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1/2
해설
하디는 영국 소설계에서 조지 메러디스(George Meredith, 1828-1909)와 더불어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 8권의 시집(918편의 시 수록)과 2편의 서사극시를 남겼으며 하디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테스"로 이름을 떨쳤다. "테스"가 많은 애독자를 가지게 된 까닭은 인생의 비극적인 실상을 직시하는 하디의 페시미즘 사상이 불안과 동요의 도가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의 시류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영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기장 즐겨 읽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테스"가 발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를 잠깐 살펴보자 이 때는 치기와 위선의 시대였다. 민주적 경향과 과학 정신으로 조성된 물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속물주의와 체면주의가 판을 치던 속된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는 윤리관이나 도덕관이 지극히 편협해지기 마련이어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하디는 편협한 윤리 도덕관에 반기를 들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윤리 도덕 정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디는 "테스"에서 두 개의 순결성을 보여 준다. 나아가 육체의 순결성보다 정신의 순결성을 위에 두고 있다. 테스가 알렉에게 빼앗긴 육체의 정조는 한낱 외형의 순결성을 상실했기 따름이지 본연의 순결성은 여전히 테스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기본 골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결국은 알렉 살해의 책임은 테스를 둘러싼 환경의 편협함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다. 테스가 놓여 있는 환경이란 야수적인 알렉과 이기적이고 결벽증인 에인젤의 횡포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테스의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테스의 불행은 스스로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의 희생자인 것이다. 하디는 인생을 하나의 비극으로 인식한다. 우주에는 인간사에 무심한 맹목적 대의지가 있고, 지상의 인격들 제각기의 소의지가 있다. 인간의 소의지는 우주의 대의지에 휩쓸려 결국 자멸이란 비극을 치르게 마련이라는 것이 하디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즈는 "테스"에 대하여 인습적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을 서리게 하여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평했다. 시인 윌리엄 윗슨 경(Sir William Wastson)은 테스는 인간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의 폭을 항상 넓혀 준다고 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평론가는 조지엘리가 별세한 뒤의 최고 역량의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스"는 출판된 지 3년 만에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전문적인 연구 서적과 논문도 많이 발표되었다. 또한 영화와 연극으로 상연되었다.
작가 약전
하디는 1840년 6월2일 영국 남부 지방 웨섹스의 중심지 도셋의 하디북햄프턴이란 삼림 지대와 황무지 사이의 두메 초가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산된 순간 사산인 줄 알고 한구석에 내버렸던 것을 이웃의 거들던 아낙네가 의사에게 "죽다니요! 가만 계세요 꼭 숨을 쉴 테니!"하고 외치는 바람에 다행히 소생했다. 7, 8세 때에 친구들은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까 하며 신나게 이야기했지만 하디는 어른이 되고 싶지도, 무엇을 갖고 싶지도 않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야심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디를 목사로 만들고자 했으나 하디가 원하지 않으므로 건축가로 출세시키려 했다. 18세 때에는 도체스터의 교회 건축가 조힉스의 제자가 되어 5년 동안 건축에 관한 경험을 쌓는 한편 친구의 지도를 받아 고전 중에서도 특히 희랍 비극과 영문학을 탐독하여 차츰 글을 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일리아드를 읽고 낮에는 건축 일에 시달리고 일이 끝나면 바이올린을 들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바빴다. 21세 때는 당대 굴지의 건축가인 부룸 후일드의 조수로 런던으로 오게 되어 10년간 과학적 사회적 문학적 사조를 접하였다. 1865년에 시를 쓰기 시작 이듬해 잡지상에 투고했으나 반환되는 바람에 시작의 붓을 꺾고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865년에 "내가 집을 지은 이야기"라는 단편을 발표했으며 1871년 "궁여지책", 1872년 "푸른 숲 그늘에서", 1873년 "푸른 눈동자"를 각각 발표했고 1874년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874년 엠마 라비니아 깁후드 양과 결혼했다. 1878년 하디의 4대 걸작의 하나인 "귀향"을 발표 그 후 "케스터브리지 시장", "웨섹스 이야기", "귀부인들", "테스", "아내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였다. "테스"가 간행되자 에인젤과 같은 과거가 있는 아내를 가진 남편들로부터 그리고 테스와 같은 과거를 지닌 아내들로부터 하디에게 많은 서신이 쇄도하였다. 1928년 1월11일 88세로 세상을 떠날 떄까지 1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과 8권의 시집과 2편의 서사극시를 냈다. 생전에 이미 그의 문학적 공헌이 인정되어 애버딘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70세에는 국왕으로부터 유공 훈장을 받았다.
줄거리
5월 어느 날, 저녁 세스톤에서 블랙모어의 말로트 마을로 한 중년의 사나이가 길을 가고 있다. 사나이는 두 다리를 비척거리며 똑바로 걷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로 지금은 무식하고 가난하여 그 자신이 더버빌 가의 피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술에 취해 집으로 향했다. 그는 옆구리에 빈 달걀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귀족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나 집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목사로부터 그가 몰락한 귀족의 자제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말로트 마을은 아름다운 분지의 동북쪽에 파도처럼 굽이친 산줄기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고장이다. 런던은 네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아직도 유람객들이나 풍경화가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고장이었다. 이 지방은 지형상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매우 흥미 깊은 곳이었다. 헨리 3세 시기의 기묘한 전설 때문에 이곳 분지는 일찌기 '휜 사슴의 숲'이라 불리웠다. 지금도 얼마간 옛 풍습이 남아 있는데 5월의 무도회 같은 것이 그 한 예였다. 이 무도회는 여자들의 친목 모임으로서 수백 년 전부터 해마다 같은 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5월은 기쁨의 계절이라고 하여 회원들은 하나같이 흰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저마다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한아름 흰 꽃을 들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행진을 했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면 곧 춤놀이가 시작되는데 회원은 여자들 뿐이므로 여자들끼리 춤을 추었다. 그러나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마을 사나이들이며 도보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춤을 추는 향연이 벌어졌다. 그 날도 역시 이 마을에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어깨에 작은 바랑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상류 계층의 젊은이 셋이 여인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지간이었다. 맏이는 흰 넥타이에다 목까지 닿는 조끼와 좁다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쓴 부목사의 정복 차림이었고 둘째,는 보통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셋째는 얼른 보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 삼형제는 성령 강림절 휴가를 이용하여 도보 여행 중으로 동북쪽에 있는 세스톤 마을을 떠나 서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형은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나 셋째는 남자 상대자 없이 여자들끼리 춤을 추고 있는 광경에 흥미가 끌렸다. 그는 이윽고 바랑과 지팡이를 생울타리 위에다 걸어 놓고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두 형은 에인젤에게 곧 뒤따라오도록 당부를 하고는 먼저 떠났다. 여자들은 에인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하였고 에인젤에 뒤이어 마을 청년들도 일을 끝마치고 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과 함께 춤추는 아가씨와 아낙네들은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가 춤 한 곡을 끝내고 나올 때 수줍은 표정의 어여쁜 처녀가 눈에 띄었다. 테스 더버빌이었다. 처녀의 큼직한 눈동자는 자기를 택해 주지 않은 에인젤에게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형들의 뒤를 따라야 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테스는 언덕 위로 사라져 가는 젊은이가 저녁 햇살 속에 모습을 감출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테스는 감정이 드러나기 쉬운 작약과 같이 어여쁜 입술과 순진한 매력이 넘쳐 흐르는 커다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머리에는 리본을 달고 단 한 벌의 외출복인 린네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골 학교를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초한 처녀였다.
향연은 끝나고 다시 살기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몰락한 귀족 신분이 가난하기만 한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테스의 부모는 허황한 공상을 하였다. 테스는 많은 동생과 어머니가 좀더 편히 살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돈 되는 일을 찾아 나섰다. 테스는 귀족의 혈통이므로 신사에게 시집을 가서 편히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공상을 무시하고 어려워져 가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얼마 후 집을 떠나 양계장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테스는 그 집의 관리인이요, 사료 조달인이요, 간호인이요, 외과 의사요, 친구가 되어야 했다. 아직 육십이 안 된 여주인인 알렉의 어머니와 하녀의 틈에서 테스는 모든 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닭을 기르는 데는 휘파람도 잘 불어야 했다. 도착한 이튿날은 오랫동안 안 불었던 휘파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안뜰의 담장의 가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꼭대기에서 한량꾼인 알렉 더버빌이 테스를 엿보다가 담장에서 뛰어 내렸다. 알렉은 그 전날 테스가 살고 있는 오두막의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자연 속에도 예술 속에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어 내 사촌 누이 테스!"
그리고 그는 휘파람 연습을 시켜 주겠다고 하며 계속 추근거렸다. 테스는 웬지 이 사람이 싫었다
"싫어요"
"바보. 누가 저를 만지기라도 한데나?"
알렉은 이 집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자기에게 얘기하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이 트란트리지 일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지루하며 단조로운 마을에서 힘겨운 일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여자들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으레 2,3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볼품없는 장터 체이조바라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 놀다 이튿날 새벽 한두 시 경에야 돌아왔다. 테스는 처음 매주마다. 한 번씩 있는 이 행차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의 휴식을 위해 자기와 별로 나이 차이가 없는 동네 부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 주일 내내 갑갑한 양계장 일에서 나와 보니 자기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 후로도 테스는 종종 동행하게 되었고 원래 미인이고 매력이 있는 데다 나이 열 일곱의 한창인 아가씨였기 때문에 사나이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끌었다. 한두 달이 지나고 명절과 장날이 겹친 9월 어느 토요일 트란트리지에서 놀러 나온 패들은 다른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트란트리지와 이곳은 워낙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밤 늦은 시간에 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테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이미 취기가 오른 알렉이 테스에게 손짓을 했다.
"테스, 난 오늘 말을 타고 왔으니 주막으로 와요. 마차를 불러 데려다 줄 테니"
테스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가겠노라면서 이를 거절했다. 열한 시가 훨씬 넘은 후에야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돌아가게 되고 테스도 그 안에 끼었다. 그날 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밤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녀들은 비틀거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테스는 이런 경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테스는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 때 동행자 중에 카아라는 여자가 물건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꿀이 쏟아져 머리카락에 붙어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모두가 이 모양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을 때 테스도 아무 생각없이 같이 웃고 말았다. 카아는 화를 내면서 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왜 날 비웃는 거야. 요 악마 같은 것"
카아는 알렉의 정부였다. 알렉이 요즘 테스에게 눈이 팔려 쫓아다닌다는 것을 시기한 카아는 공연히 테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가슴에 쌓였던 연적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듯이 갖은 욕을 퍼부어가며 대들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술에 취한 카아는 좀체로 진정하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때 말을 타고 달려오던 멋쟁이 알렉이 이 광경을 보고 테스 곁으로 가서 몸을 굽히며 말을 했다.
"그런 것 하고 싸울 필요 없어. 자, 내 말에 같이 타요"
테스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카아의 욕설을 듣자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가벼운 심술이 발동했던 것이다. 평상시 알렉을 경계했던 테스는 보란 듯이 알렉의 말 위에 올라탔다. 테스는 말을 타고 밤길을 알렉과 함께 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불안해졌다. 알렉은 유쾌하게 말을 몰면서 테스에게 말을 걸었다.
"왜 테스는 내가 키스하려고 하면 싫어하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건 싫은 일이지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말 내가 싫어?"
테스는 아무 말 없이 알렉의 등을 꼭 붙들고 있었다. 테스는 이 젊은 주인이 추근거리는 것이 몹시 싫었다. 지금도 말 위에서 알렉은 말을 걸었다. 골짜기에서 자욱이 드리웠던 안개는 차츰 사방으로 퍼져 두 사람을 감싸 버렸다.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아 활짝 갰을 때보다도 한결 더 골고루 빛을 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졸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길에서 트란트리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지가 꽤 오래 되었는 데도 사나이가 트란트리지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테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스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한 주일 동안 아침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온종일 서서 지냈고 더구나 이 날 저녁에는 체이조바라까지 3마일이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1마일의 길을 걸으면서 그 야단법석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기진 맥진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가까웠다. 피곤한 나머지 정신없이 잠든 순간 테스는 사내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알렉은 말을 세우고 등자에서 발을 빼어 안장 위에 옆으로 돌아앉아 테스를 부축할 양으로 허리에다 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테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불현 듯 치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알렉을 떠밀었다. 하마터면 사나이는 떨어질 뻔했다.
"이런 욕을 당하다니 내 꼴이 뭐야? 근 석 달 동안이나 남의 감정을 희롱하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골탕 먹이기가 일쑤니 이젠 참을 수가 없어!"
"전 내일 떠나겠어요"
"안 되지, 그러지 말고 내 팔에 안겨 줘. 자 어서. 당신과 나와 단 두 사람 뿐 아무도 없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테스는 안장 위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렉은 소원대로 테스를 두 팔로 껴안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체이조 숲의 한 귀퉁이야. 잉글랜드에서도 제일 오래된 숲이지. 밤도 아름답고 하니 좀더 오래 말을 타요"
"내려 주세요. 전 집까지 걸어가겠어요"
"내가 당신을 이런 외딴 곳으로 데리고 왔으니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당신을 집까지 무사히 보내 줄 책임이 있어 아무튼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내가 보고 올 테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 곁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다면 여기다 내려 주지"
그는 말고삐를 나무에 매놓고 낙엽을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그런데 이렇게 옷이 얇아서 춥겠군 그래"
알렉은 자기 코트를 벗어 테스의 어깨를 감싸고 단추를 끼워 준 다음 비탈로 올라갔다 달도 져서 푸른 빛마저 사라져 혼자 남아 낙엽 위에서 꿈길을 더듬는 테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테스는 힘없이 앉아서 쉬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알렉은 일부러 엉뚱한 길로 말을 몬 나머지 지금 그들이 접어든 곳이 체이조 숲의 어디쯤 되는지 분간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듬더듬 산마루를 넘어 낯익은 신작로를 발견하고 위치를 짐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테스와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알렉은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테스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테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엷은 비단결처럼 감촉이 부드럽고 티없는 눈과도 같이 새하얀 테스의 살은 알렉에게 더 없는 유혹이었다. 알렉은 테스를 이렇게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색색거리는 나른한 숨소리와 어렴풋한 테스의 얼굴 살내음은 알렉의 자제력을 몽땅 앗아갔다.
시월 그믐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체이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무서운 경험을 겪은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직 이른 아침 테스는 무거운 짐을 들고 더버빌의 양계장을 나왔다. 등 뒤의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인 빛은 테스의 눈 앞에 보이는 산마루를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테스는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부인은
"그래, 그러고도 넌 그 사람더러 결혼하자구 말을 안했단 말이냐? 그대로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오다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넌 버젓하게 그 사람에게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지 뭐냐?"
"어머니도 참, 결혼이라니요. 전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구..."
어머니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속 책망을 했다.
"여자란 건 그렇게 되고 나면, 어떠한 남자한테라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더구나 알렉 같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남자 치고 그만하면 훌륭하고 게다가 부자가 아니냔 말이다"
알렉 같은 남자의 성질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테스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테스는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에겐 그 남자를 사랑할 마음이 도무지 없었어요. 저쪽에선 여러 가지로 말해 왔지만"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정신을 차렸어야 할 게 아니냐?"
테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왜 진작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테스의 아름다운 큰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러나 이미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이제 처녀가 아니다. 비록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정조를 빼앗긴 여자였다. 테스에게 심신이 모두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그리고 불행을 안은 채 숙명의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테스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을 중오했으나 일단 태어난 생명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껴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이 가련한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부디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아이는 사생아였으므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튼튼하지 못했다. 테스는 어느 날 밤 동생들을 불러 자신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말했다. 테스의 얼굴은 맑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테스는 이 가련한 아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고히 생각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었다. 테스는 어린아이를 안고 물이 담긴 그릇 곁에 서고 동생은 교회에서 하듯이 기도서를 펴들고 언니 앞에 섰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테야?" 하고 동생이 물었다. 테스는 구약 성경의 소로우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을 위한 신성한 생각으로 선언했다.
"소로우, 아버지이신 주님과 주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테스는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우리들은 이 아이를 받아 십자가의 표시를 너에게 하노라"
테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 소로우라고 이름지은 갓난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함부로 이 세상에 뛰어든 자 사회의 법도 모르는 염치 없는 자연이 준 사생아는 불과 며칠이라는 시간을 영원한 때로 알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테스는 변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성숙해진 그녀의 눈은 깊었으며 차분해진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트란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남짓한 5월 어느 날 아침 테스는 어느 목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다. 모든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의 딸로서만 살아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전세 마차에 몸을 싣고 스타워카슬이란 조그만 읍내를 향했다. 이번 길은 첫 번째 집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스타워카슬에서 마차를 갈아 타고 웨터베리를 거쳐 아름다운 탈보나이조의 낙농장에 이르렀다. 한없이 뻗은 녹색의 초원 희고 검고 붉은 무늬가 아롱진 소의 무리가 장미빛처럼 빛나는 낙조 속에서 노닐고 있는 곳 젖 짜는 곳에서는 여러 남녀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테스는 2년 동안 고민에 찬 세월을 고향에서 보낸 뒤 꿈을 꾸며 맑고 즐거운 생활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젖 짜는 여인으로서 테스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슬픈 추억으로 고통에 잠겼던 침울한 눈은 다시 이 맑은 태양 속에서 빛났으며 창백한 볼에도 처녀 시절의 아리따운 장미빛이 감돌았다. 이 목장에는 다른 일꾼들과 달리 기품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청년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민스터의 유명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에인젤로 학교를 나온 후 목장의 견습생으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존재였으므로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으나 그는 여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목장 주인도 이 청년에게는 젊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테스는 이 청년을 보았을 때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테스가 아직 철모르는 소녀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처녀들과 같이 부인회의 무도회에 갔을 때 끝내 자기와는 춤을 춘 일이 없이 총총히 떠나가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얀 능금꽃이 떨어지는 초여름의 황혼 아래 테스는 공기가 맑고 고요한 정원에 나와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생각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홀로 조용히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때 뒷집 지붕 밑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구슬픈 음조는 테스의 마음을 꿈 같은 세계로 끌어들였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 소리는 그쳤으나 테스는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황혼에 비치는 흰 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에인젤이었다. 그는 악기를 치우고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 담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테스를 만났다. 사실 에인젤은 테스에게 끌렸으므로 간단한 음악을 연주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테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에인젤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하세요? 제가 두려우신가요?"
"아녜요"
테스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무서운 건 없어요. 별이 이렇게도 아름답게 비치는 걸요"
"그럼 뭐가 두렵습니까? 아니 당신 눈에 눈물이 고였군요"
에인젤은 유심히 테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테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노라니까 인간의 행동이 흙탕물같이 더럽게 여겨져서 갑자기 쓸쓸해졌어요"
"슬퍼한다는 것은 때로는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 주니까요"
에인젤은 테스가 이 목장에 왔을 때부터 용모가 아름다운 그녀에게 끌렸다. 또한 지금은 그녀가 영리한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목장 한 모퉁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에인젤의 마음에서는 테스의 얘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들은 아침 일찍 젖 짜는 곳에서 자주 만났다. 젖을 짜기 위해서는 다들 이른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에인젤과 테스가 제일 빨랐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얘기하며 명랑하게 웃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목장을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아침 해의 장미빛에 비치는 테스의 모습은 에인젤에게는 자연의 여왕과도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무더운 여름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 날 테스는 오랜만에 이 마을에서 2, 3마일 떨어진 교회로 세 명의 처녀들과 함께 예배를 보러 갔다. 길은 질퍽했다. 한참 가다 보니 언제나 뛰어 넘을 수 있었던 작은 냇물이 불어서 신을 벗고 건너가도 물이 무릎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네 명의 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면 훨씬 먼 곳에 있는 큰 길로 돌아가야 했다. 에인젤은 일꾼들이 교회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들판을 거니는 습관이 있었다. 멀리 네 처녀가 소나기에 넘친 개울가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본 에인젤은 그들을 못본 척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중에 테스도 끼어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인젤은 네 처녀가 몰래 사모하는 대상이었으므로 그가 점점 가까이 오자 아가씨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년은 가까이 와서 친절히 한 사람씩 안아서 냇물을 건네 주었다. 물 깊이는 그의 장화를 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테스를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다. 세 처녀는 마음을 조이며 에인젤이 테스를 데리러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에인젤과 같은 훌륭한 남자는 없으며 에인젤이라면 언제라도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에인젤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테스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자신도 에인젤을 사랑하고 있으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용없이 그분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는걸"
테스는 에인젤에게 안겨 건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동요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인젤이 가까이 왔을 때 테스는 말했다.
"전 저쪽 국도로 돌아가겠어요. 세 사람이나 건네 줘서 퍽 피곤하시잖아요 에인젤 씨"
"아니 조금도 사실 당신을 건네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겁니다"
테스의 부드러운 몸은 에인젤의 가슴에 끌리듯 안겼다. 에인젤은 아름다운 꽃다발이라도 안은 듯이 여인을 안고 내를 건넜다.
"무겁죠?"
"무겁다뇨. 당신이 입고 있는 모슬린처럼 가볍습니다"
테스를 건네다 주자 에인젤은 물에 젖은 길을 저벅거리며 혼자 돌아갔다. 네 처녀들이 다시 교회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한 처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틀렸어, 우린 이제 기권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테스가 물었다.
"그분은 널 제일 좋아해 그분이 널 안고 건널 때 우린 확실히 알았어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유혹만 했다면 그분은 네게 키스를 했을 거야"
"얘가, 별말을 다 하네"
테스는 이렇게 부정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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