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문재 - 수국은 한 송이 꽃이 아니다
여름 날은 헉헉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시 '꽃은 빛의 그늘이다- 수국' 전문
수국이 필 때면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국 한 송이가 저마다 여러 개의 작은 꽃송이로 이루어진 꽃의 다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국은 그 커다란 꽃송이에 비해 화려하지 않다. 거개가 흰색이거나, 산수국일 때 연한 녹색 기운을 가질뿐이다.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되쏘지 않는 꽃. 되쏘기는커녕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받아들이는 꽃이 수국이다. 하얀 수국은 결혼했다가 일찍 홀로 된 누이를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행복한 이야기지만, 들려주는 사람에게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익히 체험했을 터이지만, 사랑 이야기는, 군인들의 무용담처럼 부풀려지기가 십상이다. 첫사랑 이야기 앞에서 알리바이와 물증을 추궁하는 청중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첫사랑 이야기가 난감한 것은, 과연 무엇이 첫사랑인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겨우 말을 배우고 난 대여섯 살 시절부터 막 40대로 접어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는 사랑은, 그것이 사랑의 범주 안에 든다면 모두 첫사랑이다. 수국 한 송이가 여러 개의 작은 꽃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나는 최초의 여자를 사랑했다. 나는 만득이었다. 아버지가 쉰에 나를 나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마흔둘이셨다. 태어나서 내가 말을 배우고 사물과 사태를 인지하기 시작하던 때, 그러니까 최초의 기억이 만들어지던 무렵, 내 최초의 여자는 '늙으신' 어머니가 아니었다.(다른 글에서도 짧게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집에 잠깐 세들었던 경상도 아가씨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앞에는 검문소가 하나 있었다. 그 검문소는 해병대 관할이었는데, 어느 날 그 검문소 초소장이 우리집 건넌방에 세를 들었고, 며칠 뒤 아주 젊은 아가씨를 데려왔다. 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 헌병대장(우리는 초소장을 헌병대장이라고 불렀다)은 20대 후반이 채 안되었을 것이고, 그 아가씨는 갓 스무 살을 넘었을 것 같았다.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새카만 늙은 어머니에 비해 그녀는 키가 크고, 피부가 고왔으며, 얼굴이 갸름했다. 그 아가씨는 쌀을'쌀'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살'이라고 했다. 그녀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은 바로 그 '살' 발음 때문이다. 여름철이면, 우리집 마당에는 아버지가 손수 만든 돗자리가 깔렸다. 저녁식사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졌으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끼여들었고, 저녁식사 자리는 이내 옛날이야기 자리로 바뀌었다. 전쟁과 피난 이야기가 대부분인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잠들곤 했다. 그런 어느 여름 날 저녁이었다. 그 헌병대장은 근무가 끝나면 자주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그 아름다운 경상도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른들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그 헌병대장은 꼭 권총탄 띠를 마루나 돗자리위에다 풀어놓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그 아가씨를 때렸다.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나는 몰래 권총에다 손을 대고는 했다. 그때 그 권총은 얼마나 차가웠던가, 그 때 이미 나는 그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그 경상도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병대장이 술에 취해 손찌검을 한 다음 날이면, 그 아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 소리없이 흐느끼곤 했다. 나는 그 화선지 같은 아련한 품안에서, 이 여자가 내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상상했다. 지금이야 그녀를 경상도 아가씨라고 표현하지만 그때 나는 아마 속으로 '엄마'라고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엄마'를 괴롭히는 헌병대장에 대한 어린 나의 적의는 정당한 것이었다. 내가 어른들 몰래 그 무시무시한 권총에 손을 댔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헌병대장과 경상도 아가씨는 그해 여름 한 철만 살고 우리 집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젊고 예쁜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큰 형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다. 아침 일찍 비포장길을 달려 인천에 도착해,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예식장에 닿아야 했다. 부모님, 친척들과 함께 인천에서 고속버스를 탔는데, 유독 내 좌석만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나는 그 향기가 나는 곳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오른쪽 창밖만 바라보아야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나 되었을까. 그 '향기'가 나에게 뭔가를 내미는 것이었다. 왼손으로 겨우 받았다. 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껌을 결국 씹지 못했다. 버스가 서울역 앞에 내릴 때까지 나는 그 껌을 왼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털이었을까, 여우털이었을까. 얼굴 한 번 쳐다보지 못한 그녀는 털이 많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 쥔 껌 하나조차 벗겨 먹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럼을 많이 탔던 나는 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또 '젊고 예쁜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삽화를 떠올리다 보면, 나에게 첫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에 대한 염원이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젊은 여자 결핍 증후군'을 앓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수국의 작은 꽃잎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그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은 그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나는 설레기도 했지만 두렵지 그지없었다. 낯선 여자가 준 껌하나 까먹지 못하는 놈이 망아지만한 여학생들과 어떻게 3년을 지낸단 말인가. 게다가 중학생 시절, 나는 키가 얼마나 작었던가. 나는 여학생들이 두려웠다. 대신 국어 선생님이나 영어 선생님, 또는 음악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여선생님들은 인천에서 출.퇴근하던 나의' 젊은 어머니'들이었다. 시골에서 인천까지 버스로 통학하던 70년대 중반, 그 통학 버스 안은 나의 용광로였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던 그 통학길은 옹목 다섯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프로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던 나에게 몇몇 정류장은 위험지대였다. 그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는가, 타지 않는가를 놓고 그날 하루의 운을 따지곤 했다 그때 나에게는 서너명의 '애인'들이 있었다. 종점에서 함께 A여고 3학년생, 다리 건너에서 타는 B여고 2학년생, 목장에서 타는 C여고 3학 년생, 종점에서 타는 3학년생은 키가 작고 얼굴이 아담했고, 다리 건너에서 타는 2학년여고생은 지중해 여자처럼 늘씬했으며, 목장에서 타는 3학년 여고생은 피부가 검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그 세 여자 가운데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아카시아가 만발한 5월의 주말이면, 목장에서부터 우리집이 있는 종점까지 서너 시간을 혼자 걸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몇 송이의 수국 꽃잎을 만난 적이 있다. 워낙 쑥맥이어서,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굳는 통에 대학 1학년 3월은 견디기 어려웠다. 입학 동기 남학생들에게도 말을 잘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축구를 잘하던 과 동기를 따라 문학회에 들어가고, 그 문학회에서 선배를 만나 연극부에 들어갈 떄까지도 나의 '젊은 여자 부재 증후군'은 '대인공포증'으로 변질되어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때 연극부는 나에게 새로운 ' 가족'이었다. 복학한 중문과 선배는 큰형처럼 보였고, 무용과나 국문과 여자 선배들은 또 '어머니'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큰형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연극부실에서 먹고 잤다. 대학시절, 문학보다는 연극에 심취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늙으신 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자라났던 성장기에 대한 보상심리 바로 그것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쉽게 결혼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시 쓰는 친구들과 함께 지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 될 여자를 그야말로 죽도록 따라나녔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죽을 것 같았기 떄문이다. 잠시라도 보지 못하면, 연락이 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고문이고 지옥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사랑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은 말하여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랑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 묵언해야 한다. 거개의 사랑은 연애의 오역일 때가 많다. 사랑과 연애를 동일시하는 한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리고 연애는 무분별한 소유욕,집착일 때가 많다. 연애를 보라, 그것은 거의 정신병이다. 다른 것 사랑하는 그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다. 연애는 순수하다. 지독하다.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 삶의 전과정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자신이 아닌 그 무엇에 투신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연애 말고는 그리 많지 않다. 연애의 에너지가 잘못 풀려나갈 경우 광신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첫사랑은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투신은 신뢰의 관계로 성숙 할 때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연애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 사랑으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은모두 신뢰가 부족하기 떄문이다. 그 리고 그 신뢰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이 수국의 작은 꽃이파리들을 겪으면서 내가 터득한 깨달음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수국 한 송이가 아니라, 수국 한 소망를 이루는 작은 꽃잎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시이다.
이문재 - 1957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을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이 있다. 제6회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동네 주간으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