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끼전 (1/3)
장끼전에 대하여
장끼전도 토끼전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의인소설이다. 여기서는 장끼(수꿩)과 까투리(암꿩)가 등장하여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소설도 인간의 모순점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또한 충효를 강조한다. 특히 이작품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장끼가 뭇꿩들을 위하여 살신 성인의 모범을 보이니, 이것은 다른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다. 또한 고대소설 대부분이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는데 여기서는 주인공 장끼가 죽자 아내인 까투리도 따라 죽어 비극미를 풍긴 것이 색다른 구성이다. 장끼전도 여느 작품처럼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대소설의 저자는 왜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소설이 실학의 융성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것에 유의해야한다. 실학이라는 것은 우리들 생활에 실제 나타나고 있는 현실성을 상대로 하는 학문인 만큼 소설과도 다깝고 또 이해할수 있는 학문이라 할수 있다. 해서 그 전까지 미처 들어오지 못한 중국소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한때 중국소설의 수입을 엄히 금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식자층에 널리 읽힌 소설은 자기 표현 욕구에 부심하고 있던 창작욕을 일깨워줘 우후죽순처럼 소설이 쏟아져 나왔으리라. 또한 이때 부녀자들에게도 소설이 대유행하였으니 서로 빌려 보곤했다는 기록이 도처에 보이고 있다. 이렇게 글을 아는 독자층이 소설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졌으나 수요가 공급보다 적어 자연히 소설을 지어보겠다는 욕망을 일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고료에 대해서는 현재의 판권 소유의 원고료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겠고, 다만 자기가 창작한 소설을 필사하여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울시내의 소위 세책집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여 발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가난한 선비가 소설책을 만들어서 팔기도하고 또 즉 그서을 남에게 빌려줘 약간의 돈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남의 작품도 필사하여 돈을 받고 빌려줘 살림을 꾸려 나갔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제도가 양반이 아니고서는 벼슬길에 오를수도 없고, 또 어디 취직을해서 생활을 한다는 것도 극히 곤란한 중인계급중의 유식한 인물이나, 당쟁으로 인해 정치계에서 밀려나 살림을 꾸려가기 어려운 가난한 선비가 아마 대부분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고전소설의 그 작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들 시민계급 인물들이 작품을 쓰고, 또 그것을 필사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고쳤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입장이 못되었으리는 것은 쉼게 생각할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소설이 대부분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음을 어떤 면으로 환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왓다는 것은 평민계급이 자각하고, 또 실학이 일어나는데 따라 일반시민의 문학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조용하고 으슥한 산골짜기 봉묏골이다. 뒤로는 기이한 바위들이 촘촘히 둘러싸 있고, 옆 좌우로는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는 진달래, 싸리, 머루덩굴 들이 옹기종기 솟아있고, 저 아래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그앞을 맑은 시냇물이 가로질러 굽이쳐 흐르고 있다. 봄이 되면 온갖 새들이 예쁜 모습과 고운 목소리를 자랑하며 나무 사이를 뚫고 날아다닌다. 여름이면 우거진 나무와 풀들이 앞을 다투어 하늘로 치솟아 위세를 부린다. 가을이면 날짐송과 들짐숭들이 이리저리 어울려 추수에 정신을 팔며, 겨울에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일년 동안의 노고를 잊고 잠들어 이듬해의 봄을 조용히 기다린다. 때는 어느 화창한 봄날. 사방을 살펴보면 진달래와 개나리 등이 그득히 펼쳐져 저마다 활짝 핀 꽃을 자랑한다.
"도련님, 고단하실텐데 이만 돌아가시지요." "지금 돌아가야 할 일이 없지 않느냐? 고단하다 해도 한잠자고 나면 몸이 가쁜해져서 새 기운을 얻게 되는 법이다. 좀더 있다가 꽃냄새에 싫도록 취해 보자꾸나."
나무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마리의 장끼가 주고 받는 대화였다. 한 마리는 면두가 우뚝 치솟고 꼬리가 유난히 길며 두 눈이 샛 별처럼 빛나는 귀공자로 바로 봉묏골 골짜기에 대대로 살아 내려오는 태수의 맏아들 한뫼도령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면두가 조그맣고 후줄그레한 꼬리에 두눈이 곧 감겨질 듯이 게슴츠레해서 어디로 보나 남의 하인 노릇밖에 못할 어벙벙한 모습인데 바로 태수의 집에서 대대로 종노릇을 해내려오는 하인 장끼의 아들 들머루 였다. 진달래꽃이 산과 골짜기를 뒤덮고, 잠을 깨어 피어난 새싹은 어서 오라 손짓하는 계절이라 한뫼도령과 들머루는 일찌감치 둥지에서 나와 고개를 넘고 들판을 건너 이곳 강벼랑에서 구경하는 중이었다. 해가 뜰 무렵에 집을 나왔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해서 들머루는 부지런히 날아가야만 어둡기 전에 집에 닿으리라 생각하고 조바심을 하는 중이었다. 들머루가 다시 재촉했다.
"도련님, 어서 가십시다. 늦게 들어가면 아버님이 꾸중하실 것입니다."
하뫼도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수는 없지 않는냐? 꾸중 이야 참으며 견딜수가 있지만 이아름다운 풍경은 한번 떠나면 다시 볼수가 없다." "하지만 꽃구경은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곳에 얼마든지 있을뿐더러 이곳의 모양도 올해가 지난다 해도 내년이 또있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꾸중은 도련님의 마음을 오랫동안 아프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자 한뫼도령이 마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네 말에도 그럴듯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보도록하자. 어? 저기 저것은 무엇이냐?" 한뫼도령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에 들머루는 덩달아 고개를 부쩍 치켜들고 두리번 거렸다. "무엇 말입니까? 소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뎁쇼." "어허 심분이 미천한 놈은 눈마저 밝지 못하구나! 저기 저 잔디위에 선녀처럼 아름다운 까투리 아가씨들이 놀고 있지 않느냐?" 들머루가 쳐다보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 아가씨들 말입니까? 소인은 벌써부터 보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보시고 야단 이십니까?" "상놈은 욕심이 많아서 눈에 띠는 것도 많구나. 저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보고 왜 돌아가자고 안달부달했느냐?" 들머루가 히죽 웃고 대답했다. "소인이 바른 말을 드리리다. 사실은 도련님이 저 아가씨들을 보고 딴 생각을 일으킬까 봐 어서 돌아가자고 재촉한 것입니다." "허허... 네 녀석은 눈만 빠른줄 알았더니 눈치 또한 빠르구나. 과연 저 아가씨들을 보니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구나.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라. 어서 이리로 데려 오도록 해라." 들머루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련님은 성미도 급하십니다. 저들이 어떤 아가씨들인 줄이나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네놈은 정말 무식한 상놈이로다. 사내 대장부가 처녀를 보면 우선 만나볼 생각부터 해야지, 그누가 신분을 알고자 한단 말이냐?" 한뫼도령의 말에 들머루는 펄쩍 뛰었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저 아가씨는 우리 꿩들을 다스리고 있는 임금님의 무남독녀 공주님이십니다. 오늘 어쩐 일로 저렇게 시녀 몇 명만 이끌고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탐을 내어도 안될것이니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들머루를 꾸짖었다. "듣거라, 이 무식한 녀석아, 제아무리 신분이 높다해도 까투리는 장끼를 남편으로 삼는 법이다. 그리고 남편이 될 장끼들 중에서 누가 먼저 공주의 마음을 사로 잡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저 아가씨들도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히 내게 마음을 둔것같다. 들머루야, 어서 가서 데려 오너라." 하뫼도령이 호령호령하자 들머루는 어이가 없어 자꾸만 달랬다. "도련님, 저까투리는 한 나라의 공주님입니다. 그러니 이쪽을 바라본다 해도 정다운 눈은 아닐것이니 제발 딴생각은 마십시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서릿발처럼 차갑다고 하더라도 내 가슴에서 치솟는 이 뜨거운 정열은 걷잡을수가 없구나. 만나지 않고 이대로 돌아갈수는 도저히 없다." 들머루는 안타까운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도련님과 짝이 될 까투리가 무수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말고 어서 고개를 돌리십시오." "인석아, 자기의 마음도 어쩔수 없는 떄가 세상에 많은 법이다. 저분 공주님도 나를 만나기만 하면 내 마음을 곧헤아리고 나와 평생을 함께 지내려고 할 것이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 공주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군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도련님이 꼼짝없이 잡혀가서 목숨을 잃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거두시고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무슨 배짱인지 고집 불통이었다. 지금 당장 붙들려가서 죽는다 해도 만나보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겠다. 어서가 데려 오도록 해라. 들머루는 안색이 변해 속으로 부르짖었다. '큰일 났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애당초 이쪽으로 오지 말 것을 그랬구나. 잘못하다가는 우리 도련님 목숨만 잃게 될 것이다.' 들머루는 어쩔줄을 모르다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안됩니다! 제발 소인의 말씀도 좀 들어 보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한뫼도령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어떨게 해도 누를 수가 없었다. 해서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이런 발직한 놈, 갔다 오라고 하면 갔다 올것이지 말대꾸가 왜그리도 많으냐? 만일 거역했다가는 집에 돌아가서 다른 하인 들을 시켜 네 깃털을 뽑고 면두를 뜯도록 하겠다. 그게 싫거든 어서 가서 냉큼 모셔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들머루는 집에가서 곤장을 맞을지언정 대궐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소인은 죽으면 죽었지 못가겠습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날개가 빳빳하게 굳어져서 목을 도무지 뭉직일수가 없구만요." 들머루가 죽을 듯이 엄살을 부리자 한뫼도령은 참다 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에이,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싫거든 그만둬라. 내가 몸소 가볼 테니까!"
한뫼도령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하늘높이 몸을 솟구쳤다. 이를 본 들머루도 어겁결에 뒤쫓아 푸르륵하고 날개를 쳤다. 두 마리의 장끼는 허공을 가로질러 위세당당하게 까투리들이 놀고 있는 잔디밭 위에 풀써 내려 앉았다. "에그머니!" 까투리들은 기겁을 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대는 늦었다. 공주만은 한 마리의 시녀와 함께 잔디 옆 숲속에 겨우 몸을 숨길수 있었지만 다느 까투리시녀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마리의 장끼 앞에 어쩔줄을 모르고 몰려 있었다. 그러나 행여 공주에게 해나 끼치지 않을까 해서 눈을 팽팽하게 치뜨고 있었다. 한뫼도령은 의젓하게 인사를 차렸다. "무례하게 군 것을 영서하십시오. 저는 저쪽 봉묏골에 살고있는 한뫼라는 자입니다.저기 숨어 계시는 저분 아가씨를 만나 뵈러 염치 불구하고 왔습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한뫼도령의 태도에 겁에 질렸던 까투리들은 얼마간 마음이 놓엿다. 그중에서 가장 영특하고 용기있는 시녀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매섭게 꾸짖었다. "잘못은 이미 저질러 놓고 무슨 용서를 구한단 말이죠? 우리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왕님의 무남독녀 이신 공주님을 모시고 나온 궁녀들이예요. 그러니 이곳은 장끼가 얼씬할수 없으니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이 자리를 뜸녀 무사하겠지만 잠시라도 어물쩍 거렸다가는 신변이 위태롭게 될 것이오." 횐뫼도령이 어찌 순순히 물러가겠는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들이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라는 것도 알고 있소, 또 이곳에 함부로 들어올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온 곳이니 만나지 않고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시녀 까투리가 머럭 호통을 쳤다. "이렇게 무엄하고 경우를 모르는 장끼가 있나! 설사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도 미천한 몸으로 어떻게 귀하신 공주님을 만나 보겠다는 것이요? 할말이 있거든 시녀장인 내게 말하도록 해요." 한뫼도령이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비록 공주님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내가 할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직접 아뢸 테니 부디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시녀장은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다시 꾸짖었다. "바위보다도 더 답답하고 굼뱅이 보다도 더 미련한 장끼가 있을줄이야! 다시 한번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면 바로 저아래 있는 경비대장에게 알리겠소. 공연히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어서 자리를 뜨오!" 그래도 한뫼도령은 막무가내였다. "이미 목숨을 각오하고 온 이상 이대로 돌아갈수는 없소이다. 공주님을 해코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공주님을 뵙게 될 때가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고집은 똥고집이로다. 더 말해 보았자 내 입만 아프겠다. 얘들아!" 시녀장은 한쪽에서 웅크리고 관망하4고 있는 조그만 까투리들을 돌아보고 외쳤다. "네이!" "어서 내려가서 경비대장에게 고하라. 공주님이 나들이 나오신 이곳 잔디밭에 난데없는 장끼 두 녀석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주둥이가 세고 발톱이 날카로운 경비병을 당장 올려 보내라고 일러라." "네이!" 명을 받자 시녀 까투리가 후르륵 낏을 치고 나무 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바로 이때, "얘들아 어찌 그리 소란하냐?"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공주가 더 이상 보고만 있을수 없어 마침내 몸을 나타냈다. 주둥이가 유난히 곱고 날개에 윤기가 기름을 칠한 것처럼 자르르한 것이 과연 귀한 몸답게 품위가 있고 고귀해 보였다. 그러나 시녀장이 땅에 이마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공주마마, 죄송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정신나간 장끼 두놈이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야료를 부리고 있기에 경비대장에게 알리러 보내는 참이옵니다." 공주가 근엄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내게 할말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말이라고 하더냐?" "제가 대신 전해 올리겠다고 말했으나 직접 아뢴다고만 하고 물러가지를 않나이다." 공주는 한쪽에 서있는 한뫼도령을 힐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를 해치러 오진 않은듯하니 경비대장에게 알리기 전에 무슨 말인지 들어보자꾸나. 알리러 가는 아이를 도로 불러라." "몸소 만나시겠다니 이 어인 말씀이옵니까? 저런 무엄한 놈은 털을 뽑고 눈을 빼내어 다시는 못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벌을 내려야 할 것이옵니다." 시녀장은 아뢰고 나서 한뫼도령을 흘겨보앗다. 공주가 듣고 안색이 변하며 꾸짖었다.
"나라의 법이 그러할지라도 용기잇는 자에게는 양보가 있어야 한다. 목숨을 각오하고 이런데를 찾아오는 용기가 아무에게나 있을수 없는 일이다. 내가 몸소 만날 테니까 너희들은 물러가라." 공주의 엄명인데 어찌 거역하겠는가. 시녀장은 저만큼 날아 내려가는 시녀를 도로 불렀다. "얘야, 공주님의 명이시니 돌아오너라." 하고는, 한뫼도령 앞으로 걸어와 퉁명스럽게 일렀다. "이번 한번만 공주님이 그대를 만나시겠다고 하오. 귀하신 몸이시니 말을 삼가서 하고 즉시 물러나도록 하오." 한뫼도령은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만나뵙게 해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다른 말씀을 듣게 할 리가 있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하고는, 공주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공손히 절했다. 공주가 답례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궁녀들만 노는 곳에 어인 일로 공자는 찾아 오셨소?" "공주께서 죽음 대신 만나뵙게 해주신 은혜 백골 난망이옵니다." 한뫼도령은 다시 한번 예를 차리고 나서 양해를 구했다. "여쭙기 황공하오나 시녀들을 잠시 멀리 해주소서." "무슨 말이 그리 은밀하오?" 공주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미 만나보기로 한 바에 굳이 여럿이 있는 앞에서 말하라고 하기는 싫었다. 이 젊은 장끼가 수상하게 굴면 즉시 군졸들을 불러 물리칠수가 있기 때문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공주가 명령하자 시녀들은 하는수없이 멀찌감치 물러갔다. 그러자 한뫼도령이 모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제가 여쭙고자 하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씨도 화창하고 해서 여기까지 놀러 나왔다가 공주님의 자태를 한번 뵙고는 젊은 가슴이 마냥 설레이고 황홀한 나머지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이 공주님의 높은 지체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저의 애틋한 말씀을 드리러 이렇게 감히 나섰나이다." "무...무슨 말을..." 뜻밖의 말에 공주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듯 정면에서 사랑의 고백을 들은 적이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공주의 작은 가슴은 달달 떨리기까지 했다. 한뫼도령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신분의 몸이오나 공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비길수 없나이다. 공주님이 제 뜻을 받아주신 다고 하면 언제든지 공주님을 위해 이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부디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듣고 어떯게 대답하라는 것이오? 백성의 혼인은 부모가 정해주는 것이며 공주의 혼인은 오직 대왕마마만이 결정하시는 것을 모르시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한뫼도령은 실망하지 않고 거듭 여쭈었다. "물론 혼인의 절차는 대왕마마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마음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애타게 사모하는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겠노라고 한 말씀해 주십시오." 공주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인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대답하라고 하시오? 공자의 심정을 알았으니 다음날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오." 한뫼도령은 하는수없이 작별을 고할수 밖에 도리가 없엇다. "그럼 공주님의 회답을 기다리겠나이다. 저는 봉묏골 태수의 아들 한뫼라는 자이옵니다. 언제쯤으로 알고 기다려야 할지..." "내게 맡기고 어서 돌아가도록 하오." "높고 푸른 하늘을 믿듯이 공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겠나이다. 부디 다시 뵐 날을 알려 주십시오." 하뫼도령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는 일이 어떻게 될가 하고 목을 움츠리고 있는 들머루에게 소리쳤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두 마리의 장끼가 푸드득하며 하늘로 치솟아 저편 골짝기로 멀어져 갔다. 공주는 애틋한 눈길로 사라져가는 한뫼도령의 뒷모습을 바라조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해가 서쪽 산너머로 숨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한뫼도령은 그 뒤 모든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인 들머루를 데리고 언제나처럼 집을 떠나 언덕으로 날아 올라가도 쾌할하고 즐겁게 뛰놀생각은 않고 나뭇가지나 잔디밭에 앉은채 멍하니 있을때가 많았다. 두 눈은 항상 공주가 사는 대궐이 있는 저편 고개 똑으로 향해있었으며, 구름조각 하나만 지나가도 무슨 소식이 오지나 앟을까 해서 고개를 쳐들어 보곤했다. 그러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뿜었다. 들머루는 보기가 안타까와 옆으로 와서 말했다. "도련님, 이렇게 기다리신다고해서 소식이 빨리 오고 기다리지 않는다고 올 소식이 안 올리도 없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병이라도 난다면 몸만 축날뿐이니 어서 꽃구경이나 하며 벌레도 잡아먹고 하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의 귀에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얘야!" "네, 도련님." "저기에 솟아 있는 저 검은 점은 무엇이냐? 궁궐에서 공주님이 보내는 심부름꾼이 아니냐?" 들머루가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심부름꾼이 아니라 바위 틈에 솟아잇는 나뭇가지 인뎁쇼." "그러면 저기 먼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은 무엇이냐? 저것은 분명리 까투리가 아니면 장끼렷다?" "에이, 도련님두... 먼하늘이 아니라 바로 저 고개위를 날고있는뎁쇼. 까투리가 아니옵고 까불기 잘하는 종달새이옵니다." 한뫼도령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벌써 여러날이 지났는데 왜 아무런 기별이 없지? 분명히 소식이 있을 터인데, 왜 아무 새도 날아오르니 않느냐?" "아무렇게나 말한 아녀자의 말을 도련님은 너무 믿고 계십니다. 공주꼐서는 벌써 도련님을 까맣게 잊고 지금쯤은 다른 신랑감과 즐겁게 얘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서 공주의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 버리도록 하십시오." 들머루가 아뢰는 말에 한뫼도령은 화를 벌컥 냈다. "시끄럽다! 상놈이란 할 수없구나. 너희 상놈은 아침에 한 말을 저녁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마는 공주는 결코 그런 일이 없는 법이다. 공주의 말 한마디는 마위처럼 굳고 나뭇잎처럼 싱싱한 것이다. 아, 저기 저 이리로 기어오는 것은 무엇이냐?" 들머루가 보고 기급을했다. "저건 삵괭이놈입니다. 이렇게 있지 말고 어서 몸을 피합시다. 이러다가는 도련님 눈에서 저 무서운 늑대나 사냥개도 모두 공주가 보낸 사신으로 보이겠습니다요." "괴로움과 기다림 속에서 이렇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늑대나 사냥개에게 잡아먹히어 세상을 떠나는 편이 좋겠다." 얼빠진 소리를 하는 한뫼도령을 서둘러 재촉하여 들머루는 간신히 삵괭이의 공격을 피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뫼도령은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신히 문안을 드리고는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된 어머니가 한밤중에 한뫼도령이 잠자리를 몰래 찾아왔다. 그러자 아들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멀거니 본채 눈을 또랑 또랑 뜨고 있지 않은가. "한뫼야, 밤이 벌써 깊었는데 왜 자지 않는거냐?"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묻자 한뫼도령은 공손히 아뢰었다. "어머님,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무일도 이닙니다." "얘야, 이 어미가 보건 데 분명히 근심이 있는 것 같구나. 어디 무슨일인지 얘기해 보렴."
어머님, 누구에게나 잠 못이루는 밤이 있는 법입니다. 곧 잘테니 어머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가서 주무십시오."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엇다. "옛말에도 어미의 눈길은 불빛보다도 빠르고, 그마음은 천리 떨어진 곳에서도 닿는다고 했느니라. 보아하니 너는 며칠 동안이나 잠을 자지 않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가슴속에 있느니라. 어서 무슨일인지 이 어미엑게 들려다오." "별것이 아니니 너머님은 돌아가 주무십시오, 소자도 곧 자겠습니다." 한뫼도령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으나 어머니마저 괴로워할까 봐 임을 꼭 다물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야원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파 탄식을 하고는 힘없이 돌아섰다.
이튿날 아침, 한뫼도령은 일어나자 마자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면두에 흰빛이 갑돌 만큼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한뫼야, 요사이 네게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다고 네 어머니가 말씀하시니 사실이냐?" "약간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기는 하오나 그렇게 대단하지 는 않사옵니다." 아들이 조심스럽게 아뢰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얘기할 일이 있어서니라." 아버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을 건너편 골짜기의 태수댁을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아버님." "그댁에 혼기가 찬 아리따운 낭자가 있느니라. 우리와 집안도 엇비슷하고 또 친하게 지내기도 하던차에 너희들의 혼인얘기가 나와서 마로 어제 성사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느니라. 곧 혼레식을 올릴수 있게 준비를 서두르겠으니 너도 그리 알고 있거라." "혼인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입니까?" 한뫼도령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아들의 마음을 아지 못하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댁과는 대대로 우의가 깊고, 그 집 낭자는 어렸을 때부터 너도 잘알고 있는 처자가 아니냐? 용모뿐 아니라 재주도 뛰났느니라. 들리는 소문으로는 벌써부터 너를 은근히 사모해 왔다는 구나. 우리집에 그런 며느리가 들어오게 되다니 정말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다." 한뫼도령이 놀란 나머지 급히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님!" "왜그러느냐?" "그 혼인은 취소해 주십시오." "무엇이!" 아버지는 놀란 나머지 압을 딱 벌렸다. 거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그쳤다. "취소하다니? 너도 전부터 그 낭자를 칭찬해오지 않았드냐? 그 낭자보다 더 나은 신부감이 어디 있다고 이번 혼사를 취소하라는 것이냐?" "아버님, 그낭자가 못생겼다거나 나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혼인을 할생각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애써 변명하자 아버지는 음성을 낮추어 달랬다. "너보다 어리고 못난 장기들도 버젓이 혼인을 하고 자손들을 낳으며 잘살고 잇다. 그런데도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 "장끼마다 겉모습이 다르듯이 속마음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으니 부디 취소해 주십시오." "그낭자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누구에게 마음을 준 상대라도 있다는 말이냐?" "..." 한뫼도령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앗다. 공주와 약속이라도 했다면 서슴치 않고 아버님께 아뢰겠지만 혼자 사모하고 있는 일을 여기서 밝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변명하랴. 그러자 아버지가 다시 추궁을 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어디 다른데 약속했느냐?" "..." 아들이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아버지의 음성은 노기까지 띠었다. "왜 말을 못하느냐? 너는 아비의 말을 이유도 없이 거역하겠다는것이냐?"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적어도 두 골짜기의 태수가 만나서 여러모로 의논을 거듭한 결과 정한 혼사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취소할 수가 없다. 공연히 말을 꺼냈다가는 우리 마을과 저쪽 마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유도 없이 혼인을 취소한 우리가 싸움에 지게 되고, 집안가지 망할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래도 이번 혼사를 취소하라고 말하겠느냐?" 듣고보니 정말 큰일이엇다. 한뫼도령은 자기도 모르게 등에 식은 땀이 흘러 우선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아버님,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담나 얼마동안의 시간을 주십시오. 갑자기 듣고 보니 소자는 얼떨떨 하기만 하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렇게 하렴. 혼인을 하기로 한다면야 언제 하겠다는 대답은 조금 늦은들 괜찮다. 그만 나가 보아라." 아버지의 앞을 물러나온 한뫼도령은 이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만만한 하인 녀석을 붙들고 하소연 할수밖에 없었다. "들머루야, 일이 대단히 급하고 까다롭게 되었구나. 어떻게 하면 수습이 되겠느냐?" 들머루는 눈을 껌뻑껌뻑하다가 대답했다. "지금이야 말로 마음을 돌릴 좋은 기회입니다. 공연히 공주님만 생각하다간 큰일날 것입니다." 그러나 한뫼도령이 이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 "공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없애느니 차라리 세상을 하직하겠다. 너는 다시는 그런 소리 말아라." 도련님, 제발 생각을 고치심시오. 이번 혼사를 취소하면 우리 마을분만 아니라 온 집안이 큰 욕을 당할것입니다. 부모님에게 화를 끼치는 일이 두렵지 않습니까?" 한뫼도령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자신없이 입을 열었다. "공주님과 혼인을 하게되면 그쪽과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공주민의 마음이 도련님에게 향하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 한뫼도령은 대꾸할 말이 없어 바위 옆에 힘없이 웅크리고 앉아 공주가 있는 대궐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색들이 소란스럽게 웃어댔다. 벌써 정오가 되었다는 신호다. "오늘도 소식이 없는가 보구나. 아, 이애타는 마음을 공주님이 알아 주셨으면..." 한뫼도령이 기운없이 중얼거릴 때 듦루가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댔다. "앗, 도련님! 저것이 무엇입니까?" "무얼 말이냐?" "저기 검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보인단 말이냐? 상놈의 눈에는 허깨비만 보이는 모양이구나." "분명히 장끼와 까투리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도련님, 저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한뫼도령도 이쪽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똑똑히 볼수 있었다. "정말 장끼와 까투리가 날아오는구나! 저 뚜렷이 빛나는 깃은 궁궐에서 보내는 사신과 시녀의 표시이다. 분명히 공주님이 보내신 사신이로다." 한뫼도령이 뛸뜻이 기뻐할 때, 사신으로 날아온 장끼와 까투리는 한뫼도령과 들머루가 주춤거리고 있는 상공을 한 바퀴 쓰윽 돌더니 바위 옆으로 가볍게 내려 앉았다. 그러더니 장끼가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공자가 이곳 태수의 아드님이십니까?" 한뫼도령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궁궐에서 나오신 사신들이시군요. 먼길에 수고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이유로 저를 찾는지요?" "공주마마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공주마마께서 보내신 이글월을 받으십시오." 까투리가 깃 속에 간직해온 가랑잎 편지를 내놓았다. "아, 공주님의 글월이라구요!" 한뫼도령은 공주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한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편지를 펼쳐 보았다.
한뫼공자님 보옵소서. 공자님을 한 번 뵈옵고 소녀는 평생 공자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려고 생각했습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장벽이 있을 줄이야 그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마마마를 통해서 제심정을 아바마마께 아뢴즉, 아바마마께서는 벌써 부마(임금의 사위)될 장끼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시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혀 놓은 공자님을 즉시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한뫼공자님! 우리들은 이세상에서 인연이 없는듯하니 험악한 나졸들에게 욕을 보시기 전에 멀리 떠나서 다른 나라를 찾아가 복되게 지내 십시오.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쓸수가 없습니다. 공주 올림.
편지를 읽은 한뫼도령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절망감! 안타까움!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안돼! 공주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이상 나는 도망칠수가 없어!' 한뫼도령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욱고 굳은 결심의 빛이 눈동자에 나타났다. "들머루야!" "예, 도련님." "나는 이길로 이분 사신을 따라 공주님이 계시는 궁궐로 들어가겠다. 그러니 너 혼자 들어가서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공주님과의 사연과 이 편지 받아보았다는 것을 내 대신 낱낱이 여쭈어라. 이번에 궁궐로 들어가면 살아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으니 부디 나를 찾으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라." 이 비장한 말에 들머루는 펄쩍 뛰었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발 사리를 냉정히 판단하십시오. 살아 돌아올 길이 없는줄 알면서 왜 대궐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까?" 한뫼도령의 태도는 오히려 차분했다. "공주 없는 세상 살아서 무엇하리. 일찍 죽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부모님께 불효자식 되고 이웃마을 태수의 따님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공주님이 계신 궁궐에서 죽는 것이 차라리 내 소원이다. 내가 죽음을 당하게 되면 크게 소문이 날것이고 시체또한 들판에 버려질 것이다. 들머루야, 네가 나를 주인으로 여기고 있거든 시체나마 찾아 고이 묻어다오. 그리고 나 대신 부모님을 잘 모셔다오." 들머루는 정신이 아득하여 급히 외쳤다. "도련님, 어쩌자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신다고 해도 부모님계 인사나 드리고 가십시오." "헤어지는 괴로움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길어지는 법이다. 나는 이대로 떠날테니 네가 대신 인사를 드려다오." "도련님, 그렇다면 소인도 따라 가겠습니다. 공주님없는 세상 도련님이 살수 없듯이 도련님안계신 곳에서 소인이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들머루는 몸부림치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어댔다. 한뫼도령은 측은한 시선으로 하인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사신 쪽으로 돌렸다. "편지에는 나더러 이곳을 떠나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이길로 그대들을 따라서 궁궐로 들어가겠습니다. 나졸들에게 잡히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공주님을 남나 뵙고 싶으니 그대들은 먼저 들어가서 말씀좀 전해 주시오. 전날 공주님을 뵈옵던 잔디밭에 앉아 기다리겠소이다." 사신으로 온 까투리가 공손히 대답했다. "우리들은 공주마마의 심부름꾼이니 공자의 말씀을 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신은 즉시 작별을 고하고 날아 올라 사라졌다. 한뫼도령과 들모루도 하늘로 훌쩍 치솟아 올라갔다. 고개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 그들은 전날 공주가 노닐던 잔디밭위에 내려 앉았다. 주위의 광경은 전날과 다를바가 없는데 한뫼도령의 마음은 견딜수 없을 정도로 허전하고 쓸쓸했다. 공주를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오게 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공주가 오기전에 나졸들이 오면 꼼짝없이 묶여 가서 귀신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공주가 편지에서 말한 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하직을 고하고 다른 나라를 찾아가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뉘우침이 간혹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이런 마음을 누르고 공주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이때, 궁궐쪽에서 한 날짐승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한뫼도령이 있는 곳까지 날아온 까투리는 뒹굴 듯이 땅 위로 내려앉았다. "앗, 공주님!" 한뫼도령은 급히 공주의 앞으로 달려갔다. 공주가 말하였다. "공자님 이렇게 또 다시 뵙게 되어서 저는 죽어도 한은 없사오나 어쩌자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말을 마치자 공주의 섬세하고 커다란 두 눈에서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뫼도령은 이 모습에 감격하여 말하였다. "이미 저의 한 목숨은 공주님께 바쳤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언젠들 공주님을 잊을수가 있으며 어디에선들 찾지 않을 떄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로 인해서 부왕마마의 노여움을 사셨다니 이토록 쿤 죄를 어지해야 합니까?" 이에 공주가 말하였다. "전번에 여기에서 뵌 뒤에 밤낮으로 생각해 왔사옵니다. 그러나 전생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서로 해로할수 없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사옵니다." 공주는 잠시 한뫼도령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다시 말하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몹시 기쁘오나 나졸들이 몰려오기 전에 속히 이 자리를 떠나셔요." 공주의 염려에 한뫼도령은 차분히 말하였다. "수백의 나졸들이 온다해도 조는 조금도 무섭지 않으며 수천의 화살이 제개 날아와도 저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주님의 신변이 도리어 걱정되오니 이 자리를 뜨도록 하십시오." 공주는 한뫼도령의 진지한 말에 대답하였다. "저도 공자님과 한께 여기에 있껬사옵니다. 여기에 제가 있으면 공자님이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또 제가 이곳에 있으면 나졸들이 온다해도 공자님을 거칠게 대하지는 못할것이니까요." 한뫼도령은 공주를 책하려는 듯 말하였다. "여기서 계속계시는 것은 제게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만일에 부왕마마께서 더 큰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드때는 공주님의 신변에 화가 미칠텐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주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나직히 말하였다. "공자님께오서 저의 몸을 위해서 목숨가지 버리시려는데 어찌 전들 혼자 살아서 욕된 목숨을 보존하려 하시겠습니까? 정녕코 저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사옵니다." 한뫼도령과 공주님은 가장 긴받한 환경속에서 가장 기쁘고 만족스러운 마음에 도취하였다. 그들은 서로 눈물을 쏟으면서 굳은 사랑을 몇번이고 맹세 하였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소란스러워지며 수많은 날짐승들이 궁궐쪽에서 치달아 올라오고 있엇다. 조그만 참세떼처럼 검고 작은 날짐승들이 쏜살같이 공주와 한뫼도령이 있는 잔다밭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올수록 날짐승들의 모습은 커가고 뚜렷해졌다. 그것은 궁궐을 지키는 나졸의 무리였고 한뫼도령을 잡으러 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 그대로 있거라!" 제일 앞서 날아오던 나졸 한놈이 땅에내려서기도 전에 한뫼도령을 향해 소리쳤다. "..." 한뫼도령은 이미 모든일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조금 전에 큰소리쳤던 나졸들이 한뫼도령에게 물었다. "네가 봉묏골에 사는 태수의 아들이 분명하렷다!" 한뫼도령은 아무 동요도 없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친위부 대장은 얼굴이 일그러 지며 말하였다. "우리는 궁궐을 지키는 친위부대다. 대왕마마의 어명을 받들고 너를 체포하러 왔다." 말을 듣고 난 한뫼도령은 친위부대장에게 물었다. "대체 대왕마마가 무슨 까닭으로 나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셨소? 나는 아무런 죄도 없소이다." 친위부 대장은 큰 소리로 말하길, "이 괘씸한 놈! 대왕마마께서 아무런 이유없이 너를 잡으라고 하셨겠느냐! 여봐라, 어서 이 죄인을 묶도록 하라!" 우렁찬 친위부 대장의 호통이 떨어지자 나졸들은 우루루 달려가서 한뫼도령에게 밧줄을 들이대었다. "이 무엄한 놈들!" 갑자기 공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네이!" 하고, 나졸들은 한번더 호총쳤다. "이놈들, 네 놈들눈에는 감히 공주가 보이질 않느냐? 감히 공주의 앞에서 그런 무엄한 짓을 하고도 목숨이 성할줄 아느냐?" 친위부 대장은 공주의 태도에 황공한 듯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 얼굴에는 공주를 비웃는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공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책하듯 말하였다. "이분으로 말하자면 자기 처소에서 노희들에게 들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다. 옛부터 찾아오신 손님네께는 성대한 대접을 베푸는 것이 예의이거늘, 정중히 모시지는 못할지언정 이토록 무례하게 포박을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행동들이냐?" 이에 친위부 대장이 말하였다. "하오나 공주마마,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이나라에 두분대왕마마가 없사옵니다. 어명을 받들고 죄인을 잡는데 포박을 하지 않는 일이 없사옵니다. 공주님 말씀이 간절하기는 하나 어명을 어길수는 없는 아닙니까?" 그러자 공주는 크게 노해 말하였다. "그렇게는 못한다. 이도련님을 묶어가는 놈들은 한 놈도 용서없이 큰 벌을 내리리라." 말을 듣고 난 친위부대장은 은근히 위협하는 말투로 말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공주마마! 부디 노여움을 진정하시옵소서. 어명을 거역할수 없는 일아닙니까?" 말을 마치고 나졸들을 돌아보며 명려하였다. "무엇을 꾸물대느냐? 어서 죄수를 묶도록 하라!" 이에 나졸들은 대답했다. "네이!" 부대장의 날카로운 호령이 떨어지자 남은 나졸들은 공주에게서 들은 꾸중의 분풀이도 할겸 아까보다도 더욱 우악스럽게 달려들엇다. 그리고는 한뫼도령의 날개와 다리를 곰짝 못하도록 옭아 놓았다. 이에 한뫼도령은 크게 노하여 부르짖었다. "이놈들! 내기어코 네놈들으 단 한놈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릴 것이다. 두고 보아라. 이 괘씸한 놈들 같으니." 친위부 대장과 나졸들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엇다. 공주는 이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였다. "안된다. 네놈들이 이 공자님을 이토록 참혹하게 끌어가지는 못할 것이리라." 공주의 말을 듣고 한뫼도령은 타이르듯이 말하엿다. "공주님은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것이나 편안히 가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연이 제게 남아 있으면 살아 나와 공주님을 평생 모시게 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부디 눈물을 거두시고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는 직접 앞장을 서서 한뫼도령은 걸어 나갔다. 이렇게 되자 공주는 위업도 기운도 다 잃고 친위부 대장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여봐라! 제발 모질게 모시고 가지는 말아다오!" 부대장의 태도는 공손하기는 했지만 공주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앟고 나졸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죄수를 끌고 내려가자. 대왕마마께서 몹시 기다리시겠구나." 하고는, 포졸들을 이끌고 위세도 당당히 궁궐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뫼도령이 옥에 갇히게 되자, 그날부터 공주는 침식을 전폐하고 슬퍼하였다. 이에 시녀들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올리고,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하였으나 공주는 슬프고 괴로운 펴정으로 밤낮을 지냈다. 그러므로 공주의 몸은 나날이 수척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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