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 신시와 우리 나라에서가장 훌룡한 시를 썼다고 모두가 말하는 두 사람이 쓴 시를 들어 시와 삶과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다음에는 오늘날 씌어 나오는 시에서 우리말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여기 들어 놓은 시 구절들은 모두 신문에 발표된 시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가 되는 말에는 밑줄을 그은 다음에 묶음표를 해서 바람직한 우리말을 적어 놓았는데, 내가 바로잡아 놓은 말보다 더 좋은 우리말이 있는 경우도 나올 듯하다.
어머니는
꽝꽝 언 대지 안에 (땅)
사랑을 품고 키우는
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것은 시의 제목인데, 제목이든지 본문이든지 내 느낌으로는 우리 어머니 라야 우리말답고 우리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사람이 가졌던 느낌 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다. 또 모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될 수 없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우리 고향 우리 학교 를 죄다 나의.. 로 쓰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우리말을 더럽히는 데 앞장선 것은 바로 문학작품을 쓰는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글말에 중독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우리... 를 쓰고 있으니 마땅히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
우수의 바람..(근심)
봄이면 모든 것이
거듭나기를 기원한다(빈다)
뒤척이는 몸짓으로
그리운 언어를 띄우거나 (말)
비상하는 기쁨으로 (날아오르는, 솟구치는)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아침은 한잔의 생처럼 (시제목)
아침은 산사에서 마시는 (산속 절)
한잔의 생수처럼 온다.(샘물)
생처럼 이라 썼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산사 라고 더러 쓰는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고, 또 귀로 들어도 모른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산속 절 하든지 그냥 절 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푸른 치마자락으로 몸을 가리우고 (가리고)
굽이치는 바다
깊은 해심의 속살이 보인다.(한가운데)
가린다 란 말은 가리운다 고 쓰는 것은 잘못되었다. 해심 은 바다 가운데 란 뜻의 한문글자말인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다. 이런 말은 쓸 필요가 없다. 그 앞에 또 바다 란 말이 나왔으니 한 가운데 로만 쓰면 될것이다.
정오의(한낮) 햇살이 용해되어 (녹아서)
투명해질수록 (환히 비칠수록)
뜨거운
한 잔의 커피를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예쁘고 작은 스푼으로 (숟가락)
커피와 프림 설탕을 담아
앞에 예쁘고 작은이 나와 있으니 양숟가락 이니 차숟가락 이니 오목숟가락이니 할 필요도 없다.
나도 예수처럼
자유에의 깃발 펄럭이며 (자유의)
내 낡은 수첩 속에 서투른 시의 제목으로
녹두꽃 사내 라 이름하고 널 지우려 했다. (이름 적고)
이름한다 , 이름하고 이런 말은 없다. 이것은 아주 일본말을 직역한 것이다.
황혼을 등지고서 (저녁 어스름)
차가운 손 흔들며
별들이 비행하는 불멸의 시간 속에 (날아가는 영원의)
불멸 보다는 영원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잔설도 사그라진 황량한 강변을 본다. (남은눈, 쓸쓸한 강가)
강변 이란 말은 아주 널리 써서 우리말로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강가 가 더 낫다고 본다.
눈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끊어진 산줄기)
새들이 돌아온다 사계의 저녁이다 (사철)
가출했던 마음이여 전우를 맞았는지 (집 나갔던, 천둥비)
가슴 한켠 둥지에로 돌아와 잠드는 새 (둥지로)
일몰을 배웅하는 (저물녁, 저문날, 지는해)
낮은 처마 연기 자락
겨울철 피난살이
후조의 날개짓에 (철새)
숨죽인
천삼백리 강
식탁 위를 채우리 (밥상)
육백년 한을 접어서
침묵으로 앉았다.(말없이)
세월의 뼈마디를
침묵으로 딛고 서서 (말없이)
여명의 날개 자르고 (새벽)
추락하는 벼랑 저 끝 (떨어지는)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있는 (어릴적)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버린 물 그위로 그림자만)
전생의 이름표를 들고 꿈길 향해 달려오네 (꿈길로)
이 밖에도 얼마든지 보기를 들 수 있지만 이쯤 해두기로 한다. 내가 보기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은 우리말에 너무 관심이 없고 감각이 무디다. 문학이라면 말을 다루는 예술이고 말로 빚어내는 예술인데, 더구나 시는 말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그 어떤 글쓰기보다 힘들여야 하는데, 시인들이 이렇게 어설픈 남의 글자말, 일본말법 따위를 일부러 자랑스럽게 쓰면서 살아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있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날 시인들은 새벽이란 말을 쓰면 시가 안 되고 반드시 여명 이라고 해야 시가 되는 줄 안다. 저녁무렵 이라든지 저물녘 저녁어스름 땅거미 이렇게 얼마든지 좋은 우리말을 안 쓰고 비애 환희 우수 이런 따위 한자말이라야 시가 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모두 어제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김소월이나 정지용같은 그 유명시인 때부터, 아니 맨 처음 일본시와 서양시를 따라 쓰기 시작했던 최남선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잘못된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아서 우리말이 많이 살아 있는데, 갈수록 나빠져서 오늘날에는 시가 우리말을 죽이는 주범이 되고, 말자랑, 말치장, 말장난의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원인은 환하다. 시인들이 모두 삶을 등지고 방안에 앉아 머리만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시가 병든 것은 시인이 병든 까닭이요, 시가 죽은 것은 시인이 죽은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된 시 쓰기는 아이들의 시 쓰기 교육도 그릇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초등 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고 모두가 어른들이 쓰는 시나 동시를 흉내내어 쓴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이 시쓰기 지도가 되어 있느니 기가 막힌다. 어른들의 시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흉내내기를 가르친다면 절대로 시가 쓰일 수가 없고 도리어 시를 쓰는 마음을 죽여 버리는 것인데, 잘못된 말로 써 놓은 시를 그대로 따라서 쓰도록 하고 있으니 무슨 시가 되겠는가? 이래서 아이들이 써 놓은 시란 것도 말의 오염이 될 대로 되어간다. 초등 학생들은 동시란 것을 쓰면서 흉내와 말장난을 하고, 중고등학생이나 청소년들도 유식한 말이나 근사한 외국말법으로 글장난하는 짓을 시 쓰기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 따라가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어른들의 글에서 말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보다 더 어린 아이들한테서 말을 배우고, 더 어렸을 적에 익힌 말을 살려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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