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Une Vie:1883) - 모파상 (1/2)
해설
이 작품은 주제와 묘사법에 있어서 모파상의 대표적인 장편이다. 꿈과 희망에 부풀던 한 소녀의 학대와 절망에 얽힌 삶이 작가가 자라난 노르망디의 절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절묘한 필치로 묘사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허무 염세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심연에서 느끼는 슬픔과 체념을 깨닫게 한다. "여자의 일생"은 출판되자마자 단번에 2만 5천 부가 매진되었으며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까닭은 모파상이 자연주의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잔의 암담한 회색으로 물든 인생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꿈 많은 처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 여인이 걸은 길은 결국 근대 생활에 대한 가혹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증오하고 조소할 만한 사실 이외에 깊이 공감할 만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문단의 자연주의 경향은 심하게 부정되었던 인간애를 가치 있는 인간성으로 취급하였다. 여러 가지 예술적 경향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는 톨스토이도 이 작품만은 높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모파상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후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독일의 세계적인 철학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저서에서 독일의 문학자들을 악평한 후 프랑스의 문학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모파상을 그 중 뛰어난 천재로 손꼽히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낭만적인 희망에 들뜬 순진한 귀족 아가씨가 있다. 그녀는 냉혹 무정한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자식에게도 배신당한다. 꿈결 같이 짧은 한때의 신혼 여행을 마지막으로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희망을 빼앗고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다. 왜 그럴까? 이 의문을 내놓은 작가는 스스로 아무런 해답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주인공의 생애를 더럽힌 남자에 대한 비난은 소설 전편을 통하여 충분한 해답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결론은 염세주의에 대한 하나의 항의로 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작가 약전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 리엡 근처의 투르빌 쉬르 아르크, 밀로메니르의 성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구스타브는 네덜란드 귀족이었고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니 로르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양친이 별거하는 동안 모파상은 어머니 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루앙코르네이유 중학교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 중학교 졸업 후 파리에 나가서 약 10년 간 해군성 문부성에 근무했는데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어머니는 모파상의 재능을 믿고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플로베르에게 문학 지도를 부탁했다. 그는 플로베르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모든 문학 수업을 쌓았다. 그가 처음 소설을 발표하기까지 20편이나 플로베르의 엄격한 수중에 보류되었다고 한다. 1880년 그가 30세 때 에밀 졸라가 주재하던 '메당의 저녁'에 "비계덩어리"가발표되자 큰 호응을 얻고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 그 해에 처녀 시집을 내고 이어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다. 1880년부터 1891년에 걸쳐서 쓴 단편 소설의 수는 약 300편에 달한다. 이 밖에 6권의 장편 소설 3권의 기행문 1권의 희곡이 있다. 생전에 출판된 단편집의 수는 15권이었는데 현재는 18권이고 그 중의 2권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단편집은 미국, 독일, 일본 등의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다. 세계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러시아의 체호프, 그리고 프랑스의 모파상이다. 1892년 1월 2일 밤 모파상은 돌연 목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파시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듬해 7월 6일에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서지 못한 채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몽파르나스의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줄거리
잔은 짐을 꾸리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원을 갓 나온 잔은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처럼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인생의 온갖 행복을 막 손에 넣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날씨가 개지 않으면 부친이 출발을 망설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염려스러워 아침부터 여러 번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잔은 열두 살까지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미래 설계에 의해 모친의 눈물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을 속세와 격리시켜서 남의 눈에 뛰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게 해 놓았다. 열 일곱 살이 되면 순결한 채로 자기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모친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소 일종의 올바른 시의 목욕통 속에 딸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들을 걸어 다니고 기름진 대지의 한복판에 소박한 사랑의 모습과 동물의 단순한 애정 생의 청량한 법칙을 보여 주고 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넋을 열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이제 잔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것이다. 환하게 낯을 반짝이고 생기와 행복에 차서 한가한 낮 긴 밤 가지가지의 희망만이 떠오르는 고독 속에서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떠돌아다니던 온갖 기쁨과 즐거운 가지가지의 우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한여름을 이포르 근처의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선조 대대의 옛 성관인 레페플의 저택에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무한한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저택은 그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었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곳에서 영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순간 전날 밤부터 쉴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는 그 여자의 생애에서 최초의 큰 슬픔이었다. 남작 부인은
몇 해 전부터 심장 비대증으로 부쩍 뚱뚱해져서 늘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숨을 몹시 헐떡거리면서 낡은 호텔의 정면 층계까지 오자 빗물이 내처럼 넘쳐흐르는 앞뜰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제 정신은 아니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임자가 그러자고 한 거요. 아델라이드 부인"
부인이 아델라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다소 놀려대는 듯한 경의를 표해서 언제나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발 속에서 두 필의 말 엉덩이에서는 온통 젖어 김이 나고 있었다. 잔은 아름다웠다. 장미빛을 띤 살결에는 우단 같은 솜털이 나고 금발 머리는 광채를 내며 물결치고 있었다. 눈은 도자기처럼 푸르고 날씬한 키에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는 환희의 물결이 되어 사방에 퍼졌다. 줄리앙 라마르
자작은 레페플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으나 모든 여성에게는 이상적인완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가 건강한 이마를 덮고 두터운 눈썹은 거무스레한 눈을 그윽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짙고 긴 속눈썹은 그 시선에 여자들의 가슴을 뒤 흔들어 놓은 정열적인 빛을 드리우게 했다. 아베 피코 사제의 소개로 알게 된 자작은 바로 이틀 후에 레페플로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남작댁의 만찬에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심장 비대증 때문에 언제나 잔심부름꾼
로잘리의 팔에 매달려 걷는 아델라이드 부인은 자작을 보면 항상 그 팔을 끼고 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은 잔을 향해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과 눈은 무엇엔가에 끌리듯이 마주치곤 했다. 라마르 자작과 함께 남작과 잔이 에트르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배가 둑에 가까워지자 남작이 맨 먼저 뛰어내려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자작은 잔이 발을 적시지 않도록 두 팔로 안아서 내려 주었다. 그 짧은 포옹에 흥분한 가운데 두 사람이 해안의 자갈길을 올라가노라니 뜻밖에도 고기잡이 라스티크 아저씨가 남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바로 이 사람이 점찍은 대로야 잘 맞는 귀여운 부부고 말고"
그 날 밤 잔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낸 주신 사람 내 생애를 바칠 사람일까? 그와 나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되고 떨어질 수 없이 한데 어울려져 그러다 사랑을 낳을 사이일까? 잔은 사랑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작 옆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데보 남작이 외딸인 잔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발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르 자작이 우리에게 청혼을 해 왔다"
잔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아무튼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해 뒀지 네가 저쪽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한평생의 행복이란 돈 문제가 아니거든 자작 형편으로서는 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나 나나 그 남자가 맘에 든단다. 그렇지만 네가 어떨른지?"
잔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푸른 눈 속을 들여다 보며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데보 남작은 워낙 귀족 태생이어서 혁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의지가 약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결점이기도 했다. 남작이 잔을 위해서 새로 만들게 한 배의 기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자작은 몰라볼 만큼 훌륭한 복장을 차리고 왔다. 몸에 착 붙은 프록 코트에 가슴에는 레이스 장식이 보이고 에나멜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은 참으로 당당한 귀족이었다. 로잘리까지도 황홀한 듯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
부부와 젊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해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꽃다발로 장식한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돛과 줄에 매달아 놓은 기다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를 부른 뒤 사제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았다. 잔은 자작이 자기 손에 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리고 차츰 세게 잔의 손을 죄어 왔다. 자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잔은 당신만 좋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약혼식이 되는 겁니다"
잔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배에 성수를 뿌리고 있던 사제는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도 성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짧은 약혼 기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하고 코르시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결혼 첫날 밤 무참히도 무너져 버린 환멸 속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망한 잔의 푸념은 그 후로도 내내 몸에 붙어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이것이, 그래, 그이가 말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구나? 이것이! 아니 이것이!"
남편 줄리앙은 호텔 주인이나 하인 마차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상인들을 상대로 항상 다투었다. 그리고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게 되면 손을 비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둑맞는 게 싫단 말이야"
계산서가 올 때마다 잔은 몸서리나는 것을 느꼈다. 일일이 말썽을 부리면서 에누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귀밑까지 화끈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점심을 마치고 나면 줄리앙은 잔을 껴안고 귓전에 속삭였다.
"어때, 잠깐 쉬지 않겠어?"
"난, 지금 별로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잔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잔은 경멸하다시피 남편을 쳐다보았다. 잔은 줄리앙을 외면하였다.
"호텔 것들이 뭐라던 그까짓 것 문제삼지 않아"
줄리앙에게는 수치심이라는 섬세한 신경이 전혀 없었다. 잔은 두 인간이 진정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융합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은 또한 남편의 그 부단한 욕망에서 무언지 야수적인 심한 오욕 이외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의 여성으로서의 감각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것이다. 그런데 코르시카 깊숙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따가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샘터로 나섰다. 융단을 빽빽하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 위에 무릎을
꿇은 잔이 물의 싸늘한 맛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통 끝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채려 했다. 잔은 한사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며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실낱 같은 물줄기가 꺼졌다가 맞히곤 하면서 얼굴과 목과 옷, 손에 물이 튀고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그러다가 뜨거운 키스 시간이 물줄기와 함께 흘렀다. 잔은 갑자기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사랑의 영감을 느꼈다. 심장은 뛰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이 눈물에 젖은 잔은 나직이 남편에게 속삭였다.
"줄리앙!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으면서 빨갛게 물든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이후의 여행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환희의 연속이었다. 잔의 눈에는 오직 줄리앙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찬란한 남국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노르망디는 벌써 가을이었다. 노르망디의 가을은 하염없이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은 몹시 지쳤다. 즐거운 추억에 넘치는 이 시골의 풍물이 자취도 없이 퇴색해 보였다. 춥고 습기 찬 나날이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움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어느새 아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기 역을 끝마친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 일에 마음을 쓰는 기색도 없고 모든 사랑의 흔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방을 찾아드는 밤도 드물어지고 그는 재산의 관리와 살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일꾼처럼 차리고 있어 약혼 시절의 고상한 태도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겨울이 닥쳐 왔다. 잔의 양친은 정초에 루앙으로 옮겨 갔다. 줄리앙은 극도로 인색한 본성을 나타내어 하인들의 식량에 이르기까지 엄밀히 제한을 했다. 잔이 매일 아침 빵집에 주문하던 가레트를 금하고 보통 빵으로 바꿨다. 잔은 말다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바늘 끝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줄리앙은 하인들 급료나 그 밖의 어떠한 지출에서 얼마씩 돈을 뗄 때마다 그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싱글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거든 "
쾌활하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던 로잘리도 달라졌다. 새빨갛던 두 볼이 혈색을 잃고 거북한 듯이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고서 "너, 어디 아프니?" 하고 잔이 물으면 으레, "아녜요. 부인"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로잘리는 노르망디 태생으로 잔의 젖동생이기 때문에 다른 하인들과는 좀달리 대우받고 있었다. 정월도 다 갈 무렵에 눈이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들 전체가 눈에 덮이고 모든 나무는 다 얼어 붙었다. 어느 날, 점점 더 변화가 심해진 로잘리가 몹시 대견스럽게 잠자리를 보고
있는 동안 잔은 난로 옆에서 발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무척 괴로운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니?"
잔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녜요. 부인"
로잘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한 신음 소리로 변했다. 잔은 겁이 났다. 창백한 얼굴, 핏기 어린 흐릿한 눈, 로잘리는 두 다리를 뻗고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니, 로잘리 웬일야?"
로잘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미칠 것 같은 눈으로 잔을 쳐다보며 무서운 고통에 찢기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을 주고는 이를 깨물고 비명을 죽이면서 뒤로 미끄러져 굴렀다. 그러자 아래 옷으로 무엇인지 움직여 보였다. 곧 거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목을 눌러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제 아기 울음 소리로 변했다. 가냘프고 고뇌에 찬 호소의 소리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얼굴을 내놓은 인간의 최초의 호소였다. 줄리앙은 몹시 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저 계집애를 어떻게 할 셈이야? 애비 없는 자식 따위를 집에 둘 순 없어"
"그렇지만 여보, 어디, 맡기기라도 하면..."
"돈은 누가 치르고? 당신이 ?"
"그야 애 아버지가 내겠지요. 그 사람이 로잘리와 결혼하면 되잖아요?"
"애비라고?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나? 알 까닭이 없지"
"하지만 저 애를 저대로 내버려둘 순 없어요. 그건 비겁하잖아요? 이름을 물어 봐서 내가 그 남자를 만나겠어요"
"흥 남자 이름을 대줄 게 뭐야 그리고 만일 사내가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애비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있는 저런 여자를 그냥 여기 두어서는 안 돼. 얼마쯤 돈을 줘서 내쫓아야 해"
잔은 단호히 반대했다.
"안 돼요. 그것만은 안 돼요. 저 애는 내 젖동생이에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걸요. 우리집에서 쫓아 내다니, 안 될 말이에요. 정 그렇다면 내가 애를 키우지"
줄리앙은 빨끈해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쳤나?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는 노발대발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날 오후 잔은 산파 집을 찾아 나갔다. 로잘리는 잔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담요 밑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잔이 키스하려 할 때 절망적으로 온 몸을 떨며 로잘리는 얼굴을 피하며 거절했다. 잔은 어린애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한편 줄리앙은 아내에게 거의 말 한 마디 없이 지냈다. 이 주일 후에 로잘리는 일어나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잔은 어느 날 아침 로잘리의 두 손을 꼭 쥐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 로잘리, 바른 대로 얘기해 줘. 저 앤 누구 애지?"
로잘리는 또 다시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혀 주인의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손은 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이 추운 밤이었다. 잔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심장은 쿵쿵 울리다가 가끔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별안간 두려움에 잔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로잘리를 부르는 종을 눌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잘리는 오지 않았다. 잔은 정신 없이 맨발로 계단 쪽으로 뛰어가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갔다. 겨우 문을 찾아서 열었다.
"로잘리!"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부딪쳤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보니 잠자리는 비어 있었다. 싸늘한 채였다. 당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잔은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면서 계단을 내려와 줄리앙을 깨우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꺼져가는 난로 불빛에 잔의 눈에 비친 것은 남편의 머리와 나란히 베개 위에 얹힌 로잘리의 머리였다. 잔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잔은 우뚝 멈췄다. 그러나 금새 돌아서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다급하게 잔을 부르는 줄리앙의 소리가 울렸다. 잔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의 거짓말을 듣기가 죽기보다도 무서웠다. 잔은 도망쳐 버리고 싶은 격한 생각에 사로잡혀 속옷 바람으로 집을 나섰다.무릎까지 올라오는 눈 속을 절망적으로 달려 갔다. 오랜 실신 상태에서 깨어나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자신으로 돌아간 잔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데 따라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루앙에서 달려온 남작 부부에게 잔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노기에 불타는 남작은 당장 줄리앙에게로
뛰어가서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줄리앙은 신에게 맹세하면서 부인했다.
"대관절 무슨 증거가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잔은 열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겁니다"
줄리앙은 오히려 격렬하게 화를 내며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잔은 남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잔은 로잘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으나 남작이 그것을 거절했다. 마음이 산란할 때에 의사가 들어왔다. 잔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로잘리를 만나겠다고 계속 반복했다.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시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 임신 중이니까요"
잔의 손을 잡고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멍한 표정으로 잔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뱃속에 애가 살고 있다. 그것이 줄리앙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잔은 마침내 사제를 오게 하고 그 자리에 로잘리도 나오게 했다. 남작에게 떼밀려 로잘리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잔은 홑이불처럼 창백해져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내가 느닷없이 방에 들어갔을 때 줄리앙의 잠자리에 있었던 건 너지? 로잘리!"
"네, 부인"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처음 여기서 식사를 하시던 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다락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럼 네 아인... 그 사람 거야?"
"네, 부인"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언제부터 또 시작했니?"
"오시던 그 날 밤부터..."
말 한마디한마디가 잔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맥이 풀리고 무한한 절망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그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나가, 어서 나가!"
잔은 소리쳤다. 남작이 다시 로잘리의 어깨를 붙들고 문에서 끌고 나가 짐짝처럼 마루에 떼밀어 버렸다. 남작이 얼굴이 파래져서 자리로 돌아오자 사제가 말했다.
"참 야단입니다. 이 고장의 여자들이 다 저 모양이거든요"
"아니, 용서 못할 인간은 줄리앙이죠. 더러운 녀석! 제 딸을 데리고 가겠어요"
"좀 참으십시오, 남작님. 그도 그저 예사로운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남작님 자신만 하더라도 생각해 보시면 아실 텐데요. 하하하..."
남작은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울고 있던 잔의 얼굴에는 미소의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제는 좋은 기회라는 듯이 말했다.
"부인 항상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인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신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큰 행복으로 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부인은 장차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애가 부인의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잔 부인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봐서도 줄리앙 씨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어린애는 두 분 사이를 맺은 인연의 실마리니까요"
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작은 2만 프랑에 상당하는 농장을 붙여서 사제의 주선으로 다른 남자와 로잘리를 결혼시켰다. 줄리앙은 펄펄 뛰며 아내가 상속받아야 할 재산이라고 주장했으나 남작도 잔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은 모든 것을 체념한 가운데 임신 기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7월 말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무서운 고통 끝에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있던 잔은 갓난아이의 가냘픈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환희의 섬광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는 잔의 열광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남작 부부도 좋아서 야단이었으나 이기적인 줄리앙은 자신의 지배적인 권위를 침범하는 어린애의 존재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줄리앙은 얼마 전부터 근처에 사는 푸르빌 백작 집에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얼굴이 희고 깊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백작은 벌건 턱수염을 기다랗게 기르고 거선처럼 거대한 남자로 사냥에 미친 사람이었다. 잔은 남편을 따라 이 부부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루이 13세 양식인 굉장한 저택은 계곡의 경사진 곳에 있었고 한쪽 돌담이 전부 커다란 연못 속에 들어 있었다. 돌층계 아래에는 배가 네 척 매달려
있었다. 백작은 그 못에서 오리를 잡기도 하고 고기를 낚기도 했다. 잔은, 거칠기는 하지만 호인인 이 곰 같은 거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백작은 레페플에 오면 잔의 손에서 폴을 받아 안고, 털이 난 큼직한 손으로 어린애를 잘 다루었다. 수염 끝으로 어린애 코를 간지럽히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편 줄리앙은 햑혼 시절처럼 말쑥하고 단정하며 매혹적인 미남이 되었다. 그 눈에는 다시 애무하는 듯한 빛이 돌았다. 3월이 되자 질베르트 백작 부인의 제안으로 넷이서
가끔 먼 곳까지 승마를 했다. 백작 부인과 줄리앙이 앞서고 잔은 백작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속삭이다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어대기도 하고 의미 심장한 눈초리로 은근히 서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채찍질을 하고 달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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