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호승
나의 첫 키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 시 '첫마음' 전문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삼촌네 집에 가서 사촌 누나들이랑 화로에 오징어를 구워 먹었다. 나는 마침 오징어 다리 한쪽을 뜯어먹었는데 몇 번 씹다가 너무 딱딱하고 질겨서 도로 뱉어 놓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셋째 누나인 재란 누나가 얼른 그것을 자기 입 속에 넣어 버렸다.
"누나, 그거, 내가 먹던 거야. 질겨서 먹다가 도로 뱉어놓은 거야. 먹지마. 이빨 아파."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재란 누나를 쳐다보았다. 재란 누나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얼른 입을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잘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재란 누나의 그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입을 다물고 내가 먹던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고 있는 재란 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치 재란 누나와 키스라도 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오징어 다리는 내가 많이 씹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내 입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다시 먹기에는 내 침이 축축이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재란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걸 자기 입에 넣고 맛이게 먹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나 자신이 재란 누나의 달콤한 입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상대방이 먹던 음식을 조금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재란 누나가 먹던 그 어떤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봐서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 재란 누나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가슴이 저려왔다. 그러나 재란 누나의 마음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호승아, 나는 원래 오징어 다리를 좋아해. 다른 사람은 몸통을 좋아하지만 난 몸통은 싫다"하는 재란 누나의 말이 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막연하지만 그 일을 통해 내란 누나가 나를 마냥 사촌 동생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 느낌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런 행동을 한 재란 누나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낸 들뜬 마음이 거의 가라앉은 그날, 나는 유리창을 닫고 창가에 앉아 '젊은 마르크스의 시'라는 시집을 읽고 있었다. 그 시집은 막 의과대학생이 된 호용 형의 책상에 꽂혀있던 시집으로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가 대학시절에 그의 애인이었던 예니에게 띄웠던 사랑의 서정시들을 모은 것이었다.그 시들 중에서 나는 마침 ' 두 개의 별'이라는 제목의 시를 일고 있었다.
별이 둘 하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까워지려다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언젠가는 하나가 되자고 빛의 날개를 펴지만
맺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둘은 서로를 거부합니다
예니여,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가라, 세상의 것들을 꿰뚫고 나의 생각과 슬픔이여 가라, 그대 가슴속으로
그때 창밖에 연붉은 스웨터를 입은 재란 누나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시집을 덮고 제란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재란 누나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책 읽노?' 창이 닫혀 있어 무슨 말인지는 잘 들이지 않았으나 재란 누나의 입모양으로 봐서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시집 읽는다.' 나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말을 했다. '재미있나?' '응, 재미있다.' '니가 시를 다 읽어?' '와? 내가 시 읽을면 안되나? 학교에서 내가 문예반인 줄 모르나?' '안다. 내 좀 빌려 줄래?' '그래'
우리는 마치 구화를 하듯이 그런 식의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자 재란 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선뜻 유리창 가까이 다가왔다. 재란 누나가 서 있던 자리엔 감나무 이파리 몇 개가 땅에 얼어붙어 있었다. 재란 누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내 책상 위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시집이고?' '마르크스.' 나는 일고 있던 시집 표지를 펴서 재란 누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재란 누나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공산주의자가 시를 다 썼나?' '그래, 다들 사랑을 노래한 시라 카더라.'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대화를 계속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입술 모양만 보아도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가 재란 누나의 얼굴이 유리창에 너무 가까이 닿아 일그러졌다. 코와 입술이 찌그러들었다. 우스웠다. 내가 막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얼굴을 유리창에 갖다대었다. 재란 누나가 창밖에서 찌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재란 누나가 갑자기 유리창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있는, 일부러 흉하게 일그러뜨린 입술이 아니었다. 살짝 눈을 감고 뭔가 내 입술을 기다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내 가슴속에서는 바윗돌 하나가 쿵! 하고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런 재란 누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재란 누나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재란 누나는 창밖에 있었고, 나는 창 안에 있었다. 재란 누나와 내 입술 사이에는 유리창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동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했다. 정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한없이 쿵쾅대었다. 비록 유리창을 사이에 둔 키스였지만 재란 누나의 부드러운 입술 감각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후,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후다닥 놀란 표정을 하고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서로 꼄연쩍은 듯이 웃음을 나누었다.
'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두 사람 중 누구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재란 누나의 얼굴이 감홍시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자하고 해 본 첫키스였다. 그후 나는 재란 누나와 키스할 때 창문을 열고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의 최초의 키스가 유리창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세월이 지나서 재란 누나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김포공항에서 이별할 때 재란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울었다. 왜 유독 나만 보고 울었는지 그때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재란 누나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다시 첫 키스를 하고 싶다. 그러나 누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서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에게 첫 키스만 남긴 채.
정호승 - 195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고, 소월 시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