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은상편"
시조 시인, 사학자. 호는 노산. 경남 마산 출생. 연희 전문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 수학.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작곡이 되어 가곡으로 불릴 만큼 시조 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 내었다. 뛰어난 문장가로 많은 수필집을 낸 바 있으며 교단은 물론 많은 학술 단체, 사회 단체에도 관여하였다.
한 눈 없는 어머니
김 군에게
김 군이 다녀간 어젯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소. 김 군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쓰고 싶으면서도 실상은 쓰고 싶지 않는 글이오. 왜냐 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도 슬픈 사연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꼭 써야만 한다는 무슨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었소. 그래서 이 붓을 들었소. 어젯밤 우리가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 거기서만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대는 품속에서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소.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생전에 뵈온 일이 없었기로 반가이 받아들었소. 그런데, 그대의 가신 어머니는 한 눈을 상하신 분이었소.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리에는 '불행'이란 말이 퍼뜩 지나쳤소. 그와 동시에 나는 그대가 더욱 정다워짐을 느끼었소. 그러나 뒤를 이어 주고받은 그대와 나와의 이야기, 김 군, 그대는 이 글을 통해서 어젯밤 우리가 나눈 대화를 한 번 되새겨 주오. 그대는 어느 화가의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그와 친하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소.
"그럼,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이 사진을 가지고 내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 그려 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보수는 상당하게 드리겠습니다."
"내 힘껏 청해 보지요."
그림으로나마 어머니를 모시려는 그대의 착한 뜻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소. 그래서, 나는 쾌히 약속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온 그대의 말, 그대는 가장 부자연스런 웃음과 어색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소.
"그런데 그림을 그릴 적에 두 눈을 다 완전하게 그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김 군, 순간 내 눈앞은 캄캄해지고 내 가슴은 떨리었소.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소. 두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소. 겨우 입을 열어 내가 한 말은 돌아가 달라는 한 마디뿐이었소. 나는 그대를 보내고, 괘씸하고 분한 생각에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소. 그대가 평소에 어머니의 눈 때문에 얼마나 한스러웠기에 그림에서라도 온전히 그려 보려 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려고도 해 보았소. 그러나 그대의 품속에 들어 있는,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눈 상하신 그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원망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소.
김 군,
그 즉석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대는 나의 열리지 않던 입에서 분명히 듣고 간 것이 있었을 것이오. 말없던 나의 입에서 듣고 간 것이 없소? 만일 없다면, 이제라도 한 마디 들어 주오. 그러나, 내 말을 듣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품속에서 그대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오. 상하신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세히 보오. 눈물 가진 눈으로 보오.
김 군,
한 눈을 상하신 까닭으로 평생을 학대 속에 사셨는지도 모를 그 어머니... 애닯소. 한 눈 없이 그대를 낳고 기르고, 그대를 위하여 애태우시다 이제는 저 차가운 땅 속에 드셨거늘, 자식인 그대마저 어찌 차마 그대 어머니의 상하신 한 눈을 업신여겨 저버린단 말이오? 그대에게 한 눈 가지신 어머니는 계셨어도 두 눈 가지신 어머니는 없었소. 온 세상이 다 불구라 비웃는대도 그대에겐 그 분보다 더 고우신 분이 또 누구이겠소? 한 눈이 아니라 두 눈이 다 없을지라도 내 어머닌 내 어머니요, 내가 다른 이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법이오.
김 군,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를 모시려 한 착한 김 군, 그런 김 군이 어떻게 두 눈 가진 여인을 그려 걸고 어머니로 섬기려 했단 말이오? 그대는 곧 한 눈 없는 어머니의 영원한 사람의 품속으로 돌아가오. 그리하여 평생 눈물 괴었던 그 상하신 눈에 다시는 더 눈물이 괴지 않도록 하오. 이만 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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