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철 - 세상의 첫 걸음
지금쯤 고향의 상수리나무 뿌리는 언덕을 내려와 온 들판 밑을 끌어안고 있겠지 이 지구를 움켜쥐고 있겠지 나, 그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첫사랑 이름 석 자 새겼으니 그 이름 물관부를 따라 흐르다 내게 다시 돌아오겠지
나는 잠 깨리라 상수리나무 열매 씹으며 텁텁한 향수, 첫사랑의 기억에 미소지으리 인공폭포 지나 가양동으로 오다가 나는 가끔 쓰러져 상수리나무 뿌리가 전해 주는 옛사랑의 노래를 듣네 그녀의 심장은 아직 따뜻하다 하얀 운동화끈도 순결하다 오뉴월 염천, 엄동설한에도 버티었겠지
그 옛날 내 사랑 이름 석 자 새겨놓은 깊은 뿌리 상수리나무 거기 중간키 아직 휘어져 있고 아직 멧새 둥지 틀어 주겠지 고향 뒷산의 중간키 뿌리 깊은 상수리나무
시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전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이들을 피해 슬며시 놀이터로 나간다. 마치 골목 끝에 버려진 폐차처럼 볼썽사나운 서민 연립주택의 놀이터는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끊어진 그네줄, 검붉게 녹물이 흐르는 시소, 모래 속엔 슬리퍼가 한 짝 잃고 처박혀 있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벤치엔 지난밤 누군가의 몸을 가려주었을 법한 담요 한 장이 걸쳐져 있다. 하늘은 멀고 가을햇살이 따갑다. 나는 그 담요를 슬쩍 밀어내고 거기에 않아 친구가 보내온 시집을 읽는다. 친구는 아직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의 노랠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친구마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어깨가 아프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거기 뜻 모를 아픔에 고개를 숙여 굽은 어깨를 주무른다. 목운동을 하다가 벤치에 그려진 서툰 글자를 발견하고 나는 씩, 미소를 머금는다.
'현진이는 내 꺼.'
초등학교 3,4학년의 정도의 글씨체다. 글씨는 서툴게 힘차게 어린 마음 그대로 크레용으로 씌어져 있다. 요즘은 초등학교 학생만 되어도 이 정도의 낙서는 서슴치 않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집을 덮는다. 시집을 덮고 눈의 초점을 잃어 가며 마치 깊은 잠에 빠지듯 한낮의 몽환 속에 옛날 언젠가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자신이 자란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요즘에야 깨달았다. 고향을 떠나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람은 대개 다 그렇게 사는가 싶었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행정구역상 엄연히 서울로 편입된 지 40년이 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러나 40년 세월이라지만 마을의 지세는 지난날 그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고 가구 수조차 그 모양 그대로이다. 다만 신작로가 8차선 대로로 바뀌고 신작로 건너 김포 벌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뿐, 내가 아직 세상사를 잘 모르듯 내가 사는 마을도 뭔가 깊은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아마 내 자식이 내 나이쯤 되면 저 푸른 벌판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내가 저 벌판에서 잘 주어오던 뜸부기알처럼. 예나 지금이나 벌판 끝은 김포공항 활주로다. 그 활주로를 타고 비행기는 하늘로 떠올라 구름을 헤치고 멀리멀리 아주 먼 세계로 날아가곤 했다. 어린 날,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벌판 너머 떠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놓지 않으며 늘 저 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조리며 방과후의한나절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은 1분에 한 대씩 뜬다는 비행기의 공해와 소음이 큰 골칫거리이지만, 한나절에 한두 대 떠오르던 그 시절엔 비행기란 마치 꿈을 싣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타임머신이었다. 그렇게 벌판 끝을 내다보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먼지 쌓인 창틀 위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거기 글자를 써 넣기도 한다.
'부연.'
중학교3학년 때였다. 중학교 3학년이 사랑이 뭔지 알겠냐마는 나는 창틀에,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렇게 쓰고 또 썼다. 나는 3학년 들어 성적이 지지부진하자 그 핑계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과외공부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마음은 잔뜩 바람이 들었던가 보다. 예나 지금이나 과외공부가 꼭 성적을 올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건 그저 자기합리화를 위한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중3의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방과후의 헛된 시간을 보내던 공항시장의 2층 과외방에 새로 한 여학생이 들어섰다. 미닫이 문이 열리고 7,8명의 우리는 침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때 직감적으로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부류임을 알아차렸다. 과외를 가르치던 이병룡 선생도 대뜸 만만치 않은 얼굴빛을 보였다. 가르치는 일보다 다스리는 일이 더 힘든 중3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 등촌동에서 온 그녀 역시 성적보다는 그저 어떤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첫날부터 다른 학생들과 멀어져 있었다. 당시 여중 3학년들은 겨울이 되어도, 외투를 입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외투를 입어도 학생복에 맞춘 군청색의 헐렁한 외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고등학생들이나 입던 밤색의 윤기나는 외투에 그것도 몸의 곡선을 따라 맞추어 입은 듯한 모양이었다. 박박머리의 중3 눈에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얼굴은 그리 곱상이 어니었는데 한층 성숙한 모습의 그녀가 여간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훗날 부연이와 화곡여중 한 반이었던 초등학교 동창 금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나를 보고 그 과외에 들어왔다 하는데 그건 맞는 말 같았다.) 어쨌거나 사흘에 한 번 꼴로 빠지던 그 자리에 나는 하루도 걸르지 않고 나가는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그건 부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 모르게 나누는 밀회란 얼마나 짜릿하고 감미로운가. 나는 이미 그 어린 나이에 그 향기에 빠져 하염없이 헤매이기 시작했다. 공부가 끝나면 그녀는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밤 늦도록 김포가도를 걸었다. 공항동에서 발산동을 지나 화곡동을 지나 등촌동까지 두 시간여를 걸었다. 아직 어렸으므로, 처음이었으므로 말없이 걸었다. 단지 그저 걷고 또 걷는 것이 우리의 전부였다.
그런 밀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긴 교자상 두 개를 붙여놓고 공부를 하던 과외에서 부연이가 내 곁에 앉게 되었다. 자리는 오는 순서대로 앉았기 때문에 나란히 앉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선생을 외면하고 이런저런 잡념에 매달리던 나는 슬며시 부연이의 지우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슬며시 거기에 몇 글자를 써 넣었다.
'부연이는 내 꺼'
나는 그 글씨를 쓸 때의 심정을 기억한다. 공부는 지루했고 실내는 추웠으며 그저 뭔가 유치한 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런저런 낙서나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단지 유치한 장난이 아니었다. 지우개를 받아든 그녀가 잠시후 슬며시 상 아래로 손을 디밀어 나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부연이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여자는, 작지만 어떤 몸짓에 만족해 하는지. 그게 비록 한갓 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떤 시선에 행복해 하는지. 대처승의 외동딸이었던 그녀와 가수가 되겠다던 나의 사랑은 고교 3년 동안 참으로 가련하고 막막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이미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병약한 나와 엄격한 종교인의 딸로서 우린 세상은 온통 닫혀 있는 벽의 한가운데라고 믿었다. 답답하고 답답하였다. 그나마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쏟을 때, 부연이는 오히려 연예계 진출을 꿈꾸며 신인가수들과 몰려다녔다. 우리는 대학입시에서 모두 실패했다. 예상된 결과였다. 나는 너무 높이 지원했고 그녀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나의 처지를 잘 모르던 아버지는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게 깊은 배신감까지 느끼는 모양이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도망가지." "......"
아버지의 악담에 가까운 훈시가 있던 날 나는 집을 나와 부연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1978년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 간단한 짐을 챙겼고 어머니는 돈 5만원을 쥐어주었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 기타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옷가지는 별반 챙기지를 않고 마치 야유회라도 다녀오듯 나는 기타부터 둘러메고 당당히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우리는 밤기차를 탔다.
"아유, 귀여워."
내가 초조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고 밴드부였던 그녀는 머리나 옷모양새가 학생이 아니었고 나는 아직 박박머리를 웃도는 동안의 학생이었다. 무조건 멀리 가자 했고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모두 초행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검은 산야를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에 마음을 졸였고 그녀는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것은 밤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역 앞 광장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렸는데 호객행위를 위해 사창가에서 나온 아줌마들이었다. 나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무조건 먼 데로 가서 여관에 들어가요"
우리의 행색을 보던 아줌마는 그렇게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가리키는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 이만하면 됐겠다 싶은 거리의 여관 앞에 섰다. 여관 앞 길가엔 큰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훗날 부산 사는 동료 문인에게 물으니 거기쯤 그런 동상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수학여행 때 경주에서 여관에 들던 기억이 있었지만 거리엔 인적이 없고 붉은 간판이 여간 낯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너, 미성년자지!'하며 덜컥 뒷덜미라도 움켜쥘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선 이는 부연이였다. 눈을 비비며 기어나온 여주인은 흔히 있는 일인지 아무런 제지없이 3층 끝방을 열어주었다. 침대와 화장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대 앞에 병풍이, 그것도 8폭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그런 낯선 모습들이 더욱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몇 번이나 문고리를 확인하였다. 한 시간 여의 침묵이 더 흐른 뒤, 나는 병풍 곁에 누웠고 부연이는 침대로 올라갔다. 부연이는 밴드부 합숙훈련을 하느라 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이런 방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가 빨은 양말 두켤레가 나란히 창가에 걸려 있었다. 내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여자가 나의 양말을 빨아준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 설레는 일인지 나는 또 부연이로 하여 처음 알았다.
"나가자."
그녀는 여행 온 관광객처럼 밝게 나를 이끌었고 우리는, 철없는 나는 그녀를 따라 해운대로, 태종대로, 용두산공원으로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어 다시 여관으로 기어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이게 가출인지 여행인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사흘째 나는 2차 시험결과를 확인하러 초량우체국으로 갔다. 그땐 시외전화를 우체국에서 해야 했다. 2차마저 낙방이었다. 바닷가에 나가 오후를 보내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역앞 홍등가에서 나는 서성거렸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호객조차 없는 술집 골목에서 나는 아무 곳에나 불쑥 들어섰다. 현실을 현디기에는 너무 어렸고 누군가에게 기대기에는 나도 이제 어른이었다. 접대부 서넛이 밥을 비벼먹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한 여자가 먹던 숟가락을 놓고 반색을 하며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나는 너붓한 수작을 부리며 술을 시켰다.
"밥이나 다 먹고 마시지." "아니, 됐어요."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두 주전자나 말없이 비웠다.
"오빠, 집 나온 지 얼마 안됐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고생 많았겠다. 여긴 오빠처럼 감옥 갔다가 바로 오는 사람 많아. 편히 술 먹어요."
여자는 박박머리를 보고 내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여자는 더욱 애틋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후한 대접을 해주며 술을 따랐다. 취기를 느끼자 나는 술집을 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는 부연이가 홀로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구명가게에 들러 당시로서는 초고급인 마주앙을 두 병 샀다. 여관방에 들어서니 부연이가 눈동자를 까맣게 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불합격을 알렸다. 우리는 또 말없이 침대 앞에 앉아 그야말로 '고뿌'에다 마주앙을 따라 마셨다. 평소 술이 체질에 안 맞는다던 부연이가 나를 따라서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몇 잔을 마신 뒤 마치 숨 넘어갈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거칠게 숨까지 몰아쉬기 시작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술까지 마시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또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 대학입시니 가출이니 하는 생각은 다 떠나버리고 벌떡 그녀가 한 명의 성숙한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고작 손이나 잡고 걷고 또 걷고 하던 우리였지만 이젠 이 정도는 되겠지 하는 흑심이 들었던 것이다.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부연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침대 우로 기어올라갔다. 취기가 있었지만 부연이와 한 이불 속에 누우니 심장이 뜯어질 듯이 벌렁거렸다. 나를 마주한 그녀의 얼굴이 취기에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나는 술기운을 뿜어 내는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천천이 손끝을 등뒤로 돌려 그녀의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남자의 피부와 달리 여자의 피부가 그리 곱다는 것을 나는 또 그녀로 하여 처음 알았다. 그러게 천천히, 그녀의 몸을 더듬는 사이 나의 손이 몸의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그녀가 나으ㅢ 손목을 덥썩 잡았다.
"잘들어, 철아, 나는 꼭 너와 결혼할 거야. 그때 너에게 내몸을 선물하고 싶어."
'아!' 내가 부연이의 그 한 마디를 듣고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 한 마디에 얼마나 깊은 믿음과 행복감을 느꼈던가. 부연이는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나는 서둘러 내려와 병풍 앞에 누웠다. 그리고 너무나도 배려 깊은 그녀의 고운 마음씨에 감사했다. 이후 우리는 며칠간 더 즐거운 방황을 하고 돈이 떨어지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울로 올라왔다. 지겹게 어깨에 메고 다니던 기타는 자살바위 어디쯤에선가 앉아 둘이 이정선의 '섬소년'이란 노랠 불러본 게 다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여행 잘 다녀왔냐는 식으고 형제들도 낙방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공연히 나 호로 폼 잡고 괴로워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수를 했고 그녀는 강남의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대통령이 죽고 거리엔 최루탄이 쏟아지고 우리의 만남도 시대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나는 더 깊이 문학에 매달리면서 더욱 어려만 갔고 그녀는 성큼 건너뛰어 여인이 되어갔다. 스스로 물러선건 나였다. 딱히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없다. 단지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믿음만이 마음 깊이 떠나지 않았다. 6,7년 뒤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그녀였다.
"결국 시인이 되었구나....." "그래"
이미 그녀는 '내 꺼가 아닌 남의 꺼'가 되어 있었다. '남의 꺼'가 되었다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을 빗소리 같았다. 우리는 종종 전화통화를 했다. 술이 취하면 나는 더 전화를 했다.
"내 선물 내놔." "뭐?" "부산서 약속했잖아. 네 몸 내게 선물한다고." "하하하, 바보 그걸 그래 믿었어. 순진하긴, 그때 그냥 밀어붙였어야지. 하하하." "히히히. 그래 그때만 해도 난 그렇게 순진했는데. 시인이 되더니 이젠 세상의 온갖 못된 것만 눈에 보이는구나."
전화로, 부연이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다시 알려주었다. 세상사람 모두를 믿지 말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렇게도 답답해 하던 사찰을 떠나 이제 그녀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씨만큼이나 큰 여유를 누리면서 옛날 얘기처럼, 아주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아갈 것이다. 잘 살다가 가끔은 생각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시들어 가는 한 시인의 순진했던 한 시대를.
박철 -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단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을', '새의 전부', ' 너무 멀리 걸어왔다' 등이 있고, 1997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하여 단편 '어떤 귀로'등을 발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