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설명문 쓰기 -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까(1/4)
싱싱한 입말로 쓰고
우리가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에 씌어 있는 낱말이나 말법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이야기 내용에 아주 압도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 글은 성공한 글이고, 좋은 글 또는 훌룡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낱말이나 말법에 잘못이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하게 씌어진 글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시시하거나 옳지 못한 생각 또는 행동을 적어 놓았다면 그 글은 읽을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은 논리로 따져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글의 내용이 절실한 이야기로 꽉 차 있으면 허튼 말이 없고 겉치레 글 꾸이기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쓰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남의 것 흉내나 내고 말재주를 부리게 되고, 이래서 깨끗한 우리말 대신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유식하게 보이는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을 쓰는 것이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자신이 이 학생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나는 이런 학생과는 사정이 다르니 골치 아픈 것 가지고 생각하기 싫다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내가 만약 대학의 입시문제를 내는 일을 맡았다면 수험생들에게 이 글을 읽게 해서 자신이 이 글을 쓴 학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써 보시오 라는 문제를 낼 것이다. ( 이 편지글은 십대들의 쪽지 라는, 달마다 거저 나눠주는 작은 책을 펴내는 분에게 보내는 글이고, 바로 그 책에 실렸던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또 펜을 듭니다. 오늘 학교에서 오는 길에 편지를 부쳤었는데 그리고 쪽지 상담실에 전화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다시 또 써야만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전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아이겠죠? 요즘 들어서 하루라도 안 운 날이 없어요. 특히 어제 오늘은 하도 펑펑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 있구요. 정말 모든 게 제겐 너무 견디기가 힘듭니다. 전에 편지 보셨다면 제가 왜 이러는지 대충 이해는 하시겠죠? 오늘은 학교 갔다가 집에 와서 책상을 보니 책상이 아주 깨끗해요. 책이니 공책이니 그 많은 시험지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죠. 전 누구 짓인지 다 알았죠. 아빠였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아빠뿐이니깐요. 아빠가 저에게 대응하시는 말이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 거라 그거였죠. 그래서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는 거였어요. 전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이번 성적이 나쁘게 나오고 또 전에 제가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는 것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지난 얘기고 물론 지금은 안 그러죠. 시험 끝난 후로 제 능력에 많은 실망과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딛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아빠까지...정말 너무 힘드네요. 아저씨, 이런 말 어떨지 모르지만 너무 암담해서 죽고 싶어요. 오늘 전화쪽지를 들고 보니깐 남의 말에 실망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더라구요. 옳은 얘기지만 그 남의 말이 너무 나에게 큰 상처를주었을 때,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의욕을 잃었을 때 전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아빠의 말은 100% 틀렸어요. 전 할 수 있고, 이렇게 힘들 때에 특히 부모님이 좀 도와주시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전 모든 희망을 잃었는 걸요. 모든 힘을 잃었죠. 제 능력을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이젠 그렇게 내가 노력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얼마쯤 이야기를 했는데 곧 8시가 되어 결론을 못 내렸죠. 사실 지금 제겐 전화통화도 금지된 상태예요.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저며 오네요. 이젠 학교에서 억지로 명랑한 척할 힘도 없어요. 제 처지를 생각하면 마구 울음이 나와서 학교에서도 거의 울상으로 지내다시피하죠. 절 이해해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물론 제게 큰 힘이 되지만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진 못하고 있어요. 으악 소리라도 막 지르고 싶어요. 아저씨, 전 아빠 때문에 소심하게 자라난 듯 싶어요. 아빠는 성격이 좀 괴팍하거든요. 말을 아주 함부로 하죠.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마구 해요. 욕을 하는건 아니지만 속을 밟아놓는 말들을 마구 해요. 아빠 때문에 제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르죠. 전 아빠 말에 대꾸도 못하고 있으니깐요.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눈물이나 뚝뚝 흘리며 땅바닥을 쳐다보는 일밖에 할 수가 없는 걸요. 이런 제 자신이 또 더욱 미워지고 싫어지네요. 엄마 아빠가 제 성적을 보고 실망하셨다는 건 알지만, 그건 그들이 절 성적 때문만으로 키워 왔기 때문일 거예요. 여태까지 성적이 꽤 좋았거든요. 아빠 엄마는 제가 성적 좋은 거 하나 빼면 사랑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나 봐요. 성적이 떨어지니깐 여지없이 시달림을 받고 있어요. 하긴 전 부지런한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성적이 좀 좋았다는 거 그거 빼면 정말 사랑해 줄 가치가 없는 애인지도 모르죠. 머리가 아프네요. 울었더니 눈도 아프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예요. 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거든요. 제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내일 아침에 또 눈이 부어 학교 갈 생각을 하니 끔찍해요.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 걸까요?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분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돼요. 아저씨의 답장만을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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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아저씨(십대들의 쪽지 발행인)하고 어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았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학생이 아저씨의 회답을 고맙게 여기기는 했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바로 또 이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학교에 갔다 왔더니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이고 공책이고 시험지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 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거라.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고 하는 아버지의 짓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이 학생은 구원을 청한 것이다. 셋째, 아버지가 이러는 까닭은 성적 때문이다. 이 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까지 성적 보고 저를 키워 왔다고 생각한다. 성적말고는 저를 사랑해 줄 가치가 없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본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성적이 나빠지니까 고등학교도 다니든지 말든지... 하고 자기를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넷째, 아버지의 말은 100% 틀렸다. 자기는 그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도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저러니 어찌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니 무슨 희망이 있는가? 죽고 싶다. - 이것이 이 학생의 마음이다. 다섯째, 이 학생은 전에는 성적이 괜찮았는데 요즘 와서 좀 나빠진 것 같다. 그 까닭은 쓰지 않았다. 이 학생은 지금 집에서 바깥과 전화통화조차 금지당한 상태로 감금당하다시피 되어 있는 듯하다. 여섯째, 이 학생의 성격은 본래 아주 밝았던 것 같다. 한때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고 했는데, 농구선수로 경기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다녔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괴로워도 학교에서는 명랑한 척 했는데, 이제는 그럴 힘도 없어졌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도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속은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그렇단다. 그래서 소심하게 되고 열등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래도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 했다. 하긴 전 부지런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고 못하고 했지만 이런 말에서 도리어 착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성품이 엿보인다. 일곱째, 이 학생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가정에서 발언권이 없거나 아버지 주장을 따르기만 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성격이 괴팍해서 말을 함부로 한다고 했고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서 아들-딸일까?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을 울려 놓는다고 했다. 전화를 못하게 하고 책을 없애 버린 것이 모두 아버지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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