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꾸며 쓰는 버릇 어떻게 고칠까(2/2)
다음은 역시 같은 문집에 있는 같은 학년 학생의 작품이다.
기쁨과 슬픔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언제나 창가에 두고 싶어서.
햇살이 비추면
그 빛에 빛나고
달빛이 비치면
내 작은 별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내 창가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둔 그림자만 보일 뿐.
내겐 기쁨을
주었지만
꽃에겐
아픔이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다듬어야 할 한자말이 없다. 쉬운 말로만 쓴 점은 잘 되었다. 그런데 말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첫머리에 나온 이 말인데, 여기 씌어 있는 낱말들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말고 되어 있다.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할 때 꽃의 모습이.. 라고는 하지 않는다. 꽃 모습이.. 라고도 안하고 꽃이 아름다워.. 하는 것이다. 시가 꼭 입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써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 입으로 하는 말을 떠나면 그것이 거의 모두 일본말법이나 서양말법을 따라가는 글말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서 쓰는 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좋은 시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줄에 적힌 손에 쥐었다 는 매우 간결하고 요령있는 말 같지만 잘된 말이 아니다. 시는 어떤 모습이든지 행동이든지 될 수 있는 대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로 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그저 최소한도의 뜻만 전하는 말로 되어 있다. 대체 그 꽃은 어느 꽃밭에서 꺾었다는 것인가? 가계에서 샀다는 것인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해서 얻었다는 것인가?
꽃이 아름다워
한 송이 샀다.
가령 이렇게 쓴다고 해서 말이 길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게 무슨 꽃이었는지도 쓸 것이지 왜 꽃 이라고만 했는가? 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고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는 것이라면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를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다니! 이것은 시에서 가장 거리가 먼 글이요, 시가 될 수 없는 글이다. 이래서 둘째 연도 최소한의 뜻만 전하면서 곱게 그려 보이려고 한 말이 되었고, 셋째 연은 쉽게 전달이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 보니까 이 시는 이 학생이 겪은 사실도 없는 일을 말로만 이렇게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물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 와서, 지금까지 대강 설명만 하듯이 한 말들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꽃이란 생명을 두고 생각하는 태도가 고등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그 꽃에게 어찌 아픔 정도이겠는가? 바로 죽음 인 것을!
다시 같은 문집에서 한 편만 더 들어 본다. 이번에는 3학년생의 작품이다.
아부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밑을 두세 번 걷어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상의
검정 장화
목장갑을 끼고
두 바퀴 삐그덕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한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난 친구들과 거리를 나돌다
누군가를 외면한다.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가지
한없이 바라보았다.
난 그 누군가의
시선조차도 외면한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를 외면한다.
마치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서 있는 아부지를...
이 시에서도 어려운 낱말은 별로 없지만 상의 시야 시선 같은 말은 잎으로 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상의 는 웃옷 이나 저고리 로 쓰면 좋고 시야 는 눈 하면 되고, 시선 은 눈길 이면 된다. 이 시는 모두 다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연의 마지막마다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말이 되풀이 되어 있다. (다만 끝연에서는 외면한다 다음에 다른 말이 더 붙어 있다.) 1,2연은 도망친다 이고 3,4,5연은 외면한다 이다. 이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비슷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바로 이 시의 주제가 되는 말이겠는데, 그렇다면 지은이는 무엇에서 왜 도망치고 외면하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벌써 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내 모든 앞날을 결정하는 아부지 로부터 도망하는 것이고, 그 아부지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 까닭을 이 시에서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목과 2연과 마지막 연에서 적어 놓은 말들로 느껴 알 수 있다. 사투리를 쓰는 무식한 아부지 가 싫고, 밑을 두세번 걷어 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이 싫고, 검정장화 와 목장갑 과 두 바퀴 삐그덕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일만 하는 사람이 싫고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가난한 아부지 가 싫은 것이다.이렇게 되고 보면 이 작품을 쓴 사람의 정신 상태가 문제된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싫고 일하는 사람이 싫고, 가난한 사람들이 싫고, 그래서 이 땅과 조국이 싫고 부끄러워 남의 나라만 쳐다보고 서양나라만 부러워하는 이런 정신 상태는 비단 이 작품을 쓴 학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이런 정신 상태를 우리 겨레가 가지고 있는 무더기 정신병이라 하여,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을 쓰고 싶어하는 고약한 버릇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부고 높여주는 것인데, 이런 병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첫 연부터 이렇게 낯선 사람을 말하듯 누군가라 해서 되풀이해 놓은 것도 문제지만, 대관절 고등학생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는가? 이래서 이 작품은 지은이의 마음가짐뿐 아니라 표현이 또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시 같은 것을 흉내내고, 시인인 척하는 글 버릇 말이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참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전체가 어떤 틀의 시를 흉내내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앞에서 지은이가 아부지 를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까닭이 2연과 5연에 나타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2연도 5연도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2연에 그려 놓은 사람은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검정장화 .. 와 같은 말들을 늘어 놓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 하다는 따위 틀에 박힌 말만 적었지, 조금도 그 사람의 뚜렷한 모습이 안 보인다. 5연은 더 엉터리로 되어 있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 라 했는데, 이 아부지는 뭘 하는 사람인가? 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가?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아부지 가 서 있다니 무슨 뜻을 나타내려 했는가? 엉터리요, 흉내요, 무슨 척하는 말일 뿐이다. 4연을 보면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 다가, 그만 그 누군가의 눈길조차도 외면한다 고 했다.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를 바로 보려고 하는 또 하나의 나를 외면했으니,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요, 따라서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스런 말이다.
시의 제목 아부지 란 말부터 문제다. 아부지 라고 아직도 말하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부지만 말을 얼마든지 글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그것은, 다른 말들은 모두 표준말이고 유식한 말인데, 이런 말을 쓴 사람이 하필 아버지란 말을 안 쓰고 아부지 라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아부지 란 사투리를 쓰는데서 그런 사투리로 살아가는, 일만 하는 아버지, 가난하고 무식하고 그래서 부끄럽기만 한 살붙이의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속셈으로 쓴 것일까? 그래서 실제는 아빠 라고 말하면서 글에서는 일부러 아부지 라 쓴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계산이요 흉내다. 계산과 흉내가 시를 결딴낸다. 거짓되게 한다. 사투리나 써서 무식한 그 아버지가 싫고 부끄럽다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시 세편을 들어 말했는데, 오늘날 고등학생들이 쓰는 시의 특징 - 결점을 이 시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들의 시에 공통되는 결점은
1.삶이 없고,삶을 떠나 있고,
2.시인들의 시를 흉내내고,
3.실감이 따르지 않는 허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 이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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