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병에 대하여
문득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낀다. 몇 차례씩이나 근심스러이 손을 머리에 대어 본다. 그렇다면 머리도 좀 더운 것 같다. 드디어 병은 찾아 온 것일까? 한동안 앓지 않았으니 병도 올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억울하기는 하나 조용히 누워 몸을 풀어 버리는 것도 무방하겠지. 진실로 병은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보아도 그럴 리가 없는 데 이 이상은 그러나 어인 까닭이뇨? 하여간 병의 심방이 틀림없음을 우선 확증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므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전의 건강 상태와 현재의 증상을 혼자서 묵묵히 비교하여 보곤 한다.
원래 인생이란 순순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흔히는 괴롭고 또 재미조차 없는 물건인데, 이 위에 병까지 뒤집어쓴다면 어이하나?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가 마음에 결려 실로 걱정이 아닐 수 없으나, 일단 찾음을 받은 병은 일종 불가항력에 속하므로 내 힘만으로 물리칠 도리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병은 여기 찾아왔는지라 백사를 제지하여 관념의 눈을 감고 하여간에 병상에 몸을 이끌어 털썩 누우매 일시에 셀러에 이른바 '형이상학적 경쾌'가 퇴각을 개시함은 물론이요, 또 공동생활에 의하여 연계되었던 이제까지의 사회적 관련으로부터 졸연한 이탈이 강요되는 데서 유래하는 병상의 기묘한 고독과 무력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일종의 향락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병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니, 오슬오슬 오한에 떨리는 몸과 뻐근히 저리는 사지 속에서 잔잔한 세류 비슷이 한 갈래 흘러 오르는 병적 쾌감은 말할 수 없이 유수하고 몽환적인 나라로 병자를 인도하여 간다.
영영 축축, 악착한 이 세상에 초연히 누운 이 통쾌한 묵살, 이 초현실적 안정, 이 풍부한 시간, 장차 어찌 될지 병의 귀추가 물론 적이 걱정이야 걱정이지만 이왕 걸린 병인지라 할 수 없는 일이잖느냐, 불평 불만의 정을 품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므로 오로지 미지의 우인 병 그 자체의 음성에 경청하기로만 결심한다. 병은 실로 한 심방자와도 같으니, 그는 대체 나로부터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일까? 또 병은 한 여행과도 같으니 대체 나는 어디로 향발하여야 될 것일까? 또 병은 무엇을 경고하려는 한 친구와도 같으니 그는 말하는 것이다. '주의를 해야 되네. 이러한 곳에 자네의 결함이 있는 것이니 잘 좀 생각하고 반성해야만 된단 말일세.'라고 우정 찾아와서 병우에게 이 같은 충고를 하며 또 여행의 길로 나서게 하는 한 친구의 정의를 우리는 물리쳐야 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심방을 진심으로 감사하여야 될 것이니, 우리는 다만 여장을 준비하고 조용히 길을 떠나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지가 어디며 거리가 어느 정도이며, 또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모르는 아득한 꿈길의 출발임은 두말할 것이 없으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도자의 뒤만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사람은 병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하여 이 병에 대한 인식, 그 속에 실로 건강시에는 예상하지 못하였던 비극적 생존은 누워 있다. 병이 침입자의 인상을 주며 병자를 문득 습격할 때 모든 근친자의 동정이 또한 무력한 것이니 병실의 문이 닫쳐지는 순간 병자의 고독과 적막을 위무할 방법이라고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적이요, 독자적인 영원한 격투와 고민 속에서 그가 어렴풋이 보는 것은 이 곳에 두 방문자 있음이니, 하나는 본능이란 자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이란 자이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하자고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문득 각성하여 나를 심방한 것일까?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말하자면 병자에 대하여 의사 이상의 역할을 하는 자이니, 그들은 상호 제휴하여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중대한 발언을 하여야 되는 것이요, 병자의 치유를 위하여 일치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유하여야만 되는 것이요, 정신은 영혼을 병으로부터 구출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참된 건강이란 진실로 육체적 건강을 말하는 동시에 영혼도 역시 건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료한다. 원래가 이것은 그러한 것으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니,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치료는 자기 치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의, 어떠한 신약도 이 신비로운 업무를 대행할 수는 없다. 의사와 검제는 결국 본능이 수행하는 치료를 보조하며, 간호하며, 고무함에 불과하고, 무릇 치유 과정은 그 자신의 충동에 의하여 저절로 자발적으로 자연히 성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에 본능은 병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병적 징후에 직접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원시 병세는 합목적적으로 진행하는 법이며, 그 자체가 치유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적 증상은 진행될 데까지 진행되면 자연히 없어진다.
본능의 자기 치료는 그보다는 새로운 구성과 조직 속에 성립되는 것으로 병자와 의사는 이 새로운 구성과 조직을 향하여 가장 신중히 또 가장 완곡히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것이니 새로운 구성과 조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물론 휴양이요, 안정이요, 정력의 절약이요, 공기요, 일광이요, 쾌활한 기분 등이다. 여타지물은 그 후에 비로소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에게 만일에 경청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곧 본능이 전연히 단독으로 병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염원하고 유해한 것을 염기하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니, 대개 병중에 환자의 좋아하는 바가 병에 이로우며, 환자의 싫어하는 것이 병에 독이 되는 이유는 실로 본능에 엄격한 명령, 그 속에서 탐지되어야 한다.
본능은 신뢰를 굳이 의욕한다. 본능이 확호한 자신을 가지고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리하여 그에 대하여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보다 신속히 자기 치료의 효과는 발생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치료 방법의 근본 원리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본능이 육체를 치료함과 같이 정신은 영혼을 치료한다. 여기서도 치료가 자기 치료를 의미함은 물론이니, 다만 여기 있어서는 그 치료의 방향이 '하부에서' 오지 아니하고 '상부로부터' 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중병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경우에라도 불평과 원한과 절망을 품어서는 아니 되고 일종의 철학적 달관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병에는 평온한 영혼, 쾌활한 기분, 부동의 신념이 절대로 필요하다. 병이란 흔히 뻗대는 성질의 것이므로 병의 치유에는 또한 어느 정도로 유장한 시간과 공간(병원, 온천, 요양지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은 병에 대하여 은혜를 끼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중대한 투병의 단계는 이 모든 조건을 구비한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진지한 투병에 있어서 본능과 정신 양자가 병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중대한 발언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평상시에 심신을 잘 조정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요, 또 내가 건강을 하늘이 주신 선물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만 된다는 것이요, 그리하여 건강은 그 자체가 이미 행복과 열락을 의미한다는 것 등이니, 사실 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한 이 인생에 대하여 눈을 감고 무관심하게 지내왔다는 것, 그리하여 애와 선과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안전에 제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탓으로 하여 그대로 간과하여 버리고, 그와는 반대로 내가 이제까지 가장 훌륭한 선물의 낭비자로서만 살아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우리는 병석에 누워 흔히 내일부터는 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니, 병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원시 반평생을, 아니 일평생을 고생으로 산다는 것, 그리하여 사람이 고뇌를 통하여 자각과 청정과 개선에 이를 수 있으며, 모든 고뇌로부터 일편의 참된 혜지를 급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병은 여실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병은 참으로 우리들 사람을 위하여, 다행한 교도자다. 병은 사람의 새로운 육성을 위하여, 휴양을 위하여, 또 그 순화를 위하여 막대한 진력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위에 우리는 장차 병으로부터 해방되어 쾌유의 즐거운 날을 가질 것이 아니랴! 이 위에 더 여하한 위안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병은 흔히 사람을 신경지로 만든다. 환자의 이 애처로운 심리를 우리는 승인하지 못할 바 아니나 이것은 그가 아직도 정신의 그윽한 소리를 듣지 못한 탓이라 할지니, 병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구이함이 없이 병으로부터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대개는 자기 자신에게서 온 이 시련을 감수하여 써 자기를 육성하는 한 좋은 수단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사람은 병에서 크는 것이다. 아이들이 병에 울 때 우리는 보통 '자고 나면 낫는다.'고 말한다. 수면은 병에 있어서 약이다. 수면이 경과의 양불호를 결정하는 신묘한 복선이 되는 것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 사실이다. 수면이라면 병중에 우리를 부단히 습격하는 저 수마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병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은 독서다. 그런데 시력이 쇠하고 팔힘이 부족한데다가 책을 보기만 하면 우리의 정신이 잠들어 버리는 데는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무엇을 생각하다가도 곧 잠드는 것인데, 다시 잠을 깨고 나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병 중에 가장 우울한 시간은 식사 시간이니, 식사래야 미음 아니면 죽 등 속으로 가히 연설할 나위가 못 되거니와 구미가 쓰고 혀는 깔깔하여 그것일망정 약을 먹듯이 먹어야 되고 달게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기 때문이다. 병자는 식전 식후에 누워서 한가함에 맡겨 자기가 일찍이 맛본 진수 성찬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입 위에 가만히 얹어 보는 것이나, 단 한 가지라도 구미에 당기는 것이 없는 데는 삭연한 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병으로 누워서 사람은 더욱이 먹는 재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흔히 병 중에 못 먹은 분량의 음식을 병 후에 결국은 다 찾아 먹고야 만다.
또 병상에 누워 있으면 자기가 일어나서 직접 나아가 볼 수 없는 까닭으로 자기와 완전히 격리된 이 세상은 사실 이상으로 지극히도 멀어 보이는 법이다. 그 먼 세상에서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먼 세상의 소식을 전할 때 병자가 받는 인상은 예상 이상으로 신선하고도 강렬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공동 생활을 떠나서는 하루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말하는 것밖에 없다. 사람이 병에서 크는 것과 동일한 근거에서 사람은 또한 병 때문에 늙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 병을 앓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곧 수긍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번의 병에서 통절히 경험하였다. 하여간 병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는 기술을 체득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병자에 대하여 가장 중대한 생명 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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