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 (1/3)
천하에는 네 개의 큰 바다가 있으니 동해와 서해, 남해 그리고 북해다. 이 네 바다는 용왕이 다스리고 있는데 동해는 광연왕, 서해는 광덕왕, 남해는 광리왕, 그리고 북해는 광택왕이라 불렀다. 남해 광리왕은 어느 해 봄에 영덕전을 새로이 짓고 다른 세 곳의 용왕을 청해서 크게 낙성식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게 탈이었다. 잔치가 끝난 후 광리왕은 먹은 것이 체했는지 자리에 눕고 말았다. 놀란 신하들이 바닷속에서 나는 온갖 약을 병구완을 했으나 효험이 없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용왕이 하루는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불쌍하구나. 짐이 죽은 다음에는 북망산의 깊은 곳에 묻혀 흰 뼈가 티끌로 변할 테니 세상의 영화와 부귀가 다 헛일이로다 .그 옛날 전국 시대의 육국을 통일했던 진시황도 삼신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사람을 보냈으나 소식이 없어 죽었고, 그 권세가 온 천하에 떨쳐졌던 한나라 무제는 백량대를 높이 쌓고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슬을 받으려고 구리 쟁반을 만들었지만 헛되이 죽었도다. 하물며 나 같은 미미한 왕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뇨. 그러나 대대로 내려오던 왕가의 가업을 놓아두고 죽을 일이 슬프도다. 마지막으로 이름 높은 의원이나 널리 청하여 자세히 진맥하고 약을 써보는 것이 좋겠도다." 이어 뭇신하들을 둘러보고 분부했다. "짐의 병세가 이렇게 위중하니 경들은 충성을 다하여 훌륭한 의사를 널리 구하여 군신이 함께 즐기도록 하라." 그러자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신이 듣자 하니 월나라의 범상국과 당나라의 장사군, 그리고 초나라의 육처사가 천하에 이름 높은 현인이라 하옵니다. 이 세 현인을 청해다 대왕의 병을 물어보시면 좋은 도리가 있을 듯하옵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대대로 충성심이 많은 수천 년 묵은 잉어였다. 용왕이 크게 기뻐하시어 곧 사신을 시켜 예물을 갖추어 세 사람을 청하여 오게 했다. 며칠 뒤에 세 사람이 용궁에 도착했다. 용왕이 수정궁으로 세 사람을 접견하실 때 기운이 없어 용상에 기댄 채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여러 선생이 짐을 위하여 천리를 멀다 아니하시고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와주시니 정말로 감사하오." 세 사람이 절하며 아뢰었다. "저희들은 어지러운 인간 세상의 천한 몸으로 높은 벼슬과 영화를 마다하고 자연 경치를 사랑하여 무정한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었사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뜻밖에 용왕님의 부르심을 받자옵고 용안을 뵈오니 황공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용왕이 크게 기뻐하시어 극진히 대접하며 용건을 말씀하셨다. "짐이 운수가 불길하여 뜻밖에 병을 얻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어 병이 골수에 스며들었오. 온갖 약을 써도 전혀 효험이 없으니 살길이 아득하오. 청컨대 선생들께서 큰 덕을 베푸시어 다 죽게 된 목숨을 살려만 주시면 그 은혜는 기필코 갚으리라." 세 사람이 용왕의 말을 듣고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뜻을 통하더니 장사군이 입을 열었다. "대체로 술이란 마음을 미치게 하는 나쁜 음식이옵고, 색은 사람의 목숨을 줄이는 근본이옵니다. 이제 대왕께서 술과 여자를 너무 가까이 하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사람은 젊어서 주색에 빠져 마침내 중한 병에 들면 편작-춘추전국시대의 명의-과 화타-삼국시대의 명의-도 다시 살아나기 어려우며, 금강초와 불사약이 산처럼 쌓였다해도 특효가 없으며, 인삼과 녹용을 매일 먹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니 재물이 백만금이 있다 해도 고칠 수가 없으며, 힘이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막아낼 길이 없는 것이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운수가 불행하고 대왕의 목숨이 다한 것이므로 병환은 다시 회복되시기가 어렵겠나이다." 용왕이 이를 듣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이 왔다는 말씀이구려? 슬프도다. 짐이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쓸쓸히 무덤 속에서 들어가면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올 수 있단 말인가. 춘삼월에 꽃피고, 사월이면 녹음 짙은 숲속, 팔구월에 노란 국화와 밝은 단풍, 동지섣달 눈 속의 매화도 다시는 못 보겠구나. 삼천 궁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황천객이 된다니 이 이상 슬픈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 선생께서는 신통한 재주를 다해 비록 효험이 없더라도 약이름이나 가르쳐 주오. 그러면 비록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오." 그러자 범상국이 빙그레 웃으며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용왕이 귀가 번쩍 뜨여 급히 물었다. "아, 그렇다면 살아날 수가 있단 말씀이오?" "그렇사옵니다. 물론 지금의 대왕 병환은 매우 위중한 상태이옵니다. 본래 병이란 증세에 따라 약 쓰는 방법이 다르옵니다. 한기가 침범한 병세는 시호탕이 좋고, 음기가 허한 데에는 보음익기전이 약이옵고, 열병에는 승마갈근탕이 좋고, 원기부족증에는 육미지황탕, 체증에는 양위탕, 다리의 통증에는 우슬탕, 안질에는 청간명목탕 그리고 풍증에는 방풍통성산이 좋습니다." 청산 유수처럼 설명하는 데에는 용왕도 황홀해졌다. "선생은 과연 박학다식하오이다. 그래, 짐의 병에는 어떤 약이 좋소?" "제가 열거한 이러한 약들은 대왕의 병환에는 하나도 알맞지 않습니다. 다만 오직 한 가지 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토끼의 생간이옵니다." "토끼의 생간?" "그러하옵니다. 토끼의 간을 얻어 김이 무럭무럭 날 대 잡수시오면 효험을 보실 것입니다." 용왕은 의아하여 물었다. "토끼의 간이 어찌하여 짐의 병에 좋다는 말이오?" 이번에는 육처사간이 절하며 아뢰었다. "토끼라 하는 것은 천지가 생긴 다음에 음양 조화로 된 짐승이옵니다. 이 짐승은 월궁에 들어가서 계수나무 그늘 속에서 장생약을 찧을 적에 음양을 먹어 눈이 무척 밝습니다. 병은 오행의 상극으로도 고치고 상생으로도 고치는 법인데 산은 양이오, 물은 음이옵니다. 그리고 간이라 하는 것은 목기로 된 것이오니 만일 대왕께서 토끼의 생간을 잡수신다면 음양이 서로 화합하나이다. 그러므로 병이 쾌차 하실테니 토끼의 간을 구하소서." 용왕이 듣고 기뻐하자 세 사람은 작별을 고했다. "푸른 산에 사는 친구들과 무릉도원-신선이 사는 곳-으로 꽃놀이를 가기로 언약이 있어 저희들은 이만 하직할까 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옥체를 부디 보증하옵소서." 이에 용왕이 좋은 선물을 하사하고 헤어짐을 섭섭해했다.
세 사람을 떠나보내고 용왕은 즉시 조정의 온 신하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신하들이 줄지어 들어와 동편에 문관이 서고 서편에는 무관이 서는데 좌승상 거북, 우승상 이어, 이부상서 노어, 효부상서 방어, 예부상서 문어, 병부상서 수어, 형부상서 준어, 공부상서 밀어, 한림학사 깔다구, 간의 대부 모치, 백의재상 궐어, 금자광록 금치, 은청광록 은어는 문관이요, 대원수 고래 대사마 곤어, 용양장군 이무기, 호위장군 사어, 표기장군 벌덕게, 유경장군 새우, 합장군 조개, 언참군 메기, 주부 자라는 무관이다. 그 밖에 청주자사 청어, 서주자사 서대, 연주자사 연어, 주천태수 승어, 청백리 자손 뱅어, 탐관오리 자손 오적어, 허리 긴 뱀장어, 수염 긴 대하, 구멍없는 전복, 배부른 올챙이 등이 주르르 들어와서 엎드렸다. 용왕이 뭇신하들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짐의 병이 위중하여 아무런 영약이 소용없었으나 오직 토끼의 생간이 신효하다 하니 그 누가 세상에 나가서 토끼를 사로잡아 오겠는고?" 그러자 공부상서 민어가 부복하고 아뢰었다. "대왕마마, 대원수 고래에게 전병 사마천을 내주어 잡아오게 하소서." 대원수 고래가 이를 듣고 앞으로 나와 노한 어조로 외쳤다. "우리 용궁과 토끼가 사는 육지는 서로 다른데 수중에 있는 군사가 어떻게 육전을 한단 말이오? 자신 있으면 공부상서 그대가 군사를 이끌고 가 보시오." 공부상서 민어는 대꾸할 말이 없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한림학사 깔다구가 나와 아뢰었다. "토끼라 하는 것은 미물 중의 미물이라 대왕의 위덕으로 그까짓 것 구하는데 염려하실 것이 뭐 있습니까? 토끼 몇 마리 바치라고 산군에게 편지를 내면 즉시 잡아 올릴 것이옵니다." 용왕이 듣고 그럴 듯하여 하문하셨다. "편지를 쓴다면 누가 산군에게 갖다 줄 것인가?" 간의대부 모치가 즉시 아뢰었다. "표기장군 벌덕게가 의갑이 굳사옵고 열 발이 있어 자유롭습니다. 또한 제 고향이 육지오니 편지를 갖다 주라 하옵소서." 그러자 벌덕게가 분이 잔뜩 나서 입에 거품을 부글부글 머금으며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수륙이 다른데 산군이 어찌 대왕마마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문관들이란 그저 입으로만 떠들기를 좋아하고 궂은 일은 우리 무관에게만 시키려고 하니 억울하옵니다. 자신 있으면 한림학사 자신이 편지를 가지고 가라 하십시오." 용왕이 들어보니 불쌍한 무관들이 문관들에게 평생 눌리다가 이런 때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기에 손을 들어 말렸다. "경들은 더 이상 떠들지 말라." 용왕이 명령하니 벌덕게와 깔다구가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이에 용왕은 눈길을 백의재상 궐어에게 돌리고 입을 열었다. "토끼의 간을 구하기가 시급한데 문무가 불화하여 쓸데없이 떠들기만 하는구료. 어느 신하를 보내면 좋을지 선생이 말해 보오." 궐어가 어찌하여 백의재상이 되었는가. 본래 벼슬하기가 번거롭다 하여 한가이 물러가서 좋은 경치와 벗삼고 문장을 닦기에 힘썼다. 해서 용궁의 군신들이 강호선생이라 존칭하여 나라에 일이 있으면 예관을 보내 청해다가 의견을 들었다. 그러므로 벼슬 없이 나라의 일을 보아 백의재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용왕이 묻자 백의재상 궐어는 궐하에 엎드려 아뢰었다.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밖에 없다고 옛말에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충성스런 신하를 지목하여 보내옵소서." 그러자 용왕은 그 말이 옳다 하여 말씀하셨다. "합장군 조개는 전신에 갑주를 입었으니 보내면 어떠한고?" 궐어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합장군 조개는 진정 대장부라 보내면 좋을 것이오나 두루미하고 원수지간이라 아니 되옵니다. 만약 서로 다투다가 낚시군에게 잡히면 큰일이 아니옵니까?" 용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한 신하를 지목하셨다. "언참군 메기가 긴 수염이 점잖으니 보내면 어떨꼬?" 이부상서 노어가 적격이 아니라고 아뢰었다. "요사이 종피 가루를 돌 밑에다 풀어놓았으니 메기는 민물 근처에 가면 죽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대대로 충성으로 이름이 높은 도미를 보내면 어떠한가?" 우승상 잉어가 즉각 반대했다. "서울은 쑥갓이 한창이고 시골은 풋 고사리가 날 때이니 보내면 소위 탕, 찜감으로 변할 것이옵니다." 용왕은 답답하여 다시 한 신하를 지목했다."올챙이가 저토록 배부른 것을 보니 속에 경륜이 가득 찼으리라. 올챙이를 보내면 어떠할꼬?" 좌승상 거북이 느릿한 어조로 아뢰었다. "올챙이는 보내면 한두 달 안에 못 돌아올 것이니 개구리가 되면 뱀에게 죽을 것이옵니다." 용왕이 듣고 탄식했다. "용궁의 이 많은 신하들 중에서 충성스러운 신하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정말 통탄스럽도다."
이 때 갑자기 한 대장이 앞으로 나와서 크게 외치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뭍에 나아가 토끼를 사로잡아 오겠으니 보내 주옵소서." 모두들 눈을 돌려 바라보니 머리는 두루 주머니 같고 꼬리는 여덟 갈래로 갈라진 수천 년 묵은 예부상서 문어였다.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셨다. "그대의 용맹은 짐이 잘 아는도다. 그대는 충성을 다하여 빨리 세상에 나아가 토끼를 사로잡아 오라. 성공하면 그 공을 잊지 않으리라." 하고는 즉시 문성 장군에 봉하려고 하셨다. 이 때 갑자기 한 신하가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문어를 꾸짖었다. "문어야, 네가 아무리 키가 크고 위풍이 좀 있다 해도 말주변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니 무슨 공을 세우겠다는 것이냐? 또한 세상 사람들이 너를 보면 좋아라 하고 잡아다가 요리조리 오려내어 국화 송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혼인 잔치와 환갑 잔치에 쓸 것이다. 그리고 여러 선비들과 기생들이 즐기는 술상이나 아이들의 군것질에 쓰일 것이 네 고기니 무섭고 두렵지 않느냐? 내가 세상에 나가면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었다가 일곱 번 다시 잡던 제갈량같이 귀신도 모르는 계교로 토끼를 사로잡아 오기를 손바닥 뒤엎듯이 할 것이다." 모두들 크게 놀라 바라보니 수천 년 묵은 자라로 벼슬은 주부였다. 문어는 자라의 이 같은 말을 듣자 크게 노한 나머지 두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쭉 벌리며 검붉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벽력같이 꾸짖었다. "요망한 자라야, 네 듣거라. 기저귀에 싸인 애가 감히 어른을 몰라보니 바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다. 네 죄를 논하자면 태산이 오히려 가볍고 바다가 얕을 것이다. 네 모양을 볼 것 같으면 참으로 이상야릇하니 어물전의 꼴뚜기도 웃을 판이구나. 사면이 그토록 넓적하니 나무 접시와 뭐가 다르냐? 저렇게 작은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느냐? 세상 사람들이 너를 보면 두 손으로 움켜다가 끓는 물에 솟구쳐 끓여내니 자라탕이 별미로다. 세도 있는 집의 젊은이들이 즐겨 먹으니 네가 무슨 수로 살아오겠느냐?" 자라가 듣고 또한 분노하여 마구 꾸짖었다. "너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오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오자서-춘추시대 오나라 충신-는 남보다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지니고서도 왕이 내려준 칼로 자결했고, 초파왕-초나라의 항우-은 그 기운이 세상을 덮을만 했으나 해하성에서 패한 것을 모르느냐? 어리석은 네 용맹이 내 지혜를 당하지 못할 것이로다." "흥, 네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떠드느냐?" "문어야, 내 재주를 들어보아라. 넓고 넓은 바다에서 푸른 하늘에 구름이 뜬것처럼, 거센 바람에 낙엽이 지듯이 두둥실 떠올라서 네다리를 바트게 끼고 긴 목을 움추리고 넙죽하게 엎드리면 둥글둥글한 것이 수박 같고 평평하고 넓적한 것이 솥뚜껑 같도다. 나무 베는 아이들과 고기 낚는 늙은이들이 보아도 무엇인지 모르니 오래 살기가 태산 같고 평안하기가 반석과 같다. 남이 모르는 변화가 무궁하고 육지에 이르러서 토끼를 만나면 잡을 꾀가 신통하다. 한신-한나라의 유명한 장군-이 광무군 싸움에서 이좌거-한나라의 이름난 선비-의 꾀를 얻어 초패왕을 꾀어낸 수단으로 토끼를 잡아올 수 있는 자는 나뿐이다. 네가 어떻게 나의 지혜와 깊은 계교를 따를 것이냐?" 문어가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 대꾸할 건덕지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뒤통수를 툭툭 치고 흔들흔들 물러나니 낭패스럽기 짝이 없었다.
용왕이 자라의 손을 잡고 술을 부어 주면서 칭찬을 하셨다. "그대의 슬기와 말솜씨는 참으로 놀랍도다. 부디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우고 빨리 돌아오라. 공만 세우면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릴 것이로다." 자라가 황공하여 엎드려 절한 뒤 아뢰었다. "소신은 용궁에만 있었고 토끼는 산 속에만 있으니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화공을 부르시어 토끼의 모양을 그려 주옵소서." 용왕이 옳게 여겨 즉시 그림과 글씨를 관장하는 도화서에 분부하여 화공들을 불러오게 했다. 이에 여러 화공들이 모이는데 인물을 잘 그리는 모연수-한나라 화가-, 산수도를 잘 그리는 오도자-당나라 화가-, 용을 잘 그리던 이장군-당나라 화가-그밖에 여러 화가들이 토끼 화상을 그리려고 문방사우를 차려 놓았다. 이어 화공들이 둘러앉아 토끼화상을 그리는데 각기 한 가지씩 맡아서 그리었다. 천하에 이름난 산의 경치를 보던 눈을 그리고, 두견새와 앵무새가 지저귈 때 소리 듣던 귀를 그리고, 난초, 지초 등 온갖 향기로운 풀과 꽃을 따먹던 입을 그리고, 동지섣달 찬바람에 바람막던 털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겹겹이 싸인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펄펄 뛰던 발을 그렸다. 그려놓고 보니 두 눈은 도리도리, 앞다리는 짤막, 뒷다리는 길쭉, 두 귀는 쫑긋한 것이 분명히 산토끼였다. 용왕이 보고 크게 기뻐하여 뭇화공들에게 황금과 비단을 내리시고 그림을 자라에게 주었다. 자라가 공손이 절하며 받자 용왕은 친히 술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거듭 석 잔을 권한 다음 말했다. "짐이 이제 그대를 먼 곳에 보내게 되니 군신 사이에 그리운 정을 이길 수가 없도다. 짐이 이 감회를 한 수의 글로 나타내 그대를 전송하려 하니 받아 보도록 하라." 이어 한 폭의 비단에 붓으로 시를 써서 주었다. 자라가 받아보니, <오늘 그대가 먼길을 가는 것은 오직 짐 때문이니, 흰 구름 흐르는 머나먼 길에 반드시 청산의 명약을 얻어오게나.> 자라가 두 손으로 비단을 받아 시를 읽더니 곧 한 수의 시를 지어 용왕께 올렸다. <귀하신 글이 갈 길을 재촉하니 눈물은 그릇에 다하고 새벽빛이 열리도다. 떠나가는 신하의 의로운 뜻은 영약을 못 얻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용왕이 자라가 바친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셨다. "그대의 붉은 충성이 글 속에 나타나 있으니 토끼를 잡아오는 것은 이제 걱정할 것이 없도다." 이어 자라의 글을 여러 신하들에게 읽어보라고 좌승상 거북에게 내리셨다. 뭇신하들이 읽어보고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라가 용왕께 하직하고 토끼 화상을 이리 접고 저리 접어 등에다 지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물에 가라앉기 알맞았다. 한참동안 생각한 끝에 오므렸던 목을 길게 늘이고 한 편에 접어 넣고 도로 움추리니 감쪽같았다. 주부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소식을 듣고 집안 식구들, 친척들이 모두 다 모였다. 자라의 모친이 근엄한 어조로 훈계했다. "너의 부친이 욕심 많아 낚싯밥을 물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 오직 너 하나만 믿고 살았느니라. 네가 지금 벼슬하여 대왕을 섬기다가 대왕께서 병환이 나셔서 약을 구하러 간다 하니 부디 충성을 다하여라. 지성으로 하다가 못 얻거든 거기서 죽으리다 결심해라. 대대로 충신 집에 불충한 신하가 나오면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자라가 절하며 공손히 아뢰었다. 그러자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물 밖의 세상은 위태로운 땅이니 부디 조심하셔서 큰 공을 세워 가지고 오십시오. 다시 기쁘게 만나기를 부디 바라옵니다." 자라가 엄숙하게 대꾸했다. "목숨이 길고 짧음과, 행운이 있고 없음은 모두 하늘에 달렸으니 뜻대로 되지는 못할 것이오. 다녀올 동안에 늙으신 어머님과 어린 자식들을 잘 보호하고 살피시오." 이어 친척들이 차례로 하직했다 ."아저씨, 평안히 다녀오십시오." "형님, 부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조카, 잘 다녀오너라." 자라가 뭇친척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행장을 마련하여 넓은 바다 깊은 물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지향없이 흐르다가 뭍으로 기어 올라갔다.
때는 춘삼월 한창 좋은 시절이었다. 산천의 초목과 뭇생물들이 저마다 즐기는데 활짝 핀 두견화에서는 향기가 진동하고, 쌍쌍이 나는 봄나비는 즐거움을 못 이기어 날아들었다. 하늘하늘한 버들가지는 시냇가에 휘늘어지고, 금황색 꾀꼬리는 고운 소리로 노래하고, 뻐꾸기는 서로 부르는데 참으로 신선 세계와 같았다. 소상강의 기러기는 간다고 인사하고, 강남서 방금 온 제비는 왔다고 인사하느라 분주히 날아들었다. 나무 위의 비죽새는 즐겁게 웃고 함박꽃에는 뒤웅벌이 모여들었다. 방울새는 떨렁, 물레새는 짝걱, 접동새는 접동, 뻐꾸기는 뻐꾹, 까마귀는 까욱, 비둘기는 꾹꾹 우니 그것 또한 좋은 경치였다. 모든 산봉우리와 골짜기에는 꽃들이 활짝 피었고 시냇물은 흰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푸른 대나무아 소나무는 오랫동안 지녀온 절개를 나타내고 있었다.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활짝 피었고, 이상야릇한 바위들은 사방에 겹겹이 싸였다. 절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와당탕 퉁탕 소리를 내며 흘러가니 진정 선경이었다. 자라가 한참 이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소?" 자라가 정신이 들어 바라보니 자기 모습과 비슷한 짐승이었다. 해서 반가운 김에 꾸벅 인사를 하고 말하였다. "나는 용궁에서 온 자라 이온데 댁은 뉘시오?" 그러자 그 짐승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 신분을 말하자면 장황하나 그대의 생김새가 나하고 비슷하니 설명을 하리라. 우리집 선조께서 남해의 용궁에서 벼슬하여 대대로 충신을 지내더니 조부님이 본래 성질이 강직하여 용왕께 직간 하시다가 소인의 참소를 만나 용궁 밖으로 내쫓겼소. 그 이후고향에 못 가시고 산에서 지내시니 사람들이 보고 불쌍하다 하여 남생 선생이라 불렀소. 할머니도 수중에서 기다리다 못해 육지살림 차리니 자식들을 낳아 도토리를 주워 먹고 살고 있다오." 자라가 들어본즉 바로 친척이 아니겠는가. 해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참으로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구료. 우리 선조가 육형제이신데 지금 수중에는 다섯 갈래 밖게 없구료. 얘기를 듣고 보니 형씨가 바로 우리집 종손이구료." 남생이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여지껏 헤어져 있다가 이제야 만났으니 정말 반갑기 이를 데 없소이다. 그런데 종씨는 어찌하여 수궁에서 나와 이렇게 거닐고 있습니까?" 자라가 듣고 적당히 대답했다. "우리 수궁에서 이번에 대궐을 다시 짓는데 지관이 없어 눈이 밝기로 이름난 토끼를 모셔다가 터를 잡으려고 했소이다. 그런데 토끼의 생긴 형용을 몰라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남생이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토끼를 만나려고 오셨구료. 토끼라면 저쪽 산골자기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자라가 듣고 크게 기뻐했다. "종씨, 고맙소이다. 왕명이 급하니 나는 이만 가 보겠소이다.""살펴 가십시오." 자라는 남생이와 헤어져 푸른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며 토끼를 찾았다. 산골짜기를 들어서니 온갖 짐승들이 내려오고 있는데 발발 떠는 다람쥐, 노루, 사슴, 이리, 승냥이, 곰, 멧돼지, 너구리, 고슴도치, 호랑이, 원숭이, 코끼리, 여우, 담비 등이었다. 자라가 목을 늘여 이리저리 살피었더니 뒤쪽에서 한 짐승이 내려오는데 그림과 비슷했다. 얼른 갑주 안에 감추었던 그림을 꺼내어 비교해 보니 틀림없는 토끼가 아닌가. 자라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부르려다가 그 짐승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자 거동을 잠시 살펴보았다. 풀잎도 뒤적이며 사리순도 뜯어보고 높은 낭떠러지 사이를 이리저리 뒤며, 할금할금 강동강동 뛰노는데 영락없는 토끼였다.
자라는 음성을 가다듬고 점잖게 물었다. "높은 산마루에 산수도 좋을시고. 저 양반, 혹시 토선생이 아니십니까? 나는 본래 물나라의 호걸인데 천하에서 좋은 벗을 만나고자 널리 찾아다니다가 오늘에야 산중의 호걸을 만났소이다. 이 기쁜 마음 그지없어 토선생을 초청하니 선생은 꼭 허락해 주십시오." 토끼의 근본 성질이 무겁지 못하고 몸 또한 왜소하니 산중의 모든 짐승들이 멸시했다. 하다못해 쥐와 다람쥐까지도 토끼야, 토끼야 하고 아이 부르듯 하는데 누가 와서 선생이라 부르니 토끼는 기분이 너무 황홀하여 깡충깡충 뛰면서 점잖게 대꾸했다. "그 누가 날 찾는가? 산이 좋고 골짜기가 깊어 경치가 좋은 이 강산에서 나를 찾는 이가 그 누구인가? 수양산의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자고 나를 찾는가, 소부와 허유가 귀를 씻자고서 나를 찾는가, 부춘산의 엄자릉이 밭을 갈자고 나를 찾는가, 먼 산의 불탄 잔디에서 개자추가 나를 찾는가, 한나라의 장자방이 퉁소를 불자고 나를 찾는가, 상산사호-상산에 산다는 네 명의 신선-가 바둑을 두자고 나를 찾는가, 굴원이 물에 빠져 건져 달라고 나를 찾는가, 시 잘 짓는 이태백이 시 짓자고 나를 찾는가, 유령이 술 마시자고 나를 찾는가? 석가여래 아미타불이 설법하자고 나를 찾는가, 적벽강의 소동파가 뱃놀이를 하자고 나를 찾는가, 취용정에서 구양수가 잔치하자고 나를 찾는가, 그 뉘시오?" 두 귀를 쫑긋거리고 네 발을 발발 놀려 가만히 와서 보니 둥글하고 넙적하며 검고 편편한 것이 매우 이상하게 생기어 머뭇거리기만 했다. "토선생, 어서 이리 오시오." 자라가 자꾸 오라고 청했다. 토끼는 위험이 없다고 느끼어 가까이 가 서로 절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l자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토선생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여서 한 번 보기를 원하였는데 오늘에서야 호걸을 만나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오이다." 그러자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구경했지만 그대같이 못생긴 짐승은 처음 보는 바이오. 담구멍을 뚫다가 학지뼈가 빠졌는지 발은 어찌 그리 몽똥하며, 양반 보고 욕을 하다가 상투를 잡혔는지 목은 어찌 그리 기다랍니까? 사면으로 살펴보아야 나무 접시 모양이구료. 그건 그렇고 댁은 도대체 뉘시오?" 자라가 듣고 보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토끼를 잘 꾀어 가려면 성질을 부려선 안되겠으므로 애써 분을 누르고 의젓하게 대답했다.
"나는 남해 용궁에서 주부 벼슬을 하고 있는 자라이외다. 토선생이 나더러 못생겼다고 하였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요, 등이 넓은 것은 물에 떠다녀도 가라앉지 않기 위함이요, 목이 긴 것은 먼 데를 살피기 위함이요, 몸이 둥근 것은 모든 처사를 둥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물 속의 영웅이요, 수중 생물의 어른이니 세상에서 문무를 겸한 이는 오직 나뿐인가 생각되오." 토끼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갖은 풍파를 다 겪었으나 그대와 같은 호걸은 처음 만나오." 자라가 목을 길게 늘이고 물었다. "그대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오?" 토끼가 한 번 깡충 뛰고는 대답했다. "내 나이를 알려면 육갑이 몇 번이나 지났는지 모를 지경이오. 소년 시절에 달나라에 가서 계수 나무 밑에서 양방아를 찧다가 유궁후예-옛날에 선경에서 불사약을 구한 사람-의 부인이 불로초를 얻으러 왔기에 내가 얻어준 적이 있지요. 이것만 보아도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이 내게는 제자 뻘이요, 팽조-오래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가 비록 오래 살았다고는 하나 내게 비하면 입에서 젖비린내가 날 정도지요. 그러니 그대와 비교해서 내가 어른이 아니겠소?" 이를 듣고 자라가 뒤질세라 자기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토선생, 그대는 스스로 어른이라 칭하니 소가 다 웃겠소이다. 아무튼 내가 지내온 일을 대강 말할 것이니 들어보시오. 다 듣고나면놀라 자빠질 것이오. 반고-한나라 때의 역사가-의 생일날에 잔치상을 내가 마련해 주었으며 천황씨가 임금 자리에 오를 때 술안주로 어물 갖추기를 내가 했으며 지황씨, 인황씨가 온 세상을 마련하여 다스릴 때의 일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으며, 유소 씨가 나무를 얽어 집을 지을 때와 수인 씨가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을 때도 모두 나와 함께 의논했다오. 어디 그뿐인 줄 아시오? 복희씨가 만든 팔괘로 용마의 등에 하도수를 나와 하마께 풀어 내었고, 또 공공씨가 싸우다가 하늘이 무너져서 여와씨가 오색돌로 하늘을 기울 때에 석수장이 노릇을 내가 하였지요. 또한 신농씨가 장기를 만들고 온갖 풀을 맛보아서 의약을 마련할 때에 내가 역시 참견하였으며, 헌원씨가 배를 만들 때 목수 일을 내가 했으며 축록들에서 치우가 싸울 때에 내가 돌기를 추천해서 잡게 하였으며, 금천씨의 봉조서와 전옥씨에게 제신하던 술법을 내가 가르쳐 주었소. 그것 뿐이 아니오. 고신 씨가 스스로 제 이름을 자랑하던 말을 내가 옆에서 들었다오. 요임금의 강구노래는 지금까지 흥겹고, 순임금의 남풍가는 어제인 듯 즐겁구려. 우임금이 구 년 홍수를 다스릴 때에 그 공덕을 내가 칭송하였으며, 탕임금이 상림들에서 비를 빌던 일과 주나라의 문왕, 무왕, 주공의 찬란하던 시절이 내 눈에 아직도 뚜렷하고, 서해 바다로 놀러갔다가 굴원이 벽라수에 빠져 죽을 때 미처 건져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된다오. 이런 일들로 헤아려 보면 나는 토선생보다 몇 천 갑절이나 웃어른이 아니겠소?" 토끼가 듣고 어이가 없어서 입만 딱 벌렸다. 그러자 자라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런 재담은 그만 두고 세상의 재미나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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