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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
월간 말 10월호 포토에세이
- 누구도 가라하지 않은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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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세걸음 걷고 오체투지를 하며 한 시간에 채 500m도 못가는 길, 승용차로 3~4분이면 갈 거리를 하루 종일 기어서 가는 길.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가는 이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가는 이들이 있다.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느리게, 가장 고통스럽게 너무나 먼 길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지리산 노고단(하악단)에서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까지, 다시 계룡산에서 임진각을 지나 묘향산 상악단까지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묻고 또 물으며 마침내 온몸을 던지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순례 길을 떠납니다. 다리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입니다. 오체투지, 이 여정은 손에 가슴에 생활 속에 촛불을 피워 올린 청소년들과 수많은 국민들께 드리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
새만금 해창 갯벌의 한 마리 갯지렁이의 자세로, 지리산 자벌레의 자세로 뜨거운 아스팔트 길 위에서 참회하며 대성통곡의 기도를 하는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
그 누구도 이 험한 길을 가라하지 않았다. 노구의 몸, 병든 몸으로 마침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고행의 길을 그 누구도 가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 누구도 만류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미 한반도 대운하 백지화를 위한 103일간의‘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종교인 순례 도중에 목숨을 건‘도원결의’를 했다. 대운하라는 유령이 한반도의 하늘을 뒤덮는 순간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촛불 문화제의 대국민적 저항을 좌우 이념의 낡은 공안정국으로 몰아붙이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던 남북관계를 다시 긴장과 갈등 구조로 몰아가는 등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벌써 예감하고 또 절감한 것이다.
그러나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참회와 간절한 기도뿐. 예로부터 조상들은 국난이 닥쳤을 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늘에 제를 올리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촛불, 광장의 촛불 이제 산에 오릅니다. 한반도의 어머니 산들이시여! 부디 우리의 흰 그늘을 받아주시옵소서.”
9월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고제를 올리며 시작된 오체투지는 기어코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말았다. 가까이서 지켜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눈길을 돌려 외면해도 눈물이 흘렀다. 그저 앞길의 돌이나 치워줄 수밖에.
지리산 성삼재와 시암재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 열흘 만에 겨우 전남 구례지역을 벗어나 전북 남원으로 접어들었다. 예정으로는 11월1일 계룡산 중악단 도착이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예정일뿐이다.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암담할 뿐.
그러나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느리게, 가장 고통스럽게 너무나 먼 길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 두 성직자의 고행 길에 매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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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 문규현 신부가 주먹밥을 먹는 모습을 찍는 기자를 발견하곤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다.(사진 위) 문정현 신부가 동생 문규현 신부의 고행길을 함께 하며 모든 것을 영상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사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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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지리산 노고단 낭송시
역주행 한반도여 대체 어디로 가는가
먼 길을 가다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뺨을 때렸다
지금 여기는 어디, 대체 어디로 가시는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길을 물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묻고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묻고 또 물을 뿐인데
촛불을 든 어린 소녀들에게
유모차를 모는 아직 젊은 어머니들에게
마구 물대포를 쏘고
마녀사냥 하듯이 주홍글씨를 새겼다
먼 나라 어제의 일이 아닌
2008년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일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며 절대 아니라며
다시 길을 묻는 이 땅의 지고지순한 백성들 앞에
또 하나의 38선, 소통불능의 ‘명박산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역주행의 한반도는
대륙이 아니라 반도가 아니라
갈가리 찢겨진 섬이 되었다
이미 38선으로 몸통이 잘린 남쪽의 섬, 북쪽의 섬,
청와대의 섬, 국회의 섬, 강부자 고소영의 섬,
미군부대의 섬, 자본의 섬, 영남의 섬, 호남의 섬,
정규직의 섬, 비정규직의 섬, 실업자의 섬, 농민의 섬,
도처에 38선이 들어선 국적 불명 고립의 섬,
저마다 하나씩의 불안한 독도가 되어 떠돌고 있다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조각조각 퍼즐 맞추기도 어려운,
공중분해 혹은 침몰 직전의 섬들이 되고 말았다
역주행의 한반도여 어디로 가는가
정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치고
경제의 이름으로 민생을 파탄시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능멸하는 역주행의 운전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국회 안에 정치와 정치인이 있느냐?
청와대 안에 정녕 대통령이 있느냐?
도대체 누구의 정치인이며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대통령이냐?
건국 60년,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세 치 혓바닥으로 자충수를 두지 마라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조국과 모국어의 안부를 묻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고지순한 백성들에겐
광복이 되자마자 암흑의 분단 반세기
그 모두가 잃어버린 60년과 빼앗긴 오늘이 있을 뿐
- 땡볕으로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참회하며 대성통곡의 기도를 하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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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 수경스님이 두 눈을 감고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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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 문규현 신부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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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그리하여
목숨을 걸고 다시 길을 묻는 이들이 있으니
대체 이를 어찌하랴
지리산 하악단에서 계룡산 중악단을 바라보며
마고할미에게 한반도의 운명을 물어보고
다시 묘향산 상악단을 향하여
좌심방 우심실 뜨거운 심장의 안부를 물으며
역주행의 불도저 앞에 온몸을 던져
마침내 브레이크를 거는 이들이 있으니
대체 이를 어찌하랴, 어찌 만류할 수 있으랴
이미 공동묘지가 된 새만금
해창 갯벌의 한 마리 갯지렁이의 낮은 자세로
지리산 자벌레의 처절한 참회의 자세로
사람의 길을 묻고 또 물으며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열고 또 열며
마침내 오체투지의 머나먼 길을 나서고 있으니
마고할미시여, 마고할미시여!
어찌 이 광풍의 땅에 눈물이 없다 하랴
어찌 이 오욕의 땅에 의로운 사람이 없다 하랴
그러나 오늘도 역주행하는 한반도여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시절이 왔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물을 뿐인데
다짜고짜 곤봉으로 뒤통수를 후려치고 물대포를 쏘는
아주 오래된 과거가 돌아왔다
눈물의 값은 외상이 없다 피의 값은 외상이 없다
- ©월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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