈 때쯤이면 내가 아는 그대는 저녁 강을 바라보며 가끔씩 종류를 알 수 없는 은빛 영혼들이 펄럭이다 사라지는 것을 검푸른 입술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현 듯 외로워져 마치 소망이 사라진 슬픈 가수처럼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음울한 노래에 잠겨 있는 날처럼 그대 또한 돌들이 파랗게 부풀어오르는 잠 틈 사이에 낀 유리가 되어 방 안에 잎들을 후드득 후드득 떨어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밤마다 후미진 기억의 기슭에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오는 바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가슴에 낀 잎이 어두워져 갑니다. 도시의 낮은 구름위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이고 불빛의 노란 젖이 흘러갑니다. 안간힘을 써서 시간도 서로 몸을 붙여 흘러가고 나무들도 서로 배척하거나 서로 싸우지 않고 한 묶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발자국 소리만이 표박하는 시간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저녁, 홀로 앉은 의자 뒤로는 감정들이 부서집니다. 노을도 네모반듯한 창으로 밀려와 몸을 맡기고 정적이 감미로운 전망을 휩싸고 돌 때 가구를 물들이며 노을이 달콤한 동작으로 움직입니다. 일곱 시가 되었나 봅니다. 그 시간 속에 길이 의식 속에 길게 뚫려 홀로 걸어가는 어두운 자화상이 보이고 은행나무조차 잎을 떨어뜨린 지 오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옷깃을 세워도 봅니다. 당신의 조용한 뜨락에도 가을꽃이 졌겠지요. 창밖으로는 바람이 불고 가끔씩 집으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지금, 어쩐지 그대의 휜 블라우스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종로의 전화부스 속에서 내 전화를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화가 난 여자에게 내 대신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화부스 밖으로 오가는 차들을 무심히 바라보다 전화 속의 여자와 몇 마디 나눈 뒤 어색해 하는 내게 말없이 전화기를 건데 주었지요. 다시 당신이 내 뒤에서 전화 차례를 기다렸고 나는 여자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전화를 끝마쳤지요. 그때 당신이 내게 했던 말 '잘 되셨어요?' 라는 말, 기억나지요? 그리고는 당황스러워 '감사합니다. 차 한 잔 사겠습니다' 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말. 머뭇거리던 당신이 나를 따라나선 건 호기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한없이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던 그대. 비가 오던 날이던가요. 물 묻은 손으로 우산을 접고 다방으로 들어오는 당신을 보고 시름 속에 누워 있는 잎들이 일제히 싱싱하게 펄럭거렸답니다. 그랬지요. 내 외로움의 거처에 뜨거움을 지피며 당신은 내 산발한 나날들을 매만져 스스로와 투쟁하는 내 영혼을 재웠던 게지요. 지금 '그 집 앞'이나 '애니로리'와 같은 노래가 부르고 싶어집니다. 천변에서 우리가 부르던 노래였나요. 이제 아파트의 창에 기대어 나직이 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움이 삶을 가꾸지는 못한 채 무성한 격정을 재우고 입술만 달싹거립니다. 내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계곡이 깊게 패어지고, 걸어 놓을 수 없는 계곡 어귀에서 희망과 시, 그리고 빛나는 날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꿈으로 뒤척이는 날들 속에 잿빛 플라타너스 먼지가 빗물에 씻겨 길을 적시고 음울한 음률로 걷는 사람들 사이로 젊음이 방류된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별이 뜨나 봅니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존재의 밑바닥을 걸어가면 심장을 갉아먹은 많은 시간의 동물들의 눈빛이 만나집니다. 그 심연 속에는 더 깊은 물이 흐르고 가끔씩 기이한 새와 관목들도 서 있습니다. 흙으로 덮인 평원의 피부 위로 살아나는 식물들. 그러한 식물들은 굳은 의지로 노래하고 두근거리는 영혼에게도 떨리는 입술로 말을 붙입니다. 그리고 내 몸속에는 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가끔씩 목책 안으로 흰구름조차 떠다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운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요. 땀구멍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으로만 채워집니다.
나는 우리들 존재의 정면을 바라봅니다. 나는 그대의 근육을 잘라내지 못 합니다. 당신이 나의 숨골을 막지 못하듯이. 어느 시간이던가, 당신이 마음을 다져먹고 돌아서려 했을 때 혹은 영영 마음이 떠나버린 후 무수한 돌이 날아왔을 때 나는 그 돌을 피하느라 운동신경의 거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랬었지요. 나는 내 옆에 여자가 붙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기애는 페스트'라고 말했을 때 진작 깨달았어야 했던 게지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던 내게 당신은 자기애에서 나오는 지독한 집착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을 겁니다. 여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이별의 계보처럼 당신도 훌쩍 유학을 핑계삼아 그 먼 나라로 갔었던 거지요. 홀로 남겨진 내가 사랑한 것은 광택을 잃은 가구와 미욱한 전망의 어두운 저켠에서 날아가는 새들과 추억의 배후에 두리번거리다 걸어간 길을 다시 되돌아오는 상처투성이의 나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그 돌을 들어 던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내 존재의 정면이기도 하지만 운명은 너무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어 아무도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람 끝에 불려오는 미진한 소식에 몸을 기대어 눕지 않고 시간에 미쳐 존재를 바쳤던 어리석음을 생각해 봅니다. 바람이 창밖으로 붑니다. 불이 켜진 집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잎사귀가 검게 반짝이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립니다. 잘게 잘리는 문조각, 그리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생물의 알을 깨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동안 길이 아닌 길로만 걸었습니다. 어디론가 끝없이 길이 아닌 길. 보이지 않는 희미한 안개와 종류를 알 수 없는 벌레들만이 수풀 속으로 달아나면 생애 끝에 오는 죽음은 어디서 숨쉬며 기다리고 있을는지요. 절벽 끝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득한 일몰 뒤에 태양의 뒤편에서 붉은 새가 날아오를 때 바닷 속 어족들은 일제히 심해로 가고 숨쉴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옷들. 그리고 밤입니다. 사위도 갑자기 조용해지고 귀가하는 차 소리도 뜸합니다. 이명현상 때문에 정신이 없는 틈 사이로 낮 동안 피곤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곧바로 나를 몰아치는 어떤 의식의 한 부분이 그것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기억나시지요. 내 불행의 족족을 아무 불평 없이 따라오다 불현 듯 스스로의 운명 때문에 망연히 길 중에서 있었던 그해 여름. 그리고 십 몇 년 전이던가의 10월. 적산가옥이 즐비한 낯선 항구의 군산. 비가 내리고 서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만난 스산한 삶과 부두 노동자의 느린 걸음걸이. 비는 내리고 더 많은 비는 우리들 운명에 섞여 퀘퀘한 선실 속까지 파고들어왔지요. 그대가 나를 손으로 쳐서 만날 수 있었던 꾀죄죄한 남매 아이와 일용할 양식에 부딪꼈을 그 아이들의 엄마, 질척질척한 항구의 곁 모퉁이에서 금방 구워낸 뜨거운 풀빵을 입술을 데는 줄도 모르면서 한 손으로는 또 다른 풀빵을 집고 두 눈으로는 또 다른 풀빵에 번뜩거리며 먹어대는 유행 지난 옷을 입은 아이들. 그아이들 엄마의 풀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세월에 낡은 아이들의 앉은뱅이 책상이 보이고 닫혀지지 않는 부엌문이 보입니다. 연민이겠지요. 그처럼 내 연민의 삶 속으로 멋모르게 걸어와 지나온 길이 너무 멀어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 사랑하는 혈육들. 삶에 발이 묶인 채 다시는 외지로 떠날 수 없는 항구의 사람들처럼 그대도 나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대에게 정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가 그대의 영혼을 밝혀 나의 길에 이르던 시절. 세상의풀꽃을 모아 한밤에 몰래 와 머리에 얹어주던 그대. 열린 가슴으로 나를 묻어주고 우수에 젖어 세상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며 나를 재우던 그대. 내 의식의 부둣가로 목청이 굵은 사내의 주절대는 욕이 들리고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가 그 사내의 욕에 섞입니다.
그대, 낙엽이 바람에 불립니다. 저녁의 정적 속으로 사랑이 일어서고 어제보다 더 깊은 잠을 잘 때 그대의 길 속으로 길을 걷다, 쓰다 만 일기 위로 내 몸을 눕힙니다.
- 박주택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꿈의 이동 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가 있다. 현재 경희대 강사로 재직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