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흰나비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 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백'민.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붉'을 '백'이라 쓰고 백을 다시 '맥', 또 '맥'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불'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불'은 한편 '부유' 또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도'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은 '도'의 이름이요, '백'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의 '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
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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