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노천명편"
노천명(1912~1957})
여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 이화 여전 영문과 졸업. 현대시다운 시를 쓴 최초의 여류 시인으로 지목된다. 초기에는 고독과 애수의 주정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고, 후기에는 도시적 취향의 고독 속에 침잠하여 현실과 유리된 생활을 하다가 독신으로 병사하였다.
시골뜨기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올라온 것이 이맘때였던 상싶다. 음력 이월 초순께나 되었던지 춥기는 해도 겨울은 아니고, 그렇다고 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여기 애들 모양 당홍 제비부리 댕기도 못 드리고, 검정 토막 댕기를 드린 나를 보고 동네 아이들은,
"시골띠기 서울띠기 말라빠진 꼴띠기."
하며 우르르 달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나는 그 애들의 외우는 말이 재미가 있어 웃으며, 그 애들이 몰려가는 데로 따라가면 줄달음질들을 쳐서 골목 안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시골 우리 동리가 그립구, 박우물께 이쁜이며, 새장거리 섭섭이, 필녀, 창호 이런 내 동무들이 한없이 보구 싶어졌다. 학교에두 아직 못 들구 어머니는 날마다 집주름을 데리구 집만 톺으러 다니시면, 나는 그 동안 이모 아주머니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이 이모 아주머니란 분은 재미있었다. 달래 그런 것이 아니라 환갑이 다 된 분이 머리는 하나도 세지를 않고, 그 대신 정수리가 무르팍처럼 멘 분이 함박꽃빛 자주 마고자를 입고 계신 것이 우습고, 또 한 가지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온종일 잔소리로 일을 보시는 것이다. 할아범과 할멈을 번갈아 부르셔선 무슨 분부인지 그처럼 많다. 그런데 한번은 밖에 손님이 오셔서,
"이리 오너라."
했다. 아주머니는 미닫이도 좀 안 열어 보고 창경으로 겨우 내다 보시며,
"거기 아무두 없느냐."
하시더니 아무 대답도 없는데,
"누구신가 엿줘봐라."
하고 분부를 하신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밖의 손님이 이 말을 듣더니,
"양사골 김 주사가 왔다구 엿줘라."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아주머니는,
"영감 마님 출입하고 아니 계시다구 엿줘라."하신다.
할멈도 할아범도 사이에는 없는데 서로 해라를 하고, 또 문도 안 열어 보며 영 등바같이 또랑또랑하게 말루만 해내는 것이 나는 말할 수 없이 우스웠다. 서울은 정말 별난 곳이라 생각되었다. 별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우리 게와 달라 무슨 장사들이,
"비웃드렁 사려! 움파드렁 사려!"
'드렁' 하며 외치고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달음박질 뛰어나가 문 밖에 가 서서 구경을 했다. 한번은 머리를 따내린 호인이 팔에다 나무 궤짝을 걸고, 한 손에 울긋불긋한 종이로 오린 꽃에다 섞어 천연 멍개(해당화 열매) 같은 빨간 것을 꼬챙이에 끼워 들고 가며,
"아아가위 콩... 사탕..."
하고 외우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시골에 있는 멍개 같은 데 반가움을 느끼고, 한 꼬치 5전이라는 것을 샀다. 그래서 가지고 들어가 먹어 봤더니 맛이 여간 좋지 않았다. 시골 우리 아랫집 '대각'이네 '모나까'보다도 훨씬 맛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이 되면 으레 어머니한테 아가위 값을 타고 '아가위 콩사탕'만 외우고 지나가면 뛰어나가 사곤 했다. 아주머니는 여덟 살이나 된 걸 저렇게 군것질을 시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셨으나, 우리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언제나 은장도가 달린 주머니끈을 끌러 돈을 꺼내 주셨다. 서울은 정말 좋은 곳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신기한 것에 대한 내 주의는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아주머니가 나가시더니 할아범에게 이상한 것을 들려 가지고 들어오셨다. 이 찬란한 것에 나는 정말 황홀했다. 놋쟁반 같은 데가 오색이 영롱한 꽃이 하나 그득 담겨 들어왔다. 가까이 보니 꽃만도 아니다. 꽃에, 새에, 연밥에, 새파란 오이에, 가지에, 옥가락지, 귀주머니, 갖은 패물, 족도리, 안경집 이런 것들이 노랭이, 파랭이, 분홍, 흰 것, 당홍, 취얼, 보라, 이루 말할 수 없게 곱게 차려졌다. 이것을 보시고 어머니가 아주머니에게 요샌 색떡 한 밥소래에 얼마냐고 물으니까 5원이라고 하신다. 대화에서 이것이 색떡이라는 물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흰 바탕에다 검정 선을 두르고 분홍 매화와 새를 새긴 안경집과 칠보가 달린 족도리가 제일 고왔다. 그래서 어머니를 지긋이 잡아당기며 나는 저기 족도리하구 안경집을 날 떼달라고 졸랐더니 그것은 혼인집에 가져 갈 것이 돼서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얼마 동안 그것 때문에 울었다. 한참 있으니까 이웃집 서울 아이들이,
"얘애야, 나아와 노올아!"
하고 저이 동무들을 찾는 노래 곡조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번연이 나를 찾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첫째는 노래같이 부르는 이 소리가 재미있는 까닭이요, 다음으로는 얼굴에 분세수를 하고 기름을 발라서 머리들을 곱게 빗은 서울 아이들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우리집 문 앞에 가 서서 있는 것이다. 바로 건너다뵈는 앞집은 꽤 큰 집인데 대문에는 흰 글씨로, '성적분 파오'하고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다. 나는 심심해서 속으로 몇 번이구 자꾸 '성적분 파오' '성적분 파오' 하고 읽어 보는 것이다. 하루 아침엔 이 큰 대문집에서 나만한 처녀 아이가 나오더니 내게다 말을 였다. 말씨가 예뻐서 나는 그애가 말하는 것을 무슨 고운 것이나 보듯이 신기해서 자꾸 쳐다봤다. 그애는 자기 집에선 성적분을 만든다는 것이며,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있다는 것이며, 망녕난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 등을 말해 주며, 내 손을 붙들고 저의 집엘 데리고 들어갔다. 나더러 널을 같이 뛰자고 하는데 나는 뛸 줄도 모르고 또 무섭다고 질색을 했더니 줄을 잡혀 주며 나더러 줄을 잡고 뛰라고 했다. 내가 줄을 잡고 널을 뛰어 봤더니 그애는 나더러 사내 널을 뛴다고 하며 널 뛰는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후부터 인순이는 아침만 치르면 우리집에 와서,
"얘애야, 나아와 노올아!"하고 나를 불러 주었다.
인순이와 내가 차츰 정이 들려고 하는데 우리는 집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서울 길을 모르는 나는 인순이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이 되어 버렸다. 그 뒤 전학이 돼서 내가 하교엘 들어갔을 제 나는 인순이를 찾으려고 은근히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인순이는 집이 완고해서 학교엘 넣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인순이는 내가 서울 와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지금도 내가 서울엘 자주 왔을 때 제 일을 생각할라치면 으레 인순이가 생각나고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순이는 언제나 처음 만날 때 그가 입었던 꽃분홍 삼팔 치마에 연두 저고리를 입고 파란 징신을 신었다. 나는 그 때 인순이 이름을 알았지만, 인순이는 내 이름도 채 모르고 헤어졌다. 다만 시골 애라고 알았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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