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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우송
이제로부터서는 차차로 겨울에는 보기 드물던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다. 꽃을 재촉하는 봄비로부터 우울한 가을비에 이르기까지 혹은 비비하게, 혹은 방타하게, 혹은 포르티시모로, 혹은 피아니시모로, 불의에 내리는 비가 극도로 절약된 자연 속에 사는 도회인의 가슴에까지도 문득 강렬한 자연감을 일으키면서 건조한 대지를 남김없이 적실 시기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비는 눈과 한가지로 도회인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변함없는 태고 시대를 의미하며, 오직 하나의 지묘한 원시적 자연에 속한다. 겨울에 변연히 내리는 편편백설이 멀고 먼 동경의 성국을 우리가 사는 곳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싣고 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아름다운 시취를 일으킬 수 있음에 못지않게 또한 비는 우리에게 경쾌하고 청신한 정감을 다양 다모하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지가 수필 일 편을 청함에 맡겨 우송을 택한 것은 지난 겨울에 백설을 바라다가 드디어 얻지 못하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되니 그 대상을 비의 자연에 구한다느니보다는 철이 되면 철따라 요사이 어쩐지 비 자체가 한없이 그립기 때문이다.
대체 비라는 것은 물론 누구의 의견을 두드려 보아도 그렇겠지만 왔다가는 개고 개었다가는 오는, 말하자면 갈망의 결과로서 내려 세갈의 의하면 써 그치는 바 물이라야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이리 하여야만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질서 속에 더욱 명랑한 정신을 획득할 수가 있다. 노아의 대홍수는 광휘 있는 40일 동안의 장림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 결과가 반드시 홍수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밤낮으로 비만 오고 햇볕이 조금씩 나타나려다가 또다시 내리는 비에 숨기어지고 마는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침울하게 되고 성급하게 되어 나중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하늘을 저주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비라는 놈을 욕하고 주먹질한다. 한발도 견디기 어렵지만 장림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듯 보인다. 사실에 있어 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까닭이다. 오직 그들의 소중한 금전옥답에 천연의 관개를 필요로 하는 농부들만이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이 '궂은' 일기에 대하여 저주할 때라도 도저히 동감의 의를 표치 않을 따름이다. 참으로 농부들은 너무도 직접적으로 이 하늘이 주는 기적, 이 하늘이 내리우는 축복을 체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우후의 놀라운 성장을 백곡천채에 있어서 관찰하고 하늘의 섭리에 감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그들에 있어서는 오늘과 같은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연 현상은 오히려 하나의 경이에 멈춘다. 그러나 반대로 도회인으로 말하면 피해를 입으면 입었지 그 은택을 느낄 기회를 전연 갖지 아니하므로, 우연히 우중봉사를 직무로 택한 자동차 운전수와 우산 제조업자의 일군을 제외하고 보면 이들은 모든 종류의 비에 불의의 모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도회인은 흔히 지루한 비가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바 영향을 통론하여 그 때문에 유래한, 퇴치할 수 없는 침울 속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좀 생각하여 보라. 사실 비가 오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첫째로 불쾌한 것은 젖은 발이다. 화사를 사랑하는 도회지의 신사 숙녀로서 분노의 정을 일으킬 뿐이 아니라 감기까지 모시고 오는 것이 실로 비 때문에 젖은 양말이며, 비 때문에 물이 된 구두인데야 어찌 이 괴악한 그의 소행을 용사할 수 있으랴! 비를 예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붓을 든 나도 비에 젖은 신발의 불쾌감을 생각하면 비에 대한 일말의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문제는 물론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타기를 사랑하나 다른 사람이 타고 달리는 것을 싫어하는 도회지의 자동차가 특히 비 오는 날에 우리의 아껴야 할 의복에 사정없이 펄을 한 주먹 뿌리고 도망간 아직도 괘씸한 기억을 찾아 낼 수 있으며, 또는 모처럼 벼르던 일요일의 원대한 이상이 예기치 않았던 비 때문에 애인을 위하여 특별한 마음으로 장만하여 둔, 혹은 한 송이의 비단꽃이, 혹은 한 권의 책이 불길한 징조를 예시하는 듯이 탐욕스러운 소낙비에 의하여 속속들이 젖고야 말았던 애달픈 기억 등, 기타의 많은 불쾌한 기억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찾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가지가지의 회상을 더듬으면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가 적어도 도회에 사는 이상 비를 예찬할 기분이 안 될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성급한 마음을 잠깐 억제하고 조금쯤 이에 대하여 반성할 여유를 갖는다면 이 따위 구구한 추억은 가히 문제될 거리가 아니다. 비의 폐해를 구태여 이런 추억 속에 찾는다면 우리는 그 반면에는 또한 항상 비의 이익이 병행하고 있는 사실을 예증치 않을 수 없다. 가령 비가 오니까 떠나가려는 애인이 좀더 우리 곁에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며 비가 오니까 틀림없이 찾아올 터인 채귀의 언제나 같은 힐난의 액을 면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여기서 우리는 생략하여도 좋은 많은 용무, 많은 회합이 불의의 강우로 인하여 결연히 단념될 수 있는 데서 유래하는 방, 저 명랑한 쾌감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체 떨어진 구두를 신고 흙물에 들어간다고 해서 비가 싫다는 것은 무어라 하여도 좀 창피한 감상이다. 두 다리를 조종하여 길을 다니는 이상엔 청우를 불문하고 무엇보다도 신발 단속이 급선무일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악화가 소위 인간 삼환의 일자로서 지적되는 것도 이유 없지 않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폐리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비에 대하여 안전한 신발을 신고 있을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마다 장차 오는 휴일에 잔뜩 처담은 단꿈이 비 때문에 깨어진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노상에서 우연히 대우를 만나 암만 속력을 내어 달음질을 했어도, 물에 빠진 새앙쥐 신세를 짓고야 말았다는 수도 있을 수 없는 터에야, 소수인이 드물게 겪은 바 불운한 예를 가지고 구태여 비를 원망할 수도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없는 일이 아니냐? 이리하여 우리는 도회의 비를 한없이 찬미하려는 자이지만, 우리가 비를 찬미하려기 때문에는 우리는 먼저 비에 약한 무리를 물리치고 비에 강한 무리 속으로 몸을 집어 넣지 않으면 아니 된다. 비에 강한 무리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닥창이 두꺼운 구두를 신은 사람을 의미하며, 밀회를 갖지 않는 건전한 사람을 의미하며, 여름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휴가를 이용하여 피서갈 때에도 오히려 항상 변함없이 초열의 도회지를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것은 의미한다.
풍우한설에 대하여 우리가 이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안전지대를 갖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 안전 지대인 우리들의 집 창문에 우리가 서로 기대어 거리의 모든 생활이 비비히 내리는 세우에 가벼이 덮이어 거대한 몸을 침면시키고 있는 정경을 볼 때 누가 과연 그 마음이 기쁘지 않다 할 수 있으랴! 이 집은 물론 우리 자신에 속한 집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집이며, 이 집은 또 혹은 좁아서 걱정이며 혹은 더러워서 곧 이사가려는 경우에 처하고 있는 때라도 우리는 이 때만은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의 불역의 귀결을 감상함으로 인하여 이 집은 벌써 좁지 아니하며, 이 집은 벌써 더럽지 않을 뿐 아니라, 주소간 속 깊이 잠재하여 떠나지 않던 전택의 욕망도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는 한 개의 시가로서 우리 앞에 군림하여 이 한없이 큰 매력은 불안하기 그지없는 세가를 그리운 자저로 화하게 하고 피할 수 없는 번민을 존재의 희열로 변하게 한다. 비의 위대한 정화력은 그 영역 속에 모든 사람에게서 그들의 괴로운 현실을 빼앗고 그것에 대치하되 보다 심원한 초현실로써 하는 것이다. 거리거리의 모든 구조물을 세척할 뿐이 아니라 그것은 실로 인간의 영혼까지를 세탁하는 것이다. 비가 노래하는 혹은 들리고 혹은 들리지 않는 단순한 절주는 가장 고상한 음악에 속할 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음악일뿐이 아니라 또한 그것은 변화무쌍한 일폭의 활화이기도 하다.
우리가 꺽다점에나 카페에 앉아서, 때마침 장대같이 내리는 빗줄기가 분간없이 유리창을 때리며, 바람은 거리와 거리를 휩쓸어 신사의 모자를 날리고 부인네들의 우산을 뒤집는 소란한 정경을 객관적으로 완미 할 수 있을 때 누가 과연 이에 쾌재를 부르짖지 않을 자이랴! 내 아직 경험이 적으므로 인생의 생활이 얼마나 한 행복을 우리에게 약속할는지는 감히 추단키 어려우나 적어도 현재의 내 생각 같아서는 이만한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시추에이션도 이 인간 생활 속에서는 그다지 많이 찾을 수는 없는 것같이 보인다. 이 때에 우리가 마시고 있는 한 잔의 차, 한 잔의 맥주는 이중으로 삼중으로 맛이 늘어가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나 우리가 재채기를 하고 욕설을 하며 젖을 옷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무고한 피해민을 안락 의자에 팔을 괴고 보게 되면 그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일복의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때 피로를 잊을 뿐 아니라 잠시 동안 근심을 잊고, 걱정을 잊고, 실로 흔히는 자기 자신까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뜻하지 아니한 천래의 일장 연극에 입장료도 지불함이 없이 여기서 완전히 도취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우신의 신묘한 희롱에 어찌 우리는 법열을 느끼지 아니할 수 있으랴!
비란 원래 사람의 예단을 반발하고, 측후소의 존재 의미까지 의심케 하도록 졸지에 내리고 또 그치는데, 떠도떠도 다 하지 않는 교치한 맛이 있는 것이지만, 여름의 더운 날 같은 때에 난데없는 일진광풍이 돌연히 소낙비를 데리고 오면, 참으로 이 곳에서 우러나는 재미야말로 진지하다 할 수 있다. 천하의 행인은 뚝뚝 던지는 비의 기습에 크게 놀래어 잠시는 이 불온한 형세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문제는 극히 간단하므로, 곧 동분서주, 서로 머리를 부딪쳐 가면서 피할 장소를 구하여 배회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에 혹은 물둠벙에 빠지는 신사를, 혹은 땅바닥에 미끄러지는 노인을, 혹은 치맛자락을 높이 껍어들고 달음질하는 숙녀를--이 하늘의 불의의 발작, 이 하늘의 기교한 즉흥시에 박수와 갈채를 아끼지 아니하고, 작약흔무하는 아해의 무리무리 속에 발견하기란 너무도 용이한 노력에 속한다. 이리하여 지극히도 황당한 수순이 경과한 뒤에 모든 불운한 행인이 그들의 불운한 몸을 집집의 벽과 벽에 꼭 붙임을 겨우 얻어서 천하는 오로지 한 곡조의 요란한 우성 속에 갇혀 고요히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가 만일 자동차에 편히 앉아 곳곳에 불안과 불평을 숨기고 있는 평화한 거리거리를 지나게 되면--이거 또한 한없이 기껍지 아니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간혹 집 문을 들어서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만 해도 감동하여 희열의 저을 금할 수 없지는 아니한가?
아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대의 젊은 남녀가 어딘지 산보 가는 것을 보고 확실히 흥분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그렇잖아도 우울한 마음이 더욱 우울해짐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제 비가 돌연히 쾌청한 공기를 교란하고 있음을 보게 되니 벌써 우리는 그들에게 선망의 염을 일으킬 필요는 전연 없다. 그의 좋은 양복과 그의 고운 애인은 가련하게도 이 비에 쪽딱 젖고 말았을 것이 아니냐?
비는 참으로 비가 와야 해될 것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하나의 큰 위안을 제공하는 바 비근한 일례에 불과하지만-또는 세우가 비비하게 내려 도회의 포도를 걸레질하는 정도로 먼지를 닦아 낸 때 같은 햇빛보다도 포근하고, 부드럽고, 또 시원한 비를 차라리 맞고 다님이 특히 정서 깊음을 과연 누가 느끼지 아니하랴? 이런 때엔 빈 자동차가 승객을 찾음이겠지, 열을 지어 힘없이 거리 위를 완보함을 봄도 확실히 통쾌하다. 도회에 비가 내리는 기쁨은대강 이러한 것들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으로써 비에 대한 찬미는 한 개의 자명한 사실로서 당연히 승인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임이 또한 틀림없다. 그러니 여기서 사람은 도덕과 윤리의 이름에 있어서 나의 '우송'에 단연 반의를 표명할지도 모른다. 즉 이를 도덕가류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가 비를 기뻐하는 것은 비 자체에 대한 순수 무잡한 희열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비에 의하여 피해를 입는 것을 즐기는 악의 속에 그 근본 동기를 둔다는 것이다. 엄격할 뿐인 윤리적 견지에서 보면 과연 그렇게 단순히 말하여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 이 경우에 한해서는 도덕은 결국 무생명한 한 개의 이론에 불과한 감이 없지 않다. 무어라 하여도 인생의 엄연한 사실은 다른 사람이 길에서 삐적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보면, 또는 잘못하여 손에든 찻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 우리와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어쩐지 그것은 까닭 없이 우습고도 즐거운 것을 항상 예증하여 주는 까닭이다.
우리가 마음이 나쁜 까닭으로써 웃는 것이 결코 아닌, 말하자면 인간 통유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기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인성 선악의 선천적 문제에까지 파고들어가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암만 도덕이 여기서 그렇지 않기를 명령하여도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비에 젖는 것을 보게 되면 어쩐지 자연히 유쾌하여지는 마음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음을 어찌하랴! 비에 젖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에 비에 젖는 것이 실수인 것을 한번 긍정하여 보면, 이 실수를 실수로써 책하되 웃음으로써 임함은 차라리 더욱 아름다운 도덕이라 말할 수 있다. 비맞은 사람을 보고 일일이 슬퍼하는 것이 참된 윤리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원래 처음부터 도덕이 감히 용훼할 수 없는 초도덕적 문제로서 인간의 예술감에 그 좋은 판단을 맡김이 더욱 온당치나 않을까 한다.
도덕이 어찌 되었든 여하간에 우리는 비를 찬미치 않을 수 없는 자이지만, 물론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비의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 그것이 즐거운 오직 한 개의 이유로서만 비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는 비 자체로서도 항상 아름다운 것인 까닭이다. 춘우를 몸에 무릅쓰며 거리를 거니는 쾌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사실 홍진만장인 건조한 대지가 신선한 비를 가질 때 지상의 어떠한 것이 과연 기쁨을 느끼지 않을 자이랴! 정직하게 말하면 비를 미워한다는 도회인도 비가 내리면 이 신선하기 짝이 없는 자연에 흔히 숙였던 우울한 얼굴을 드는 것이다. 윤습한 광휘 속에 그들의 안색이 쾌활해질 뿐이 아니라, 도회의 먼지 낀 가로수와 흔히 책상 위에 놓인 우리의 목마른 화원도 이 진귀한 하느님의 물을 떨며 마시며, 공원에서만 볼 수 있는 말라붙은 초원도 건조무미한 점에서 문득 눈을 뜨는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비를 자모의 천애한 손같이 여기는 것은 너무나 떳떳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 특히 염염한 하일에 경험하는 취우의 은택을 망각하여 버릴 수는 없다. 천하가 일시에 얼음 먹는 듯한 양미-이는 참으로 우리들 가난한 자에 허락될 유일한 피서적 기회이다. 이러한 기쁨이 만일에 평범한 것이라면, 우리는 비의 위대한 낭만주의를 얼마든지 사상에 구하여 흥취 깊은 예를 들어 말할 수가 있으나, 그것은 이 곳에서는 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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