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
도
도나라의 열왕은 성이 매요, 이름은 화며, 자는 선춘이라 하였으며 나부의 사람이었다. 그의 선조에 상나라를 도운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고종의 재상이 되어 공으로 도 땅에 봉을 받았더니 중세에 초나라의 대부 굴원이 쫓긴 바와 같이 되어 합려성에 피한 것으로 인연하여 자손이 대대로 여기에 살게 되었다. 몇 대가 지나고 고공사에 이르러서 무른의 도씨의 딸을 취하여 아들 셋을 낳았는데 왕은 그 큰 아들이었다. 도씨는 낳아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그가 시집가는 날에 당하여는 반드시 그의 집을 빛나게 할 것이로다라고 시인이 칭송한 바 있다. 그는 일찍이 요지에 가 놀다가 왕모가 붉은 열매 하나를 주어 받아 먹은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왕을 날 때에 이상한 향기가 풍겨 그것은 달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때의 사람들은 그를 향해아라고 불렀다. 성장하여 그는 영자하고 상려하였으며 성질이 박질한데다가 풍채는 아결하였고 선조의 유훈을 이어받아 그 덕이 높아서 원근을 막론하고 그의 풍문을 듣고 노인을 이끌며 어린 것을 데리고서 찾아와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차에 등륙이 만물을 방자하게도 학살함에 천하가 워낭을 하여 마지않게 되자 고죽군인 오균과 대부 진봉 등이 그를 추대하고 왕으로 세움에 합려성을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도라 하고 목덕이 왕이 되어 축월을 세수로 삼고 다섯을 상용의 수로 쓰고 색은 백을 숭상하였다.
가평 원년 동 십 이 월에 사제를 지내고 붉은 매로 초목을 매질하고 가평이라 건원했다. 그는 열 두 달을 1년으로 하고 일 월은 시에 달을 달리하고 날을 말한 것을 쫓은 것인바 다 이것을 본받았다. 2년에는 계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는 월성 출신으로 정숙하며 요조한 덕이 있고 여공에 근면하여 왕의 덕화를 돕는 바가 되었기에 때의 사람들은 그를 주나라의 태사에 비유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두는 바다. 집과 나라의 흥망은 부부간에서 비롯되는 것이매, 시에 갈담의 읊음은 나라가 새로 일어날 징조였고 산의 뽕나무로 만든 활의 예언은 집안이 망한 징후였다. 도왕에 도씨의 모친이 있고 또한 계씨비를 얻었으니 그 흥성은 마땅한 일이었도다. 3년에 오균을 배하여 재상을 삼았다. 균의 자는 차군이고 초나라 상주의 사람이었다. 그는 청허하며 과욕하고 곧은 절개를 지킴으로써 호를 원통처사라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에 상강에서 오 땅으로 옮겨와 왕과 더불어 죽마지우가 되었었던 바 등륙이 그의 어진 소문을 듣고는 고죽군으로 봉하였다. 등륙의 난리가 일어나자 오균은 도왕에게로 나아가 진언하기를 "등륙이 음탕 잔학하여 만민을 잔해함에 그 풍성이 미치는 바에 떨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인민이 시들며 만물은 얼고 주리어 천하가 다 갈상지탄을 하고 해내에 운예지망이 간절하오니, 비록 주옥의 궁실을 지닌 가멸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멸망은 곧 목전에 있는 것이오니다. 이제 공은 밝은 덕이 있고 명성이 높으며 호걸을 영도하고 있는 터이오니, 이 기회에 합려에 의거하여 널리 영웅을 모으면 누구라 어깨를 으슥거리며 와서 술두루미로 맞이하면 따르지 않으리까? 원컨대 신은 촌토를 얻어 공훈과 이름을 죽백에 드리고자 하나이다." 라고 하니 공이 크게 기뻐하여 좌우에서 떠나지를 못하게 하고, "하루라도 차군이 없을 수가 없다."로 말하고 나서, 이에 이르러 배하여 재상을 삼고는 다시 천호를 봉하여 주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두는 바다. 옛날 제왕의 홍성에는 반드시 보좌하는 어진 사람이 도왔으니, 상나라 탕왕 때의 유신의 들에 있어서나, 제나라 환공 때의 관중에 있어서나, 한나라 고조 때의 소하에 있어서나, 소열 때의 제갈에 있어서는 다 이것이었다. 군주는 어진 사람을 만난다면 마땅히 냇가에 배를 얻은 것같이 여기고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도 같이 생각하여 오로지 어진 사람을 써서 모진 자를 배제하고, 일단 어진 자에게 일을 맡기면 그를 의심하지 말고 군주는 보필의 효험을 책할 따름이며, 신하된 자가 충정의 절개를 다한다면 나라의 일은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은 창설할 것이다. 도왕이 오균의 말을 듣고는 왕을 도울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의 옆에 두어 영구한 계획을 수립함에 참례시키었으매 그에게 일을 하고자 하는 뜻이 크게 있었음을 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으랴! 이에 비추어 본다면 후세의 인군은 어진 사람을 다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이면서도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었으랴!
4년에 진봉 백직 등이 등륙을 대파하여 그를 멸망시키고 대장군이 되었다. 진봉의 자는 무지라 하였다. 그는 그의 선조가 진나라에서 봉을 받았으므로 말미암아 이름을 진봉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는 건장하게 큰 키에다 푸른 수염은 창과 같이 뾰죽하여 날카롭고 동량 절충의 재능이 있었던 데다가 성품이 곧아 중심에 표변함이 없었다. 진봉 그는 백직과 마찬가지로 장군직에 보임되어 언제나 충정의 마음을 다하고 있다가, 이 때를 당하여 등륙이 밤을 이용해서 합례성으로 쳐들어오매 두 장군은 몸을 일으키어 무장하고 높이 거산을 펴고 석단 위에 서서 크게 소리를 내어 호령을 하니, 위풍이 진동하여 등륙은 흰수레를 타고 와서 단하에 이르러 함벽하고 항복을 했다. 그는 다시 남아 있는 적의 패주자를 모조리 소탕하고 즉일로 풍류를 불며 개선을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진봉을 이양대장군에 배하고 백직은 승상대장군을 삼았다. 백직은 자를 열지라 하고 위땅의 사람이었다. 성질이 곧고도 견실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 그는 매양 싸움에 이기고서도 공을 무지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가 대수의 풍토가 있다고 일컬었다. 두충, 동백, 산치, 노송, 종려, 소철 등에게 조서를 나려 작을 주었다. 등륙의 난리에 조정의 신하가 많이 포위를 당하였는데, 그 때 두충 등도 또한 적중에 빠져 위협능 당함이 심급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고 굴하지 않으매 적이 감히 해를 가하지 못했었다. 왕은 그들의 지조가 굳음을 가상히 여기고 이이ㅔ 조서를 나려 포상하고 각각 한 계급씩을 올려 주었다.
5년 봄 2월에 동성의 사람들을 봉하여 준바 아우 예를 대유공으로 삼고, 악은 양주공을 삼았으며, 사촌 동생 영은 서호공을 삼고, 질인 방은 파공을 삼고 그 나머지는 다 후백에 봉한 바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의 조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오호라! 나는 외롭고도 약한 몸으로서 선조의 유열을 이어 옛나라를 새로이 일으키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넘어진 고목에 새싹이 돋아 나온 것과 같아 요행히도 과질이 끊임없이 면면함이로다. 이에 나는 봉례를 밝히어 분토를 하노니 각기 봉토가 그 포모를 심고 본손과 지손이 백세에 길이 경사를 많이 누릴지니라." 6년 겨울 10월에 왕이 오 땅에 출유했을 때 경정산에 올라서 되놈에게 저를 불게 하며 진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그것을 들음에 그 풍류 소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돌아가 물에 소쉐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죽어 갔다. 왕비가 어려서부터 좀버러지병의 신병이 있어서 아들을 낳지 못하였기에 오균은 왕의 아우 양주공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으니 이가 곧 동도의 영왕이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두는 바다. 오호라 열왕의 덕은 크고도 아름다웠도다. 왕은 어진 신하를 얻어 천하를 바로잡고 어진 장수를 써서 변방을 다스리어 싸움이 없이도 화 시켰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었으며, 동성을 봉하여 그 은혜를 길이하고 충절의 신하를 포장하여 그 풍성을 높이었으니, 옛날 은주의 치국이라 하더라도 이에 더함이 없었도다. 그러나 왕은 질박하고도 간략하게 나라를 세우자마자 죽어서 간책에 실릴 가언과 선행이 아주 적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당
당나라 명왕은 성은 백이고 이름은 연이었으며 자는 부용에 은거하였었다. 그의 부친의 이르은 함담이라 했고, 처음엔 야야계에 살았다. 모친 하씨는 광채가 찬란한 창포의 꽃이 핀 것을 보고 그것을 입에 집어 넣어 삼키고서 아이를 잉태하여 왕을 낳았다. 왕의 얼굴은 아름다워 마치 천인과도 같았고 탈속적인 의취가 있었으며, 정갈한 것을 생명으로 하면서도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물을 좋아하여 항사아 물 가운데에 있었다. 그러기에 그를 수중 군자 혹은 수진인이라고 불렀다. 하나라가 망하고 난 후 임금이 없을 때 상주의 사람인 두약과 백지 등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매 그는 수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하고 7월을 세수로 삼고 전당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남당이라 불렀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같이 말해 둔다. 도나라는 목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고, 하나라는 토덕으로 왕이 되어 붉은 색을 숭상했으며, 당나라는 수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던 바이다. 그것의 연유는 알 수가 없다.
덕수 원년에 정전의 법을 열고 전폐를 쓰기 시작했다. 이 해 풍백이 그의 임금인 계주백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금이라 하고 서북 땅을 겸병하니 녹림의 적이 또한 이에 복종했다. 왕은 두약을 승상으로 삼았다. 그 조서에는, "그대는 맡은 바를 잘 보살펴서 그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이며 동시에 오로지 이 당나라의 이름을 떨치게 할지니라."고 하였다. 두약은 당의 어진 재상이었던 두여회의 후손이었다. 7월에 왕은 수정궁으로부터 나와 추향전에 행어하여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이 때를 당하여 천하가 다 녹림적의 소굴이 되었거늘 다만 당만은 깊은 개울에 높은 성을 구축하였기에 병폐를 입지 않아 인민은 모두 편안하고 국가가 은부하여졌다. 그리하여 이에 수형의 돈이 많아 거만에 달하고 천택의 어별이 불가 승식이었으며, 아랫 사람들은 실 만들기에 힘쓰고 윗사람들은 조석으로 구슬 헤아림에 힘쓸 따름이었다.
3년에 야야계의 관리 김량이 급한 보고를 올려 말하기를, "적이 있어 야야계를 침입하여 먼저 아압지를 쳤는데 그 적들은 다 사당주를 타고 목란의 삿대를 저으며 부용의 옷을 입고서 채릉곡을 노래불렀으며, 그 모양과 거동, 그리고 복장이 우리 나라 사람과 흡사하였기로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도 노랫 소리를 듣고서야 그것들이 적인 줄을 알았나이다. 그 노래는, '옆 잎 비단 치마가 한 색인데 부용 붉은 볼이 두 갈래로 피었고나, 아무케나 못 속에 들어가야 보이지 않는 사람 노래 듣자 온 줄 알겠세라.'고 하였나이다. 이리하여 우리 편은 깜짝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이 칼에 맞아 죽고 부상을 당한 것이옵니다." 라고 하자 왕은 크게 놀래고 "우리 나라의 지세는 험악하여 천연의 참호인데 어떻게 날아 넘을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고는 곧 장수 백빈한테 조서를 나리니, 백빈은 관졸 수천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쳤다. 이 때 군졸 중에 이라는 자가 있어 입으로 바람을 낼 수가 있었는 바 이에 큰 풍랑을 일으키어서 적의 배를 몰아붙이고 정신없이 흔들어 젖히니 적은 크게 두려워하고는 배를 끌고 달아났다. 애당초 국가가 국토를 방비하는 준비가 없어 마침내는 적의 환을 치르게 되었더니, 이 때 백빈이 강의 요해의 곳곳에다 질려를 부설하고서 돌아오고 또 마료로 하여 복파장군을 삼아 도적을 방비하니, 이로부터는 남북의 사람들이 감히 강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마료는 마원의 후예로서 옛 선조의 복파장군호를 이어받았다. 도인이 묘법경을 가지고 왕에게로 나가 말하되 "설경을 하면 사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연에 잉태되어 극락세계에 화생하옵니다." 라 하니 왕은 크게 기뻐하고 즉시 수륙 도량의 시설을 하니, 그것에 든 비용이 억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왕은 날마다 좌우의 모든 신하들과 같이 아침 저녁으로 설경만을 하고 나라의 일은 돌보지 않았다. 학사 문조가 청포에 엎드려 충간하기를, "불은 과시 무엇이옵니까? 그는 그릇된 교리와 사특한 말로 세상을 혹되게 하며 인민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옵니다. 제왕이ㅡ 도는 다만 유가의 경만을 지키어야 할 따름이어늘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부체 있는 곳에 불법을 하고 패엽을 옳은 경으로 아시옵나이까? 인생은 마치 나무의 꽃이 자리에 떨어지는 것은 귀한 것이 되나 똥간에 떨어지는 것이라면 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어서 이것은 즉 자연의 이치이거늘 인과설을 어찌 믿어 들을 것이 되오리까?" 라고 했으나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문조는 백빈과 동본 이성의 친족으로 성질이 고결하고 문장이 능난하여 왕직을 도았다. 첩여인 반씨가 제빈보다도 더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어느 때에 왕이 연꽃을 못 위에 늘어놓고 반씨로 하여 그 위를 걷게 하고서 하는 말이, "보보생연화"라 하고 육랑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때에 어느 아첨 잘하는 자가 있어 말하되, "사람들은 육랑을 연꽃 같다고 하나 신은 연꽃이 육랑가 같다고 여기옵니다."라고 하매 왕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둔다. 심하도다. 아첨하는 자의 말이여! 그 말은 실로 사탕의 풀을 씹는 것보다도 달고 그 아첨은 예수한 것보다도 더한 것이니 아아 슬픈 일이로다. 4년에 강리를 상주로 귀양을 보냈다. 강리라는 자는 초나라의 사람으로 자를 채채라고 하였다. 성질이 고결하여 직간으로 왕의 뜻을 거슬리게 하자 공자 가란은 참소를 하여 그를 귀양 보내게 하니 그는 수고의 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소를 지어 스스로를 원망하였다. 5년에 왕은 방술사 두생의 말을 들어 백로를 마시고는 병이 나서 좌우의 신하를 불렀으나 좌우의 신하들도 다 이슬을 마시고 입을 놀리지를 못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만 하하라 소리를 지르고 죽어갔다. 처음 왕이 동리처사인 황화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받지를 않았다. 그 때 금인이 녹림의 군병을 몰고 당을 에워싸기를 여러 달에 성 안의 인민이 다 굶주리어 말라 죽었던 바 두약 백빈 등도 또한 이 난리에 죽었고, 당나라는 겨우 5년 만에 망하고 말앗다.
황화의 자는 금정이라 하고 위인이 속지 않아 태고풍이 있었다. 그는 신세에 도 나라의 임금을 섬긴 것으로 말미암아 율리에 살며 홀로 굳은 절개를 지키고 있어 비록 금인의 난폭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었기에 그는 만적 선생이라 불리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둔다. 삼대의 홍체가 깜짝하는 사이에 있고, 사군의 존몰이 잠깐 사이었던 것으로서, 그것은 다만 동원의 편시와 남가 일몽일 뿐만이 아니라 봄바란이 부는 동산에서 쓸데없이 새가 슬피욺을 듣고 해가 지는데 못가의 대에 올라서 다만 운연이 잠겨 있음을 보는 것과도 같아, 이것은 옛날 중국 은나라 고도의 유허를 노래부른 맥수가와 주 나라 사람이 지은 서리의 시로는 그 탄식할 바를 비유한 것이 되지 못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며 애석한 일이 아니랴! 그리고 또 하왕이 옥매를 찾아서 도를 계승케 하였으니 그 덕이 충성스러울 것이요, 당이 삼각지전을 세운 것은 더욱이나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세상에 만초 모란 부용류가 있는바 이것들도 또한 하 당의 유손인가 한다. 이상의 것을 다 통틀어서 말할진대 즉 다음과 같다고 할 것이다. "천지간에서 인간은 단지 한 가지뿐이로되 꽃에는 천백 종이 있은즉 사람은 진실로 꽃의 수와는 같이 못한 것이다.
하늘은 꽃으로써 춘하추동의 시절을 행하고 사람은 꽃을 가지고 시절을 분간하니 인간이 어찌 꽃이 신용을 지킴과 같으리오! 꽃은 끊임없이 봄바람에 피고 가을이 되어 떨어져도 원망하지를 않으니 인간이 어찌 그와 같이 어질 것이랴? 그리고 또 혹은 뜰 위에 나기도 하고 분토의 가운데 나기도 하지만, 고하의 귀천을 다투지 않고 한가지로 꽃 피고 시드는 것이니 그 공심 역시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즉 꽃에는 지극한 어짊과 지극한 신과 지극한 공평에 또한 많고도 수하여 천성의 바른 것을 얻음이 있는 바다. 무리가 많음에 어찌 나라를 위한다는 것이 있고, 어질고 신 있고 지극히 공평하기가 이 같음에 어찌 임금을 위한다는 것이 있을까보냐? 그러나 무릇 사람은 한 가지 기능과 조금의 재주만 있어도 반드시 일세에 자랑을 하고 백대의 후세에 전하고자 하며 서로 공명을 다투어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꽃은 그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천성의 아름다움이 인간 중의 군자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송 나라의 염계 선생은 뜰 앞에 있는 풀을 매지 않고 하는 말이 '나의 의사도 한가지일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이같이 군자가 이와 한가지가 되고자 원한 것인즉, 그것의 성품이 완전하고도 바른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 문장에 오름을 구구하게 구하고 일에 공 이루기를 힘쓰는 자가 어떻게 그 성품이 완전하고 또한 바를 수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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