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독일로 가는 길
- 그 당시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시 구절이 떠나질 않았다.
왜 하필 독일에 가게 되고 또 독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라고 간혹 질문받을 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대답을 못 한다. 그리고 '우연이지요'라고 대답할 때가 대부분의 경우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의 유학의 동기는 막연했고 또 우연의 별의 지배 밑에 놓여 있었던 것 같기만 하다. 나는 국민 학교 때부터 대학까지를 관립 학교만을 나오았었고 다녔었다. 또 점수따기와 책상버러지와 독서광의 부류에 속해 왔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로를 밟은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온갖 관료적, 점수주의적 암기식 교육에 대해서 맹렬한 반발과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품고 있었다. 부산 영도의 피난 가교사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와 또 커트라인 높은 학교에 대한 우등생다운 유치한 무의식의 흥미로 법대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나는 몹시도 혼란한 정신상태 속에 살고 있었다. 배우는 학과마다 'du sollst'였고 로마 제국의 법언과 양피지 냄새가 났었다. 조금도 리얼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가장 리얼한 시스템인 정치 체계 위에 세워진 학문이 가장 공소하게 나에게는 느껴졌었다.
그것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유일의 것, 궁극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유일의 것은 그 때의 나에게는 정신 또는 철학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철학을 공부하려 마음먹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에 간다는 것은 언젠가의 꿈으로 돌려져 있었다. 대학 3학년, 내가 스물한 살 때였다. 나의 둘도 없는, 그 때 미국에 가 있던 주혜라는 친구가 독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편지를 했었다. 주혜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독일인을 서신을 통해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다음은 수없는 서류 작성과 독일어 공부, 유학생 시험... 그리고는 한국이 세계에서도 그 복잡성과 번거로움에 첫째 간다는 출국 수속으로 바삐 돌아다녔다.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 시인의 시 구절이 떠나지 않았고 갑자기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이 났었다. 그 때의 그 신선한 흥미와 이유 없는 마음의 약동을 아마 나는 일생 다시는 가져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어디고 가게 되더라도. 맏딸로서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늘 양친에만 매달려 온, 말하자면 어리광둥이인 나에게 출발의 날은 어제까지의 분주와 약동과 흥미와는 딴판으로 암담했다.
갑자기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절대로 내 집을 떠날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도 무서웠다. 그 때까지 국내에서도 피난 때의 왕복 이외에는 여행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나였고 내 집 이외에는 친척집에서도 자 본 일이 없는 나였다. 미칠 듯이 울었던 생각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비행기가 뮌헨에 닿았을 때도 그 암담은 또 한 번 내 마음을 덮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고, 그 때만 해도 독일에 유학가는 한국인이 거의 없을 때였다. 더구나 여자로는 아무도 마중나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독일어도 자신이 전연 없었다. 무슨 차를 타도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55년 가을이었다.
덧붙여 한 마디-내가 살았던 슈바빙 구의 분위기가 가르쳐 준 거. 언제나 아무도 안 사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안 읽을 시를 쓰면서 굶다시피 살면서도 오만과 긍지를 안 버리는, 이 구역에 사는 모두가 가난했고 대개가 외국이나 타 지방에서 모여든 화가나 학생이었던 그들한테서 나는 자유로운 생활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 같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또 나는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인 무엇인가를 본 것 같다. 정신만이 결국 문제되는 유일의 것이라는 것도. 국적도 피부색도 아무것도 거기에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교통이 가능하여 정신이 일치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벗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 슈바빙 구역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곳에서의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내가 가장 깊이 연구했고 전 작품과 생애를 공부해야 했던 그릴파르처의 세미나에서 "사포와 탓소의 비교 연구"라는 테마를 받고 도서관에서 그릴파르처와 사포에 관한 책은 모조리 빌려서 겨우 타이프지 열 장의 레포트를 써 낸 생가, 늘 파우스트를 강의하는 보르헤르트 교수가 너무 노령이고 너무 사투리가 심하고 목소리가 작아서 언제나 속상했던 일, 또 라이스트 교수나 데쿠 교수나, 가장 많은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던 기독교적 실존에 관한 강의를 하는 구아르디니 교수, 강의 때 라틴어와 희랍어를 너무 많이 써서 나는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독일 학생들이 모두 원어로 척척 받아쓰는 것을 보고 통분했던 일. 추억은 괴로웠던 일로만 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