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정지용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 애송되는 시에 향수 란 것이 있다. 물론 이 제목도 한문으로 써 놓은 것인데, 고향 생각 이라면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의 제목처럼 느끼거나 무식한 촌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알고, 향수 라고 해야 그럴듯한 시의 제목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구나 요즘은 많을 줄 안다. 이렇게 우리말을 죽여 놓고 우리 겨레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해 좋은 책임은 이런 유명시인들이 마땅히 지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향수 란 작품을 보기로 하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일제시대, 그리고 60년대까지 우리 모두의 고향이었던 농촌을 이만큼 아름다운 말로 나타낸 시도 썩 드물 것이다. 여기에는 농사일의 고달픔이라든가, 굶주림에 따르는 정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괴로운 추억이 도리어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되었다.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어 있으니까 괴로운 기억은 묻혀 버렸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시인의 추억과 상상은 그저 아름다운 고향을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여기 씌어 있는 말들 가운데는 어떤 정경이나 사실을 재미있고 알맞은 말로 나타내어서 우리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많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다 나간다든가,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운다든가,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라든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이라든가, 이런 말들은 모두 우리 겨레의 삶에서 우러난 말로 느껴진다. 더러 놀랍도록 재주를 부려 놓은 말들조차 자연스럽게 가슴에 와닿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시에 씌어 있는 모든 말이 싱싱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사실은 매김자리토씨(관형격조사) -의 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를 이렇게 깨끗한 말로 쓸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인이 고향 생각을 하면서 고향 이야기를 한 때문이다. 고향 이야기를 하자니 고향 말, 곧 우리말로 쓰지 않을 수 없다. 고향의 말은 바로 일하는 삶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고향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릴 때 이야기를 쓰지 않고, 도시에서 시만 쓰면서 살아가는 현재 의 이야기를 써 놓은 시는 거의 모두 앞에서 말한 제목뿐 아니고 본문에서조차 어려운 한문글자를 마구 써서보통사람은 읽을 수도 없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시가 일하는 사람들의 정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팔자 좋은 사람들의 취미생활에서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시의 산줄기에서 한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고 모두가 알고 있는 시인의 시가 이 모양이란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이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위에 들어 놓은 향수 만 해도 앞에서 좋은 시라고만 말했지만 사실은 아주 커다란 흠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얼룩배기 황소 라고 한 것인데, 얼룩배기 소 란 우리 소가 아니다. 요즘은 외국 소를 많이 들여와서 얼룩소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그런 서양의 얼룩소가 짚벼개를 베고 주무시는 아버지며 사철 맨발인 아내가 일하면서 살아가는 고향 마음에서 울고 있다니! 이것은 고향 생각을 하고 고향 이야기를 쓰면서 그만 어느덧 고향을 떠나 생각 속에 취하고 말에 취해 재주를 부린 것이다. 이 시인의 시에는 이렇게 말재주가 나타나는 작품이 많은데, 여기서는 이 조그만 흠이 시 전체를 한 폭의 만화로 떨어지게 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삶을 떠난 시인, 삶이 없이 시만을 쓴 시인의 비극이다.
우리 시인들의 시에서 내가 언제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왜 시인들이 일하는 삶을 시로 쓰지 못하는가, 왜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그 땀 냄새를,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시로 쓰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삶이 가장 높고 귀한 가치가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밀레가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듯이, 시도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새로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지난 1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일하는 삶을 그린 시가 보이지 않는다. 단 한 편도! 내가 시인들의 시를 알뜰히 살펴보지 않아서 놓쳤는지 모르지만 아직 그런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시, 슬퍼하고 원통해하는 시, 무엇을 외치는 시는 많다. 무엇을 그리워하거나 꿈을 구는 시, 저 혼자 그 무엇에 취해서 수다를 늘어 놓는 시도 많다. 무엇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시는 더욱 많고, 세상을 관광거리로 삼고 있는 듯한 시는 더더욱 흔해빠졌다. 그런데 일하는 삶을 보여 주는 시는 없다. 우리 겨레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었다고 하는 김소월의 시에도 일하는 삶의 정서를 쓴 것이 단 한 편도 없다. 문학에서 가장 앞장서 간다는 시가 이래도 괜찮은가? 뭔가 밑뿌리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소월의 시에 꼭 한 편, 농사꾼이 일하는 것을 글감으로 한 것처럼 되어 있는 시가 있는데 밭고랑 우에서 다. 여기 전문을들어 놓겠다. 이 시를 또 특별히 들어서 생각해 보는 까닭은, 어느 유명 시인이 일제시대 시인들의 대표작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고, 그만큼 널리 애송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우에 앉아서라.
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을 나려 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롭은 탄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우에서.
다시 한번 활기 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런히, 가즈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어, 오오 생명의 향상이어.
보다시피 이 시는 보리가 키 높이로 자라난 밭고랑에서 젊은 부부가 일하다가 쉬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순간의 즐거움을 그려 놓았다. 하늘에는 눈부시게 해가 내리쬐고, 새들이 울고, 그래서 하늘과 땅은 건강한 몸으로 일하는 이 젊은 부부를 축복하는 듯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연 속에서 일하는 즐거움, 하늘과 해를 쳐다보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땀 흘리고 일하는 기쁨!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정지용의 향수 는 지난날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아름답게 그려 놓았지만, 이 시는 바로 지금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목도 바로 밭고랑 우에서 이고, 우리 두사람은 하고 시작하여 이 시인이 스스로 한 것을 쓴 것처럼 해 놓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시인이 그려 놓은 이 아름다운 자연과 일하다가 쉬고 있는 농민 부부의 모습에 덮어놓고 감동하고만 있을 수 없다. 일제시대 실제로 논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민들이 이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하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 있는 은혜를 고마워 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가? 더구나 보리가 다 자라난 그 굶주림의 보리고개에서 말이다. 정지용의 시에는 그래도 사철 발벗고 이삭 줍는 누이와 아내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바로 지금 자신이 들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털끝만치도 보리고개의 현실과 정서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는 일제시대 우리 농민이며 농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사실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 농민과 농촌은 보지도 않았다. 다만 방안에서 제멋대로 상상해서 쓴 것으로 되었다. 시는 상상으로 쓴다고 하지만, 우리 겨레의 정서를 우리 겨레의 말로 쓰려고 애썼다는 시인이 우리 겨레의 90%를 차지하는 농민의 삶을 - 바로 농민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을 이렇게 엉뚱한 그림으로 그려 놓았으니, 신인으로서 너무나 불성실하고 책임감이 없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가 농민의 삶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시에 나온 부부가 대관절 보리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씌어 있는 것만으로도 잘 알게 된다. 이 농민 부부는 무슨 일을 했는가? 보리가 키로 자라났으니 이런 밭에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이제는 보리가 익어서 베기만을 기다릴 뿐이고, 그 동안에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보리밭 고랑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만 했으니 괴상한 시요, 괴상한 글이다. 마지막 연에 가서, 이제 쉬기를 끝내고 다시 일을 했다고 했는데, 거기서도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호미를 들고 보리밭 고랑에 들어갔다고 했다. 호미를 들고 키 높이 자란 보리밭 고랑에 앉아 할 일거리가 뭐 있겠는가? 잡풀이 있을 수도 없고, 어쩌다가 보리와 같은 키로 명아주가 솟아날 수가 있지만, 그것은 호미를 슬 것이 아니라 손으로 뽑아야 한다. 보리밭 고랑에 콩을 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가을에 뿌리는 가을 보리가 아니고 이른 봄에 뿌리는 다시 괭이로 묻는다. 그러니 키로 자란 보리밭에는 아무도 들어갈 일이 없다.
더욱 우스운 것은 마지막 연에서 호미를 들고 들어갔다고 해 놓고는 걸아 나아가는 기쁨이어 했다. 세상에 호미를 쥐었으면 앉아서 엎으려 무엇을 하든지 해야지, 보리밭 고랑에서 호미를 쥐고 서서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무슨 일을 하다니! 만화치고 이렇게 우스운 만화가 있겠나 싶다.
시가 왜 이런 꼴로 되었는가? 그 까닭은 뻔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한 것처럼 쓰자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일을 하지 않았으니 일을 모르고 (내가 알고 믿기로는, 아무리 놀랍고 뛰어난 상상을 하는 재주꾼이라 하더라도 자지가 몸으로 해 보지 않은 일과 그런 일에서 우러난 정서를 제대로 올바르게 상상해 써 낼수는 절대로 없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했는지를 쓰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을 마치고 밭고랑에 쉬면서 하늘 쳐다보고 이야기한 것이나 쓰고, 그래도 밭고랑 우에서 라 제목을 붙였으니 무엇을 한 것처럼 쓰기는 해야겠기에 일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호미를 쥐고는 그만 우스운 연극을 연출한 것이다. 소월같이 뛰어난 시인이 이렇거늘, 하물며 오늘날 아주 어려서부터 삶이 없이 자라난 숱한 시인들이 써 놓은 시가 어떤 꼴로 되어 있겠는가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이 밭고랑 우에서 가 일하는 삶의 바탕이 없이 제멋대로 꾸며 놓은 지식인의 정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에 씌어진 말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 - 일을 필(畢)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어
농민이고 노동자고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일을 필하고 하지는 않는다. 일을 마치고 하든지 일을 끝내고 하지. 그리고 이 시에서는 일을 필하고 도 일을 마치고 도 아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데 어째서 일을 필하고 인가? 이래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지식인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꾸며서 거짓말을 쓰자니 내용과 말이 어긋나서 이 꼴이 된 것이다.
-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나려 쪼이며
농민은 태양 이란 말도 안 쓴다. 농민의 이야기를, 더구나 농민 자신이 하는 말로 쓰는 글에서 농민이 하지 않는 말을 써도 되는가? 이글은 진짜 농사꾼이 쓴 것이 아니고 시인이 어쩌다가 밭에 가서 일한 것을 쓴 것이다 이런 변명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더 웃기는 거짓말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새라새롭은 탄희를 지어내며,
내 느낌으로는 우리말 그대로 사랑의 하늘은 이라든지 새라새롭은 기쁨을 이라고 쓰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농사꾼이고 일반 서민들이 쓰지도 않는 자애니 환희 니 하는 말을 써야 그럴듯한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나라 시인들의 잘못된 글쓰기 병폐는 김소월과 같은 민요시인까지도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만들어 문학이라는 글쓰기 상품을 만들어 내는 모든 시인과 작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모두 삶이 없는 탓이요, 일을 하지 않고 방안에 앉아 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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