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이방인의 애국심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은 1872 년 영국의 프린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의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지에 근무하는 기자였는데 1904 년 노, 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게 됐습니다. 베델은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질고 순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취재가 끝났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선에 머물게 됐습니다. 그는 먼저 이름을 조선식 이름인 '배설'로 고치고, 1905 년 한, 영 합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70 평생을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온 양기탁은 일본의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낼 수 있는 외국인을 찾던 중 베델을 만나 신문을 만들 것을 권유했습니다. 베델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고, 양기탁은 총무 겸 주필을 맡았습니다. 대한일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철저히 일본에 반대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글을 실음으로써 국민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애국심을 일깨웠습니다. 또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고종의 친서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어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원수들에게 전달하여 일본의 강압적 침략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눈엣가시 같은 베델을 본국인 영국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1908 년 베델도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외국인이 방해했다는 이유로 영국 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3주 동안 묶여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서울에 다시 돌아온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같은 영국인 '말함'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1909 년 9월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병을 얻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
그의 시신은 평소 그를 도운 장지연, 양기탁, 정대유, 박용규 등 독립지사들의 손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훌륭하게 사는 자가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이란 햇수와 날수와 시간수로 헤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르타의 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