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한흑구편"
한흑구(1909~1979)
수필가. 소설가. 평양 출생.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포항 수산 대학 교수 역임. 30년대에 월간지 '대평양',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면서 단편 소설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수필에 전념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정 생활의 애틋함을 그렸다.
석류
내 책상 위에는 몇 날 전부터, 석류 한 개가 놓여 있다. 큰 사과만한 크기에, 그 빛깔은 홍옥과 비슷하지만, 그 모양은 사과와는 반대로 위쪽이 빠르고 돈주머니 모양으로 머리 끝에 주름이 잡혀져 있다. 보석을 꽉 채워 넣고 붙들어매 놓은 것 같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꿀단지가 깨어진 것같이 금이 비끼어 터진 굵은 선 속에는 무엇인가 보석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석류의 모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매끈한 사과와는 달리 무엇에 매를 맞았는지 혹과 같은 것이 울툭불툭한 겉모양 그 속에는 정녕코 금은보화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석류 한 개를 놓고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 행여, 금이 나서 터진 그 석을 쪼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석 주머니 같은 이 석류 한 기를 구하기에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나는 그것이 꽃 피는 봄부터 비바람이 부는 여름 장마철 속에서도, 또한 새맑은 가을 하늘에 추석달이 기울 때까지도, 얼마나 오랜 나날을 그리운 정으로 보고 싶고 갖고 싶은 꿈을 꾸었었나.
"할머님, 추석도 지나고 했으니, 이젠 그 석류 하나 따 주세요."
나는 석류나무집 할머니에게 이렇게 애걸했으나, 할머니는 또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니 약에 쓴다면서 벌써 따아? 찬서리를 맞고, 터져서 금이 나야 약이 되는 거지! 가래도 잘 삭고, 오랜 해수병엔 특효지. 몇 날만 더 참아요."
이렇게 한 해의 철이 다 기울어져서야, 끝내 구해 온 귀한 석류 한 개가 내 책상 위에, 내 눈앞에 고요히 놓여 있다. 석류나무는 소아시아가 원산으로 살구나무보다는 키가 작은 관상용의 낙엽 교목으로서, 이상한 꽃과 열매를 맺는 특색을 가진 나무다. 가지가 꾸불꾸불하고, 터실터실하고, 대추나무같이 삐죽삐죽한 가지 같은 메마른 작은 가지들이 이파리도 없이 여기저기 돋아 나온다. 석류나무는 물론 목재도 될 수 없지마는, 과실을 맺는 나무치고는 작은 편에 들고, 꽃도 열매도 많이 맺지 못한다. 그러나 그 꽃은 양귀비꽃같이 붉고, 아름답고, 그 꽃받침은 무화과와 같이 살지 누두형으로 되어 있으며, 나중엔 석류의 귀한 과피가 된다. 봄이 지나고, 장미의 계절이라는 6월이 되면 석류나무는 정열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장구같이 생긴 꽃받침 속에 선홍의 꽃잎으로 꽉꽉 채워서 그 둘레를 오붓하게 피어나온다. 꽃도 되고 또한 열매도 되는 이 육중한 꽃은 7월의 장마로 반 이상이 땅에 떨어져 어린애들의 손가락에 골무 노릇을 하기도 한다.
10월이 지나고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높아 가면, 주먹 같은 빨간 석류 열매들이 검푸른 이파리들 속에서 뻔쩍뻔쩍 빛나는 왕관을 쓴 듯이 빛나고 있다. 석류의 머리 쪽은 별과 같이 삐죽삐죽한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것들이 가을의 된서리에 쭈그러지면 돈주머니를 잘라맨 듯한 모양을 한다. 8월의 태양과 뜨거운 더위에서 정열을 다 뿜어 내지 못했는지 석류의 조롱박 같은 얼굴 위에는 매를 맞아서 부어오른 것같이 혹이 나와서 울툭불툭 매끄럽지가 않다. 나는 미국의 이미지스트인 여류 시인 힐다 둘리틀의(더위)라는 시의 몇 구절을 연상해 본다.
더위
이 짙은 공기를 통해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배들의 끝들을 뭉툭하게,
또한 포도알들을 동그랗게,
치받쳐 올리는 이 더위 속으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둘리틀의 (더위)라는 시를 읽으면, 모든 열매가 8월의 치받치는 더위 속에서 뭉툭하고 매끈하게 된다고 그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석류는 열매 속에 무수한 보물의 정열과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그 겉모양까지가 울툭불툭 튀어나오다 못해서 찢어지고, 깨어져서 크게 금이 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된다. 나는 석류를 손에 들고 깨어져 금이 난 그 속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수정 같고, 금강석 같이 빛나는 속을 쪼개 본다. 벌집같이 오몽고몽한 갈피 속마다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석류씨(알)들이 꽉 차 있다. 그 수정 같고, 금강석 같은 석류알을 하나 떼어서 입에다 물고 혀로 굴려 보면서 주요한 씨의 시집 "아름다운 새벽"에 실렸던 "앵두"의 일절을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되새겨본다.
5월에 무르익은 앵두 한 알,
입에 넣고 터질까 봐
그냥 혀로만 굴려 봅니다.
입에 넣고, 혀로 굴려 보고, 씹어 보는 그 맛, 입 속, 가슴 속, 머릿속까지 시원하고, 새틋한 그 맛. 온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가을의 된서리 속에서 과피가 터질 때까지 정열을 간직하고, 또 터져나온 그 기개의 참되고, 아름다운 결정이여. 나는 책상 위에 쪼개 놓은 석류알들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