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는 우리말
우리 시에 나타난 어린이 말
이 자리에서는 어른들이 쓰는 시(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쓰는 동시 가 아니고 어른들이 읽는 것으로 쓰는 시)에 나타난 어린이의 말(어린이들이 나날이 쓰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른들이 읽는 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까닭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의 본질이 어린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 어른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외국에서 들어온 글을 숭상하고 그 글말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것을 특별한 권리로 삼아, 일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부리고 아이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에는 우리 문인들이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시인들이 우리 시를 썼다고 하지만, 남의 나라 글자라고 할 밖에 없는 한문글자와 그 글자로 된 말이며, 일본말법을 마구 그대로 써 왔기에 아이들이 읽을 수 없고 읽어도 알 수 없는 글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 가끔 나온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썼는데도 그 마음이 어린이와 다름없는 상태여서 저절로 어린이가 하는 말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작품을 몇 편만 보기로 하자.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1924)
밤에 오든지 낮에 오든지 봄에 오는 비가 들려주는 소리를 오늘날에는 어른들조차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소리로 반가운 자연의 소리로 받아 들일 수 없도록, 자연이고 사람이고 달라지고 병들어 버렸다. 그러니 이런 시의 맛을 요즘 학생들이 어느 정도로 알 수 있을까 싶어 슬퍼진다. 어쨌든 자연의 소리에 감동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은혜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어른이고 어린이고 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말도 이런 시에서 티없이 깨끗하게 씌어졌다고 본다.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1922)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다. 소월은 이 시를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시로 쓴 것이지,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것이 아니다. 어른이 그 심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는데도 그것이 그대로 어린이들까지 자기들이 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 가장 바람직한 시의 모습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강변 이란 말을 썼는데, 본래 우리말로는 강가 이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경북의 깊은 산골에서고 조그만 냇라를 갱변 갱빈 이라 했고, 이 갱변 갱빈 이란 말이 시골말로 널리 쓰고 있으니 우리말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강변 이란 말을 썼다고 탓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닷가 라고 할 것을 해변 해변가 라 써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호수 -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1930)
지는 해 - 정지용
우리 오빠 가신 곳은
해님 지는 서해 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이
핏빛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다. 불이 났다.
앞의 시 호수 는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동시가 아니고, 발표한 잡지도 어른들이 읽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낮은 학년 어린이들도 읽으면 오리들이 물 위에 떠 다니면서 목을 감고 놀고 있는 모양을 그려 보며 좋아할 것 같다. 뒤의 시 지는 해 는 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쓴 동요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 오빠 라 하여 시인이 어린 아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 시인이 짐짓 어린이로 꾸며 보여서 어린 아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아주 완전히 어린이가 되어 살아 잇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를 쓴 어른과 글 속의 어린이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면 그 옛날 거의 저녁마다 볼 수 있었던 새빨갛게 타오르던 노을과 그 노을 저쪽으로 지던 해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더구나 이 동요시에는, 숱한 우리 젊은이들이 서쪽 바다 건너 전쟁터에 끌려가던 중일전쟁이 터졌을 무렵의 불안한 세상 형편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지금까지 든 네 편 가운데서 빗소리 는 들은 것을, 호수 와 지는 해 는 본 것을, 엄마야 누나야 는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쓴 것이지만 모두 자연을 글감으로 하였다. 본 것이든 들은 것이든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 이와같이 어른과 어린이의 세계가 하나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겨울 물오리 - 이원수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1981)
이 시는, 어른들이 읽는 수필이나 논문도 썼지만 평생을 주로 동시와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다가 돌아가신 지은이가 일흔의 나이로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써서 남긴 작품이다.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모르고 작품만 보아도 어린이들이 읽는 동시구나 하고 모두 말할 것이다. 그렇게 보아도 좋다. 그러나 잘 살펴서 읽으면 이 시에는 어린이들이 아직은 느낄 수 없는 깊은 세계가 담겨 있다. 지은이의 작품 세계와 살아간 길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에서, 고향의 봄 으로 시작하여 55년 동안 이원수 문학이 걸어온 길이 마지막으로 이르게 된 자리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이 시는 작곡이 되어서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고 있는데, 이렇게 깊고 넓은 뜻을 담아 놓은 시가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는 노래로 되어 있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물론 어린이들은 어린이의 정도에서 읽고 노래하면 그만이고, 그래서 차츰 자라나 먼 훗날 이 시를 다시 읽고 새로운 뜻을 깨닫게 되면 평생을 이 노래로 함께 자라고 살아가게 되는 셈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이 시는 아동문학작가가 썼지만, 지은이가 쓴 많은 동시가 그랬던 것같이, 지은이가 짐짓 어린이로 되어 어린이 짓을 해 보인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자기 자신을 노래한 것이 그대로 어린이의 노래로 되었고, 시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가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또 하나로 되어 있다.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곧 자연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놓았다. 이것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 어린이 말을 시의 가장 좋은 표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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